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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억척 아지매들의 ‘깡깡’소리 울려퍼지던 '깡깡이길'
억척 아지매들의 ‘깡깡’소리 울려퍼지던 '깡깡이길'
  • 김샛별 기자
  • 승인 2018.03.02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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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 즐비한 남항동의 짭짤한 역사
조선수리업으로 이름난 영도 도선장 주변을 둘러보는 '깡깡이길' 전경. 사진 / 김샛별 기자

[여행스케치=부산] 근대의 역사와 항구도시로서의 부산의 역사가 오롯하게 담겨 있는 삶의 현장을 보고 싶다면, 영도다리를 건너 ‘깡깡이길’을 보아야 한다.

1887년 다나카 조선소가 들어선 이후 영도는 조선 산업을 발달시킨 곳이자 조선 수리업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지금도 남항을 따라 50여 개의 조선소와 수리조선소가 해안을 따라 쭉 들어선 수리조선소길은 ‘깡깡이길’로 통한다.

깡깡이길은 지금도 수리조선과 관련한 곳이 많이 남아 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깡깡’선박 수선음을 연주한 깡깡이 아지매들

깡깡이질은 항해를 마친 배의 수리를 위해 갑판에 밧줄을 묶고, 그에 의지해 강판에 들러붙은 조개껍데기와 녹을 쇠망치로 깡깡 두들겨 제거하는 일을 말한다. 수리조선소길이 ‘깡강이길’로 불리는 건 배 하나에 열 명에서 서른 명까지, 보통 열다섯 명의 아지매들이 붙어 아침부터 밤까지 ‘깡깡’소리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광순 부산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철판인 배에 붙어 일하니 여름엔 열을 받아 뜨겁고, 겨울엔 또 얼마나 찼겠냐”며 “깡깡 어찌나 망치질 소리가 크고 귀에 좋지 않았던지 당시 일했던 사람들은 난청도 많고, 밧줄에만 의지해 일하기 때문에 떨어져 죽는 경우도 더럿 있었다”고 설명한다.

특히 박정희 시대 조선업 장려 정책으로 신조된 철강선이 늘어난 1960년대 부산 영도에서 나는 ‘깡깡’소리가 새 시대의 산업 역군들의 소리처럼 비유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800원~1000원 정도의 임금을 받으며 쇳가루와 굉음 속에서 생계를 책임진 그들은 가장을 대신해 가족들의 호구지책을 마련했던 ‘깡깡이 아지매’들의 삶은 물론, 그네들의 일터였던 수리조선소의 풍경을 그려볼 수 있는 길이 대교동, 대평동을 모두 아우르는 남항동의 깡깡이길이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도개교인 영도대교. 사진 / 김샛별 기자
조선 수리업으로 이름 날렸던 옛 영도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영도경찰서 담장갤러리 작품. 사진 / 김샛별 기자

도개하는 영도대교와 역사를 담은 담장갤러리

수리조선소가 즐비한 영도 도선장과 옛 다나카조선소 자리를 둘러보기 전에 남포동에서 영도를 잇는 영도대교에서부터 걷길 권한다. 오후 2시, 15분 동안 다리 왼쪽이 들리는 도개 장면은 관광객들의 이목을 끄는 진풍경이다. 허광순 해설사는 “도개식만 볼 게 아니라 영도다리에만 있는 다리목을 봐야 한다”고 영도대교 옆에 붙어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다리가 놓인 주위나 들어서는 어귀를 일컫는 ‘다리목’은 일본식 건축의 흔적으로 ‘예비 다리’라고 보면 된다. 석교로 만드는 미국과 달리 일본은 목교가 대부분이다. 나무다리는 홍수에 약해 다리가 떠내려가는 일도 흔하고, 오래되면 재설이 필수라 그를 위한 다리목을 꼭 만들어둔다. 1934년 일제강점기에 개통된 영도대교에 다리목이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도개기능을 복원할 당시 다리목 역시 옛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영도다리를 건너면 ‘현인 노래비’와 옛 영도 사진과 당시 풍경을 재현해낸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영도경찰서 담장갤러리를 만날 수 있다. 영도다리가 없던 시절 속초 갯배처럼 영도와 남포동 사이를 오가던 ‘선도’부터 시작해 옛 영도다리의 모습, 조선소가 들어서기 한참 전 삼국시대부터 국마장으로 이름 높아 ‘절영도’라 불렸던 옛 영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도다리가 생긴 후 영도를 지나던 남항동 전차 종점과 시발택시, 옛 다나카조선소가 있던 시절의 모습을 콜라주 작품으로 만들어 놓아 당시 생활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인공 포구인 영도 도선장에는 여러 배들이 정박해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배나 뱃일에 필요한 물건들이 도선장 근처에 널려 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못 구하는 선구가 없고, 못 고치는 배가 없다

