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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강원 태백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그 긴 여정의 시작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강원 태백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그 긴 여정의 시작
  • 신정일 객원기자
  • 승인 2018.04.24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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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천의봉 너덜샘에서 황지를 지나 동점동 경상도의 입구까지
낙동강의 상징, 황지.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편집자 주
평생을 산천을 걸으며 보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신정일 대표는 낙동강을 세 번째 걷는다. 지난 2001년 9월, 517km의 낙동강을 걸었으며, 그로부터 여덟 해가 훌쩍 지난 2008년 60여 명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지난 2월부터 1년간의 일정으로 ‘우리 땅 걷기’ 회원 90여 명과 함께 ‘낙동강 1300리 길’을 걷고 있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라는 제목으로 낙동강 걷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여정을 연재한다. 

[여행스케치=태백] 한 방울, 한 방울의 물방울이 모여서 샘을 이룬다. 그 샘이 넘쳐서 아래로 흐른다. 강은 겸손하게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수많은 지류(支流)를 만나면서 흐르는데, 아무리 오염된 물길이나 작은 지류라도 어느 것 하나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채 흐른다.

폭포와 여울을 만나기도 하고, 댐을 만나기도 하며,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바다를 향해서 흐르는 것이 강이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천의봉 너덜샘.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낙동강 발원지에서부터 시작하는 1300리 여정
1300리라고 부르는 남한에서 가장 큰 강 낙동강 517km의 발원지는 어디일까?

모든 역사적 기록에는 태백의 ‘황지(黃池)’라고 실려 있다. 그러나 사전적 개념으로 강의 발원지는, 강의 하구에서 가장 멀리 올라간 물길을 가리킨다. 이에 황지에서 10km를 거슬러 올라간 천의봉 너덜샘이 강의 하구에서 가장 먼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발원지로 본다.

태백시 화전동이라고 쓰인 안내판 밑에서 흐르는 물길을 내려다본다. 싸리나무가 많아 ‘싸리재’라고 이름이 붙은 재 너머로 흐르는 물은 한강이 되고, 재 아래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 되어 저마다의 강줄기를 따라 아래로만 흘러서 바다에 이를 것이다.

나는 눈 덮인 너덜샘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제사를 지낸다.

“한울님이여 산신님이여, 낙동강 1300리 여정을 부디 보살펴 주시고, 한 발 한 발 제대로 걸어가게 하소서. 그리고 걸어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물을 ‘나 이외에는 모두 나의 스승이다’라는 <법구경>의 한 구절과 같이 스승이 되고 도반이 되게 하소서.”

해발 855m에 자리한 추전역.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추전역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 역임을 알리는 표지석.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가장 높은 기차역, 추전역에서
너덜샘 건너편에는 추전역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해발 855m)에 위치한 기차역인 추전역은 일반 객차는 쉬지 않는 역이다. 대처로 실려 가기 위해 쌓아놓은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던 역이지만 지금은 그 때 그 석탄을 찾아볼 수가 없다.

낙동강이 시작되는 너덜샘에서 천천히 내려가는 태백시 화전동(和田同)은 본래 삼척시 상장면(장성읍)의 지역으로서, 큰 두메였다.

용이 올라간 소가 있다는 용숫골을 지나 안충이란 사람이 터를 잡았다는 안충기 마을을 지난다. 옛 시절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는 성황당이 보이고, 옛날 어떤 사람이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초막골에 이르러 조금 더 내려가자 엄나무정자가 보인다.

옛날 지나는 사람들이 쉬어서 갔다는 엄나무정자를 지나며, 낙동강을 걷던 그 아침에 택시기사에게 들었던 그 당시 태백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장성 일대가 광산촌이 시작된 건 1933년부터라고 해요. 그 전만 해도 이곳은 손바닥만 한 밭에다 콩이나 옥수수를 심고서 살았던 화전민 촌이었어요. 1960년대 들어서면서 이곳 태백은 숯검댕이로 변했지요.”

크고 작은 광산이 마흔 다섯 개가 생기고, 황지, 장성을 합해 시로 승격된 81년에는 태백 인구가 13만 명쯤 되었다. 그러나 좋았던 시절이 한 10년이나 갔던가. 60~70년대 태백의 황금기를 만들었던 탄광은 석유를 쓰게 되며 막을 내렸다.

석탄을 많이 캐내던 시절 황지천 물은 온통 새카맣게 흘렀지만, 지금은 황지천 물도 많이 깨끗해졌다. 그러나 태백의 경제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정선 고한에 세운 강원랜드만 성업 중이다.

장성 부근의 황지천.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나무다리가 놓여 있는 황지천.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낙동강의 상징, 황지(黃池)
아침부터 두 시간 반, 10km쯤 걸어서 도착한 황지(黃池)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물이 계속 솟구쳐 오르면서 흐르고, ‘낙동강 천 삼 백리 예서부터 시작되다’라는 표지석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에는 낙동강의 원류라고 알려진 황지의 유래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옛날에 이곳에 황씨라는 인색하기로 소문난 부자가 살았다. 어느 날이었다. 마굿간을 쳐내고 있는 황씨 집에 중이 와서 시주를 청하자 황부자가 곡식은 주지 않고 쇠똥을 던져 주었다. 그러한 처사를 민망하게 여긴 황씨의 며느리가 시아버지 모르게 쌀 한 되를 중에게 주면서 사과를 하자 그 중이 시아버지 모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집이 곧 망할 것이니 나를 따라 오라.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자 마라.”

