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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여행 레시피] 느림의 미학, 걷고 보고 쉬는 슬로시티 하동 악양
[여행 레시피] 느림의 미학, 걷고 보고 쉬는 슬로시티 하동 악양
  • 황소영 객원기자
  • 승인 2018.05.30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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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길에서 와이너리까지… 악양 원데이 여행 레시피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풍경, 악양.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여행스케치=하동] 여름과 여행. 두 단어를 나란히 떠올리면 바다와 수영장이 먼저 떠오르지만,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온전한 휴식을 즐기기는 어렵다.

더운 날씨 탓에 모든 삶의 템포가 느려지는 여름, 느릿느릿 슬로시티를 걷기에 이보다 어울리는 계절은 없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슬로시티에 이름을 올린 하동군 악양면.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슬로시티(Slow City)는 빠른 속도와 생산성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벗어나 자연·환경·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여유 있고 즐겁게 살자는 취지의 운동으로, 1999년 10월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하동군 악양면은 2009년 전남 담양군 창평면, 완도군 청산도 등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세계에선 111번째로 슬로시티에 이름을 올렸다.

지리산 능선과 섬진강이 둘러싼 악양의 절경.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하동군 악양면은 산과 강으로 둘러 싸였다. 지리산 능선이 말발굽 모양으로 감싸 안은 데다 오롯이 열린 남쪽은 온전히 섬진강의 몫이다.

지리산과 맞닿았으니 등산로는 말할 것도 없고, 지리산자락을 한 바퀴 이어 걷는 지리산둘레길(대축~원부춘), 또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공간적 배경이 된 토지길, 섬진강을 품었으니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 삼성궁(청학동)과 맞닿은 회남재 숲길 등 걷는 코스 역시 다양하다.

하루에 모든 길을 다 걸을 순 없다. 하나의 코스를 정주행 할 필요도 없다. 걷다가 쉬기도 하고, 쉬다가 기웃기웃 다른 곳으로 걸음을 돌릴 수도 있다.

평사리에서 시작하는 토지길.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토지길, 악양을 휘휘 돌아 걷다
평사리 섬진강변 모래는 곱다. 신발을 벗고 바닥을 디디면 햇살에 데워진 따끈한 모래 때문에 발가락이 가만있질 못한다. 꼼지락 꼼지락, 사막의 도마뱀처럼 번갈아 발을 움직이며 총총, 이리저리 도망가기 바쁘다.

모래와 술래잡기를 한다. 모래는 늘 상기된 얼굴로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토지길’은 이곳 평사리에서 시작한다. 섬진강과 꼭 붙은 평사리공원은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의 중간기점이기도 하다.

주말이면 캠핑족으로 붐비는 평사리공원을 벗어나 19번 국도로 올라선다. 유홍준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이 세상에 둘이 있기 힘든 아름다운 길”말이다.

도로는 넓어지고 곧게 펴졌지만 투박한 중장비도 이 길을 에워싼 벚나무까진 손을 대지 못했다. 이 길의 아름다움은 벚꽃이 피는 4월에 극에 달하지만 형제봉 능선에 철쭉이 피는 5월에도, 매실이 익고 은어가 팔딱대는 여름에도, 대봉감이 붉어진 가을에도, 평사리 부부송에 하얗게 눈이 쌓인 겨울에도 좋다.

<귀농 귀촌, 알아야 할 88가지>의 저자 조동진씨가 고향이 아닌 이곳 악양에 터를 잡은 이유도 평사리 풍경에 푹 빠졌기 때문이란다. 악양 또는 옆 동네 화개는 하동의 대표적 관광지다. 대표지가 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이었던 최참판댁.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초가지붕을 새로 얹는 작업 중인 모습.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드라마 촬영장으로 곧잘 쓰이는 최참판댁은 언제나 분주하다. 소설 속 가상공간을 현실로 끄집어낸 곳인데, 모르고 보면 정말 조선시대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선 고택 같다. 

최참판댁 앞으로 초가지붕을 얹은 낮은 집들이 가득하다. 13년 전쯤 방영한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이다. 여전히 지붕을 새로 얹는 작업이 한창이지만 집 안으로 들어갈 순 없다. 문을 열면 어둡고 좁은 내부가 매캐한 공기를 뿜으며 고개를 내밀 뿐이다.

최참판댁을 등지고 왼쪽으로 나서면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사방이 조용하다. 사랑채와 사당을 바쁘게 오가는 외지인의 그림자는 저 멀리 떨어져 있다.

악양은 역시 슬로시티다. 열매는 투명한 햇살에 빛나고 뿌리는 지리산의 공기와 섬진강의 수분을 한껏 빨아들여 한층 더 싱싱하다. 천천히 길을 걷는다. 마을과 마을, 풍경과 풍경을 잇는 토지길이다.

