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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옥단어가 물동이를 이고지고 걷던 옥단이길
옥단어가 물동이를 이고지고 걷던 옥단이길
  • 김샛별 기자
  • 승인 2018.01.15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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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역사가 머무는 목포 목원동
옥단이길 김우진 거리. 사진 / 김샛별 기자

[여행스케치=목포] “옥단어~ 옥단어~”하고 마을 사람들이 부르면 물지게를 이고 지고 동네를 누볐던 옥단이. 옥단이가 걸었던 그 길에는 근대의 역사가 그대로 녹아 있다. 일본인과 대비되는 근대 조선인의 삶을 비교해볼 수 있는 길, 옥단이길이다.

일본식 사찰인 동본원사. 이 건물을 기점으로 일본인 거류지와 조선인 거류지로 나뉜다. 사진 / 김샛별 기자
무안경무서터에는 '후지끼 살인사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오거리 맞은편부터 유달산까지 옥단어가 누볐던 길

목포에 들어선 일본 첫 불교사원인 동본원사 목포별관이었던 오거리문화센터를 기점으로 개항 이후 왼쪽은 일본인 거류지, 오른쪽이 조선인 거류지로 나뉘었다.

목포의 대표적인 일본식 건물인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구 일본 영사관 등이 있는 구역은 질서정연하게 조성되어 있고, 각종 위생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그에 비해 조선인 거류지는 원칙도, 기준도 없이 산기슭이나 평지에 무질서하게 집을 세웠다. 위생설비도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

조수경 목포 골목길 해설사는 “지금이야 흙을 갖다 부어 나무를 심었지만 원래 유달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돌산에 물이 스며들질 않으니 없고, 유달산 자락에 물이 귀해 물장수가 있었다”며 “옥단이는 이 비탈길을 마다 않고 골목 안까지 물을 길러다 생계를 유지했던 실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힘이 장사였던 옥단이는 말도 좀 더듬고, 사팔뜨기였다. 동네 잔칫집에는 늘 옥단이가 있었다. 물도 길어다 주고, 허드렛일도 하며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잔심부름을 하고, 한쪽 작은 뒷방에서 새우잠도 자다 춤 한번 춰보라, 하면 치마춤을 훔치며 춤을 춰 모두를 웃음 짓게 했던 옥단이의 삶의 궤적은 곧 우리 근현대사의 뒷골목 풍경과 남아 있다.

옥단이길 표지. 사진 / 김샛별 기자
1925년 건립된 목포청년회관. 지금은 공연장 및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걸음 걸음에 더듬어 읽는 근현대사

1930~1950년대, 일제 강점기에서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폭풍 같은 세월을 살았던 옥단이의 삶을 따라 걷는 옥단이길을 걷는 방법은 7개 코스로 다양하지만, 굵직굵직한 역사적 시간을 따라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목포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의 횡포에 마냥 당하지만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 사건이 있다. 일명 ‘후지끼 살인사건’인데, 무안경무서에서 조선인이 최초로 일본인에게 승소한 사건이다.

지금은 터만 남은 무안경무서터에는 이를 벽화로 그려놓았는데, 이 사건은 고리대금을 제대로 갚지 못했다는 이유로 후지끼 히로스케가 오경오라는 조선인을 구타·고문해 그만 목숨을 잃게 한 것이 발단. 그 아들 오수민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후지끼의 배를 갈라 살해하고, 그 내장을 꺼내 거리를 행진한 후 서에 가 자수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일본 영사는 후지끼 히로스케를 구타한 한국인을 철저히 조사해 처분할 것을 요구했으나 당시 담당 경찰관이었던 구종명은 “이 사건을 놓고 보면, 원인이 후지끼와 오경오”라며 “두 사람 관계의 일인데, 두 사람이 모두 죽어버렸으니 없던 일로 하자”고 무마시키고 덮어버려 최초로 조선인이 승소한 사건이다. 이를 기념하는 총순 구종명 영세 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목포청년회관이 보인다. 목포청년회관 건물은 일제강점기 시절, 목포 청년들의 문화 사랑방이자 목포 최초의 시민회관 성격을 지녔던 곳이다.