영도경찰서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영도 도선장이 나온다. 건너편으로 자갈치 시장과 용두산타워가 보이는 영도 도선장은 영도에서 자갈치 시장까지 가는 객선이 2008년까지 운행됐던 곳이다. 다리를 이용하면 15분 정도 걸리는 것이 배로 가면 5분이면 가니 영도다리가 생겼어도 꾸준히 이용됐던 것.

영도 도선장에는 영도 대풍포 매축비가 있다. 허광순 해설사는 “원래 여기까지도 바다였다”며 “만이었던 이곳을 인공 포구로 만든 게 대풍포”라고 설명한다. 대풍포가 있는 이곳은 대평동 마을의 초입이기도 하다. 그는 “바람이 많이 이는 것이 싫어 동네 이름을 풍(風)을 평(平)자를 써서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대평동이라 지었다”고 귀띔한다. 지금도 피항지 역할을 하는 이곳은 옛날에도 풍랑을 피해 머물던 장소였다.

허 해설사는 “지금 여기 있는 배들은 고기 잡는 배나 자갈치 시장을 오가는 배가 아니라 화물택시격인 배들”이라고 설명한다. 수면이 얕아 큰 배들은 못 들어오기 때문에 큰 배들은 멀리 대놓고, 기술자들과 필요한 부품들을 실어다 주고, 오후엔 퇴근 시키는 역할을 하는 배들이라고. 그래서 주변에 선박 엔진을 비롯해 커다란 사슬들, 부품들이 널려 있다. 

옛 다나카조선소 자리에 조선업과 관련한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해둔 '거리박물관'. 사진 / 김샛별 기자
'거리박물관' 중 깡깡이 아지매들이 했던 '깡깡이질'에 대해 표현해둔 작품. 사진 / 김샛별 기자

포구를 따라 걸으면 옛 다나카조선소 자리가 나온다. 지금도 조선소 작업을 하는 산업현장이기 때문에 안전사고의 위험이나 기술 유출 등의 문제로 펜스가 쳐져 있는데, 거리를 걸으며 마을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박물관’으로 재치 있게 펜스를 꾸며두었다. 1887년 영도에 나룻배가 다니던 시기부터 1930년대 일본에 의한 선박 건조, 1945년 미군에 의해 접수 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관되어 민간에 불허된 역사와 배의 구조, 배를 수리하는 과정 등을 작품으로 설치해두었다.

조선을 상징하는 닻을 통해 깡깡이 예술마을을 표현한 작품. 사진 / 김샛별 기자

예술 입은 이북마을과 깡깡이길

펜스를 따라 걷다 보면 ‘깡깡이 예술마을’을 알리는 닻 모양을 한 설치미술이 보인다. 이 뒤쪽부터는 이북마을이다. 일제강점기 치하를 지나 또다른 아픈 역사인 6.25한국전쟁의 결과다. 이 마을의 특징은 가로로 긴 집이 많다는 것. 일명 ‘하꼬방’이라 불리는 상자 같은 작은 집은 제일 작은 곳이 4평, 큰 곳이 15평 정도로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가로로 길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한 지붕 밑에 칸막이만 설치해 공간을 나눠 네다섯 가족이 함께 살았다.

