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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다크투어리즘] 무명천 할머니, 동광리 큰넓궤, 섯알오름... 4.3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크투어리즘] 무명천 할머니, 동광리 큰넓궤, 섯알오름... 4.3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18.04.30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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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세월, 사라져간 사람들의 기억을 찾아
무명천 할머니길. 사진 /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

[여행스케치=제주] 다크투어리즘은 ‘역사교훈여행’이다.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재난 현장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다크투어에 제주 4.3 현장은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체화하고, 그 경험으로 기억을 각인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그에 대한 사전지식. ‘알게 되면 보이나니…’라는 말처럼 조금 알고 간다면 수풀이 덮인 빈터에서도 역사와 공감하게 된다.

여행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니다. 시간을 넘어 그 때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이번 호에서는 4.3의 얼굴이 된 무명천 할머니를 만나고, 큰 동굴에서 살았던 사라진 마을 사람들, 일제에 유린당하고 4.3의 현장이 된 섯알오름까지 찾아가 본다.

(좌) 4.3의 얼굴이 된 고 진아영 할머니. (우) 할머니의 유품인 무명천. 사진 /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
월령리 진아영 할머니 삶터. 사진 /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

‘무명천 할머니’, 진아영 할머니 삶터
故진아영 할머니는 ‘무명천 할머니’로 알려져 있다. 4.3 평화공원 전시실의 끄트머리쯤 가서 할머니의 존재를 만나게 되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오랫동안 잔상에 남는다. 이전까지만 해도 평범했던 할머니는 1949년 1월, ‘그 일’이 있고 난 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4.3 학살의 얼굴이 되었다. 할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할머니의 삶터는 선인장 자생지로 유명한 한림읍 월령에 있다. 올레 14코스를 걷다보면 월령리 마을회관 근처에 두칸짜리 작은집을 발견한다. 낮은 돌담 안에 네모난 하얀 집이 파란 하늘 아래 있으니 초등학생이 그림일기에 그려 넣은 시골집 같다. 그렇지만 이 집의 주인이었던 할머니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옆 마을 판포리에 살았던 할머니는 군경이 난사하는 총에 맞았다. 그리고 턱을 잃었다. 이 사건은 할머니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평생 동안 뒤에서 누군가가 총을 들고 쫓아온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할머니는 월령리로 옮겨와 먹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얼굴을 무명천으로 감싼, 반송장 같은 모습으로 남은 인생을 살았다.

진아영 할머니 삶터 속 할머니의 방. 사진 /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
진아영 할머니의 부엌. 추모공간으로 꾸며져있다. 사진 /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

2004년 9월 4일 별세하기까지 당신이 겪었을 아픔과, 마을의 일원으로 스며들기까지의 외로움을 보통사람이 상상할 수나 있을까. 늘 악몽에 시달렸던 할머니는 모든 문마다 자물쇠를 달았고, 화장실에 갈 때도 방문을 잠그고 다녔다고 한다. 평생 소화불량과 관절염에 시달렸고, 사람들 앞에서는 흉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집은 할머니가 사시던 그대로다. 할머니가 얼굴을 감싸던 무명천들과 이를 만들고 고쳐 쓰던 실뭉치와 여기저기 아픈 곳에 붙이고 바르던 파스가 여러 개 보인다.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겨우 파스를 바르고, 바느질을 하는 것이었다.

그 세월동안 우리는, 이 나라는 너무도 몰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부 차원의 사과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후인 2006년의 일이다. 이제는 소천하신 할머니의 자리만 남아 참배객들에게 반성과 위로의 기회를 준다.

아무도 없는 작은 공간에 들어서서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차례상에 물을 바꾸고 간단히 주변을 정리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다니시던 골목을 걸어 본다. 할머니를 기리는 몇 개의 벽화가 있다. 골목 끝으로 부러진 막대기 같이 작고 마른 몸을 가진 무명천 할머니가 비척비척 들어설 것만 같다.

Info 진아영 할머니 삶터
주소
제주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 380번지 (올레 14코스)

사라진 마을, 동광리 큰넓궤
동광리는 4.3때 제주에서 사라진 마을 109개 중 하나다. 무등이왓(밭),삼밧구석,간장마을이 없어졌는데, 이후 마을 재건 사업으로 지금은 ‘동광리농촌체험마을’이 운영되고 있다. 그렇지만 무등이왓과 삼밧구석은 여전히 빈터, 경작지 정도로 남아 수풀만 무성하다.

동광리 큰넓궤는 마을 사람들 120여명이 50일 동안 은신했던 동굴이다. 길 안내 표지판이 있지만 동광리복지회관 4.3방문자센터에 들러 정보를 얻고 가는 것이 좋겠다. 길가로부터 1.3km 정도 언덕을 올라야 하니 트레킹한다는 기분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 본다.

큰넓궤에 도착하면 여기가 왜 은신처였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궤’는 제주어로 동굴이라는 뜻인데, ‘큰넓궤’는 입구가 작고, 으슥하며 내부가 크다. 그러니 이곳을 기어이 찾아낸 토벌대도 보통의 의지가 아니었겠다.