조수경 해설사는 목포청년회관을 꼽아 “특별한 디자인 요소는 없지만 목포의 역사·정신사적 맥락을 짚으면 목포 시민들이 공동 주체가 되어 자발적 성금 운동으로 지어져 항일 민족운동의 보금자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설명한다.

조 해설사는 “일본인들이 지은 건물들과 달리 조선인들이 스스로 힘으로, 필요에 의해 우리의 방식으로 지었다는 점을 축담에서 알 수 있다”며 “오각형 돌을 쌓아올린 일본식 축담과 달리 네모반듯하게 쌓아올린 단층 석조건물”이라 말한다.

목포청년회관을 비롯해 옥단이길에는 북교동 교회, 무안감리서 서고 등에서 식민 정책을 위해 일본인들이 세운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일본영사관 등 다수의 근대 양식 건축물들과 확연히 대비되는 조선인들의 건축을 골라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당시 만인계터였던 곳엔 만인계웰컴센터가 지어져 여행자들을 반긴다. 사진 / 김샛별 기자
오각형으로 지어진 일본식 축담. 사진 / 김샛별 기자

근대판 로또부터 한국전쟁 이후 풍경까지

목포의 근대화는 개항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일. 특히나 목포는 부산과 인천에 이어 개항한 곳이어서 개항장거리를 둘러보아야 근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조수경 해설사는 “개항이 됐으면 발전이 되어야 하는데 당시에 돈이 어디에 있겠어요?”라며 만인계터에 대한 말문을 연다.

‘일만 만’자에 ‘사람 인’을 쓰는 만인계터는 말 그대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계를 한 곳. 개항과 동시에 개발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돈이 없자 방법을 강구한 끝에 지금의 복권처럼 만 개의 표를 장당 5냥에 팔았다.

조 해설사는 “당시 1등은 3000냥을 받았다”며 “추첨날 만인계 광장에는 성황을 이뤘다”고 설명한다. 돈이며 사람들이 몰려드는 개항장 앞이자 근대판 로또였던 만인계까지 열렸으니 주변 상권은 활발할 수밖에. 번성했던 당시의 거리는 부자들이 많은 동네라 한때 만복동이라 불렸었다.

지금은 골목골목 빈 집이 늘어가는 콩나물 동네. 사진 / 김샛별 기자
일제 강점기에 지어져 지금까지 시장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쌀집. 사진 / 김샛별 기자
수레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당시엔 꽤나 넓었던 콩나물 동네 길목. 사진 / 김샛별 기자

만복동의 또 다른 별명은 ‘마파지’였는데, 겨울에 서풍과 북풍이 마주치는 곳이라 목포에서 가장 추운 곳 중 하나라 한다. 맞바람이 부는 곳이라는 뜻의 ‘마파지’처럼, 만복동 너머엔 콩나물 동네라 불리는 곳도 있다. 큰 시장 옆에 자리한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하나둘 모여들어 움막을 치며 살기 시작한 곳. 부업으로 콩나물을 길러 시장에 팔아 지금까지도 콩나물 동네라 불린다.

“다른 길들에 비하면 길이 꽤 넓죠?”라며 조 해설사는 “콩나물을 담은 손수레가 지나다녀야 해서 길이 넓다”고 설명한다. 지금 보면 넓지 않은 길이지만, 성인 한두명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옥단어길에 비하면 손수레가 다녔던 길은 꽤나 넓게 느껴진다.

“이 동네는 물이 좀 났던가 봐요”라며 설명을 시작한 조 해설사는 “집마다 콩나물을 기를 물을 길러놓고 있으면 학교 다녀온 아이들이 통에 들어가 놀고, 엄마한테 혼이 나면 다른 집에 가서 또 통에 들어가 놀고 그랬다”며 말을 전한다. 어려운 시절에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는 즐거웠던 시절.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 빈집이 많은 동네지만, 장난스럽게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소리가 겨울바람에 묻어오는 것만 같다.

Info 옥단이길
목포역~오거리~로데오광장~정광정혜원~노적봉~만인계 육거리(노라노 미술관)~DJ 신혼집~콩나물 동네~차범석 생가~목포청년회관(무안감리서터)~무안경무서터(구종명비)~불종대터~유달예술타운~북교동 성당(김우진 거리)~북교초등학교~양동교회(이난영 생가)~중앙식료시장(먹통시장)~남진생가~박화성 생가터(차없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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