그 말을 들은 며느리가 아이를 업은 채 중을 따라서 구사리 산 정상 무렵까지 왔는데 벼락 치는 소리가 나면서 천지가 진동하였다. 놀란 며느리가 중의 당부를 잊은 채 뒤를 돌아보니 그가 살았던 집이 못으로 변해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던 중의 당부를 어긴 며느리는 그 자리에서 아기를 업은 채 돌부처가 되고 말았다. 강원도 고성의 화진포나 전라도 장흥의 억불산에서도 이런 전설이 유래하고 있다. 그것을 보면 지역은 달라도 ‘선하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는 것이 일반 사람들의 보편적 진리임을 알 수 있다.

황지의 물은 한국의 명수(名水) 100선에 들었고 수량이 풍부하며 맛이 좋아 1989년까지도 태백시 상수도의 수원(水源)으로 이용되었다.

원래의 못은 지금의 2배쯤 되었고 주변에는 나무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는데, 태백시의 중심가가 되면서 높고 낮은 건물들에 둘러싸여 그 당시를 실감할 수가 없다.

‘낙동강 천 삼 백리 예서부터 시작되다.’

그래, 내가 걸어갈 낙동강 천 삼 백리 여정 또한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수많은 산과 산 사이를 지나고, 들녘과 도시를 만나면서도 그침이 없이 흐르고 흘러갈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는 것과 한발 한발 내딛는 우리들의 발걸음을 아무도 중단시키지 못할 것이고, 어느 날 문득 우리들은 낙동강의 하구인 을숙도에 도착할 것이다.

장성으로 가는 길, 당집이 보인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태백산 자락을 따라 장성읍으로
발길은 황지를 벗어나 35번 국도에 접어들고 황지천의 물은 아직도 조금은 검은 빛이다. 얼마나 흐른 다음에 저 물길이 본래의 푸른 강물 빛을 낼 수 있을까. 모르는 일이다. 대림아파트 못미처에는 나무다리가 놓여 있고 그 아래로 강물은 쏜살처럼 흐른다.

한마음교를 지나 태백 소방서를 넘어서며 강폭은 더욱 넓어지고 상장초등학교를 지나며 태백산, 영월 쪽으로 가는 31번 도로가 나타나고 그 길을 따라간 곳에 태백산이 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영산이며 신령한 산으로 여겨온 태백산(1567m)을 두고 고려 때 사람 최선(崔詵)은 <용수사기>에 다음과 같이 평했다. “천하의 명산이 삼한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태백이다.”

또한 조선 전기의 문장가인 매월당 김시습은 <망태백산(望太白山)>이라는 시에서 “멀고 아득한 태백산을 서쪽에서 바라보니, 기암괴석이 구름 사이에 솟아있네 / 사람들은 신령님의 영험이라 말하는데 분명코 천지의 조화로세”라고 노래하였다.

태백산 자락을 흐르는 황지천을 굽어다보며 태백선 열차가 지나간다. 문백교를 지나며 동해, 현등으로 길은 나뉘고 장성여고가 있는 마을을 지나자 일광교에 이른다.

문곡리(文曲里)를 지나 도착한 신촌 마을에는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당집에 새끼줄이 걸려있고 여정은 장성읍에 접어든다.

장성리(長省里)는 본래 삼척군의 지역으로서 장승이 있었으므로 장성이라 하였다. 이 부근에 탄광이 개발됨에 따라 갑자기 발전되어, 1961년 1월 1일에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장성읍(長省邑)으로 부르게 되었다.

'굴'의 고어(古語)에서 지명이 유래한 구문소.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구문소 위에 있는 자개루.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물이 산을 뚫고 나가는 구문소
장성읍을 지나며 제법 넓어진 강, 그늘을 드리운 산 빛에 봄물이 들고 그곳에서 구문소(求門沼)가 지척이다. 구문소는 구무소의 한자 표기로 구무는 구멍, 굴의 고어(古語)이다.

‘굴이 있는 연못’이라는 의미가 있는 이 곳이 <세종실록지리지>나,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에는 천천(穿川)이라 표기되어 있다.

<정감록> 비결에는 이곳 구문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문은 ‘자시가 되면 열리고 축시가 되면 닫히는데, 자시에 석문이 열릴 때 그 안으로 들어가면 전쟁과 굶주림이 없는 오복동이라는 이상향이 있다.’

그 말처럼 이곳에서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도강산맥(渡江山脈)과 강물이 산을 뚫고 나가는 진풍경을 볼 수가 있다. 수억 년 전에 만들어진 석회암이 분포하고 있는 구문소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강물이 석회암 암벽을 깎아내린 자연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구문소에서 볼 수 있는 석회암 암벽.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동점역.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바라볼수록 신비한 구문소 아래에서 황지천이 철암천을 받아들이고, 몇 채의 민가가 드문드문 서 있는 동점동에 영동선의 한 역인 동점역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새로운 강물을 받아들이면서 유장하게 흘러가는 강, 그 강이 강원도 땅을 벗어나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으로 들어가는 곳에 두 개의 장승이 서 있다.

너덜샘에서 화전동을 지나 황지에 흐르고, 장성을 거쳐 구문소를 지나서 강원도와 경상도의 접경에 이른 것이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너덜샘에서 여기까지 25km, 60리 길을 흐르는 강을 따라 발길도 흘러온 것과 같이 쉴 새 없이 흐르는 세상의 이치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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