큰넓궤는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그때의 분위기를 전하기에는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이 동굴에 살았던 사람들의 결말를 알고 있어서 마음이 더욱 안타까워지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 <지슬>의 촬영지였던 동광리 은신처 '큰넓궤' 가는 길. 사진 /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
동광리 양민 120여 명이 50여 일 간 은신했던 큰넓궤 동굴 입구. 사진 /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

그러니까 1948년 겨울에 동광리가 파괴되었다. 중산간마을 초토화작전에서 토벌대는 동광리 무동이왓 주민들을 모이게 한 후 그 중 10명은 무참히 죽이고, 간장리를 불태웠다. 무동이왓과 삼밧구석의 양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큰넓궤를 발견하고 숨어 들어왔다. 그렇게 찾아든 사람이 120여 명이나 되었다.

그 해에는 한파와 폭설이 쏟아졌는데, 용케도 이곳에서 두 달 정도를 버틸 수 있었다.그러나1949년 1월에 토벌대가 이곳을 발견했다. 양민들은 서둘러 한라산으로 피신했지만 야속한 눈은 발자국을 남겼다. 결국 이들은 영실 부근에서 총살되거나 정방폭포 등에서 학살되었다.

Info 큰넓궤
주소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산 90번지 (4.3 유적지 푯말을 보고 1.3km 도보 이동)

희생된 이들의 넋이 어린 섯알오름과 만벵듸
섯알오름은 알뜨르비행장에 속한다. 알뜨르비행장에는 일제의 비행기격납고 19기가 그대로 남아있어 사진가들의 출사 포인트가 되곤 하였는데, 최근에는 다크투어 여행자들도 찾는다. 이곳에서는 격납고뿐 아니라 일제가 건설한 지하벙커, 관제탑 등 군사 시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섯알오름은 일제의 탄약고가 있던 자리이다. 미군폭격 때 오름이 함몰되어 커다란 구멍이 두 개 생겼는데, 이 자리가 다시 4.3의 현장이 된 것이다.

4.3 학살은 다양한 이유로 확대되었다. 6.25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이 더해졌다. ‘예비검속’은 말 그대로 미리 검사하고 통제하는 일이다. 특별한 일도 발생하지 않았는데 사람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가족 중에 4.3 관련자가 있어서, 사상이 의심스러워서, 군경에 협조적이지 않아서… 등 증거 없는 의심만으로 사람들을 끌고가 죽였다. 심지어는 명단에 해당하는 자가 없을 경우, 가족 중에 대신 한 명을 끌고 가기도 했다.

예비 검속 명목으로 250명이 학살된 섯알오름. 사진 /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
섯알오름 학살터 앞 희생자 추모비. 사진 /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
섯알오름 추모비 앞 고무신. 사진 /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

섯알오름에서는 1950년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집단학살이 이루어졌다. 총 예비검속 희생자 3000여 명 중 10분의 1이 채 못되는 250여명이 희생된 곳이다. 그 후 6년 동안 유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그 동안 현장은 엄격히 출입금지 되었고, 희생자는 백골이 되었다.

1957년에 유가족들이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모였지만 유골이 서로 엉켜 있어 자신의 가족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132구의 시신을 한꺼번에 수습하고 안덕면 사계리에 안장 하였다.유가족들은 성금을 모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는 비를 세웠다. 100명의 할아버지, 1명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안타깝고 슬픈 사연을 가진 비석이다.

군경은 주로 새벽에 이 일을 ‘처리’했다. 8월 20일, 해병대 제 3대대는 새벽 2시에 한림어업창고와 무릉지서에 구금했던 63명, 새벽 5시에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에 구금했던 132명을 차에 싣고 섯알오름으로 왔다.

양민들은 컴컴한 길에 차를 달려 온 터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반드시 살아서 집으로 가겠다는 의지로 자신들의 신발을 한짝씩 길가에 떨어트렸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위령비 앞에는 이를 기억하고 위로하기 위해 고무신을 놓아두었다.

만벵듸 공동장지. 섯알오름 희생자 위령비. 사진 /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
만벵듸 공동장지. 섯알오름 희생자 중 한림 주민들의 묘역. 사진 /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

만벵듸 역시 섯알오름 희생자의 묘이다. 그곳에서 희생된 한림 사람 63명 중 46위가 이곳에 안장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1956년이 되어서야 비밀리에 시신을 수습하였고, 위령비는 2001년 8월이 되어서야 세울 수 있었다.만뱅듸 근처에는 몇 군데 4.3유적지가 있다. 근처 한림파출소 건너편은 한림여관이 있었는데 당시 서북청년단이 이곳에 주둔했었다고 한다.

Info 섯알오름
주소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1618

Info 만벵듸
주소 제주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2754 (금악리 갯거리 오름 남쪽 표지판 따라 이동)

4.3은 오랜 시간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희생자 가족들은 4.3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빨갱이’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떤 이들은 가해자와 피해자로 이웃하여 평생 그 기억을 확인하며 살았고, 여전히 피해자들은 가난과 고통에 시달렸다. 마음대로 울 수도 없어 눈물을 삼켜야 했던 시간 동안 많은 증언자들이 돌아가셨다. 이름도 없는 4.3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주는 동백꽃이 흐드러진다. 그들이 희생된 자리에 핀 꽃, 잔인하게도 피를 먹은 땅에서 피어난 꽃은 아름답기만 하다. 꽃을 본다면 잠깐이라도 멈춰 4.3의 넋을 애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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