토지길 옆, 벽화마을인 하덕마을.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마을 안내도 역할을 겸하는 <스스로 풍경이 된 마을> 작품.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스스로 풍경이 된 하덕마을 골목길 갤러리 ‘섬등’
토지길 옆 하덕마을로 발을 돌린다. 이곳이 ‘섬등’골목길 갤러리, 그러니까 벽화마을로 거듭난 건 2013~2014년이다. 섬등은 ‘육지지만 섬처럼 떨어진 곳’을 부르는 하동의 지역말이다.

벽화 작업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사람이 떠난 집마저 황폐하지 않고 다만, 조용히 눈감고 임자를 기다리는 이 마을의 안길에서 수많은 이야기와 눈물과 하소연을 삼킨 담벼락들이, 녹슨 철문들이, 한걸음 한걸음에 달은 골목길에서 지금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림이 그려진지 5년이 되었지만 골목은 여전히 예쁘고 정겹다. 담장 캔버스는 갈라지고 벗겨졌지만 선명한 컬러의 화사함보단 색 바랜 그림 속에서 더 빛이 나는 곳이다.

‘스스로 풍경이 된 마을’은 나무를 이용해 마을 안내도를 표현한 작품이다. 나무는 골목길이 된다. 그 골목길 곳곳에 자리한 집들은 꼭 가지 위에 매달린 열매 같기도 하다. 노란 꽃술에 새하얀 꽃잎이 어여쁜 녹차꽃 그림도 있다.

모든 꽃들이 다 지고 없는 초겨울, 저 홀로 고고한 자태로 피어난 차꽃이 하덕마을 회색 담장에, 초여름 볕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만개했다. 뉘 집 벽은 찻잔을 정돈한 수납장이 되기도 하고, 노란 달빛 아래 벤치가 되기도 한다.

“안녕하세요?”대문 밖을 나서는 어르신과 눈이 마주친다. 길목마다 파고든 외지인이 귀찮을 법도 한데 굵은 주름은 활짝 웃고 있다.

“안녕하세요?”초등학교 여자 아이는 카메라를 쥔 낯선 이에게 인사를 한다. 아이에게 관광객은 허물없는 마을의 일부다. 관광객에게 아이는 골목 안길 그림의 한 조각이다. 아이는 인사를 하고 사뿐사뿐 뒤꼍으로 사라진다.

악양 대봉감으로 만든 와인을 마실 수 있는 SM Jeong 와이너리.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SM Jeoung 와이너리는 와인을 매개로 한 다양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SM Jeong 와이너리, 대봉감으로 만든 와인
평사리 무딤이들 너머 소축마을에 주황색 지붕을 얹은 와이너리가 있다. 미국에서 와이너리 문화를 접한 정성모 대표가 고향인 하동에 내려와 지난 2016년 세운 곳이다.

“외국의 와이너리 문화는 술 자체보단 여유와 힐링에 주목적이 있어요. 자기에게 맞는 와인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더라고요.”

하동의 와인은 악양에서 나고 자란 대봉감으로 만든다. 정대표 말대로라면 와인만큼 슬로시티와 잘 어울리는 술도 없다. 제대로 발효하고 숙성해 상품이 되기까지 1년쯤 걸린다. 정대표의 대봉감 와인은 8월쯤 정식 출시될 예정이다.

“지금은 저 혼자지만 이 마을에 다양한 와이너리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입구에서 잔 하나 들고 이 집 저 집 시음도 하고, 마음에 들면 구입도 할 수 있고요. 2년간 와인대학을 따로 다니며 금전적·시간적으로 많은 투자를 했지만 누군가 함께 하길 원한다면 제가 아는 지식을 나눠 줄 수도 있을 테고요.”

SM Jeong 와이너리는 단순히 와인을 만드는 양조장이 아니다. 와인을 매개로 한 농촌 관광과 지역 이해 등 악양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체험이 가능하다.

와인 한 잔을 들고 발코니에 앉는다. 기다란 유리잔 안에 평사리 무딤이들과 지리산을 담는다. 하루 종일 걸었던 길이며 풍경이 저 능선, 저 마을 어디쯤 숨어 있겠지.

바람은 지리산에서 불어와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며 섬진강 쪽으로 흩날렸다. 와이너리 2층 숙소를 기웃대며 언제쯤 달과 별과 산과 강이 어우러진 이곳에서 느긋하게 묵어갈까 궁리를 한다. 악양은 참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원데이 악양 여행 레시피
①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최참판댁.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곳에 새로 지은 것이다.
② ‘섬등’과 ‘차꽃 피던 날’을 테마로 한 하덕마을 골목길 갤러리는 두런두런 걷기 좋은 길이다.
③ 평사리 무딤이들을 지나 형제봉 능선을 넘어 화개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둘레길 대축~원부춘 구간.
④ SM Jeong 와이너리는 악양 특산품인 대봉감을 이용한 와인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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