허광순 해설사는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 인구의 1/3이 부산에 피난민으로 내려왔었다”며 “특히 당시 영도에는 미국물자로 만든 피난민 수용소가 있어 다른 지역보다 피난민이 훨씬 많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그 중 이북피난민들이 이곳으로 와 33세대 정도가 살았는데, 지금은 돌아가시기도 하고 나가기도 해서 16~17세대 정도가 있다”고 말한다.

낙원은 이 땅 위에 그리고 바로 당신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메세지를 담은 제 팔리토의 <경외로운 자연>. 사진 / 김샛별 기자
화려한 색채를 통해 사랑과 평화, 자유에 대한 느낌을 주제로 이북마을에 그려진 벽화. 사진 / 김샛별 기자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난 동네는 아픈 역사 위에 ‘페인팅시티’로 예술을 입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원색을 사용해 새, 식물 등 자연을 그려놓은 페인팅은 브라질의 국민 화가인 ‘제 팔리토’의 작품이다.

그뿐 아니라 마을을 빠져나와 수리조선소들을 보면 낡은 창고나 공업사 벽면을 기름칠 하는 모습, 망치를 두드리는 모습 등 ‘조선’과 관련한 주제로 그려놓은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작품이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곧 표현 예술인 키네틱 아트는 물론, 밧줄에 매달려 서서 일해 앉지 못했던 깡깡이 아지매들을 생각하며 앉을 곳을 마련한 아트벤치 프로젝트도 곳곳에 있다.

1951년 옛 점바치골목 사진. 사진 / 김샛별 기자
지금도 매년 제의를 지내며 점을 봐주기도 하는 용신당의 모습. 사진 / 김샛별 기자

소금기 어루만져주는 용신당

마을의 끝,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작은 사당인 용신당이 보인다. 영화 <국제시장>에도 나왔듯 영도다리 밑에는 원래 점집골목이 많아 한때 ‘점바치골목’이라 불렸었다. 허광순 해설사는 “대구 할매가 처음 점집을 폈었는데, 피난통에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기약 없이 헤어진 이들이 언제 볼 수 있는지 물으러 왔었던 것이 시작”이라며 “목조가옥 형태의 점집이 80여 개가 넘었고, 노점상처럼 좌판만 펴고 점을 봐주던 이들도 30여 곳이 넘었을 정도였다”고 설명한다. 그는 “새마을운동 때 그 많던 사당을 다 없앴는데 용신당은 워낙 용해 냅뒀다”고 전한다.

용신당은 영도다리가 개통된 후 밤마다 귀신 울음소리가 영도 다릿목에서 들려오자 원혼들을 달래는 위령제를 올리기 위해 갯가에 세운 게 되었다고 한다. 특이하게 용신당은 ‘카미사마’로 불리는 일본 할매신을 모시는데, 남항동이 일본과 교역이 많았으며, 그런 이유로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평소에 닫혀 있는 용신당은 사당을 지키는 이가 지금도 일 년에 한 번씩 제를 올리고, 여전히 뱃사람들의 점을 봐주기도 한다.

쇠망치로 내리치던 과거와 달리 유압식으로 선체의 이물질을 제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홍등대가 보이는 길 끝에 조선소에서 한창 유압식으로 배 겉에 붙은 이물질들을 제거하는 모습이 보인다. 한때 쇠망치로 깡깡 소리를 내며 떼어내어야 했던 가난. 그러나 이 길엔 억척스럽게 버텨내야만 했던 지난 세월을 깡깡 모두 떼어내는 대신 녹진했던 그 시절, 세월의 짠맛이 여전히 남아 있다.

Info 깡깡이길
코스
부산종합관광안내소~중구관광안내소~영도대교~영도경찰서담장갤러리~영도도선장~깡깡이길~대평동 일대~용신당
정기투어 매주 토·일 오후 1시30분~3시 30분 (무료, 약 2시간 소요)
참가방법 tour.busan.go.kr, www.bt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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