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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10월호
[만화 속 배경 여행] 기록된 역사의 저편, 정용연의 <목호>
[만화 속 배경 여행] 기록된 역사의 저편, 정용연의 <목호>
  • 서찬휘 여행작가
  • 승인 2018.06.07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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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잔존한 목호들의 최후를 좇다
외돌개와 범섬. 사진 / 서찬휘 여행작가

[여행스케치=제주]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로 시작하는 <제주도의 푸른 밤> 한 소절에 가슴이 두근거린다면 필시 제주도가 그리운 사람일 터다.

누군가에겐 신혼여행지로, 누군가에겐 올레길과 한라산으로, 또 누군가에겐 맛있는 음식으로 기억되는 남쪽의 작지만 큰 섬. 그리고 이젠 <효리네 민박>을 통해 또 다른 누군가의 일상 공간으로 조명되고 있는 곳이 바로 제주다.

제주는 그저 여행지로만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섬이다. 최근 대통령의 추모식 참석으로 대중들이 다시금 인식하게 된 4.3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4.3은 당시 제주도 전체 인구 가운데 1/10에 달하는 3만 여 명이 국가권력에게 살해당한 대량 학살 사건이다. 어디 4.3뿐일까.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일제 최후의 일본 본토 방어기지로서 제주도민을 포함한 조선인들이 강제로 고된 노역을 당했다. 그보다 수 백 년 전인 고려 말에는 ‘목호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건 속에서 처절하게 피로 물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4.3에 비해 덜 알려진 구석이 없지 않지만 제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이야기 중 하나인 목호의 난, 이번엔 그 사건을 소재로 한 만화 <목호>와 함께 조금은 다른 제주 여행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한다.

서귀포항. 이 길을 따라 외돌개로 향했다. 근처에 유명한 폭포들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사진 / 서찬휘 여행작가
외돌개 아래, 일본의 어뢰정이 있었을 동굴들. 사진 / 서찬휘 여행작가

고려, 원, 그리고 탐라의 목호
독립국이었던 '탐라'는 고려 의종 때인 1153년, 현령관이 파견되며 고려의 한 군현인 제주가 되었다. 또한, 원나라의 침공에 굴복한 뒤 최후의 대 몽골 무장저항세력이었던 삼별초의 마지막 항쟁지이기도 하다.

혼란스러운 고려 후반 제주 땅에 자리하고 있던 ‘목호’는 기를 목(牧)에 오랑캐 호(胡)를 써 ‘말을 키우는 오랑캐’를 뜻한다.

원나라는 원종 때인 1273년에 고려와 연합해 삼별초를 진압하고 탐라총관부를 설치해 직접 통치에 나선다. 제주는 평생을 말 위에서 살며 초원을 달리는 몽골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말을 키우기 좋은 환경에, 일본 정벌을 위한 배를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276년에 이르러서는 목마장(말을 키우는 목장)을 세우고 말을 들여와 본격적으로 말을 키워 공출해갔다. 이 시기에 제주에 들어온 몽골인들은 본래 이 섬에 살던 이들 속에 섞여 혼인하고 아이를 낳았다. 

시작은 여인들을 겁탈하는 형태였지만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그대로 혼인하는 경우가 잦았다. 부부가 된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가 자라며 100년여의 세월이 흐르자 섬 안에서는 본래의 탐라인과 몽골인의 피가 섞인 사람을 구분하는 일이 거의 무의미해졌다.

서귀포시의 식수원이기도 한 강정천. 사진 / 서찬휘 여행작가
강정천의 끝자락, 저 멀리 범섬이 보인다. 사진 / 서찬휘 여행작가

이 시점에 원나라는 기울고 있었고, 고려는 공민왕이 즉위하여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자주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주를 다시 고려 땅으로 복속시키려는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는데, 사실상 원이 망하기 직전까지 이 섬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막 중국대륙의 새 주인이 된 명나라 황제 흥무제(주원장)가 ‘탐라의 좋은 말을 2천 필 내놓으라’는 식의 요구를 하니 고려 입장에서는 더 이상 미룰 수도, 그냥 있기도 어렵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는 백전노장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목호 토벌에 나서게 된다.

만화 <목호>, 고려 왕조의 자주 의지, 그 이면의 역사를 읽다
‘목호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역사에서 목호는 문자 그대로 물리쳐야 할 오랑캐다. 작품 도입부에서도 다루는 바이지만, 애월해안로의 다락쉼터에는 ‘애월읍경은 항몽멸호의 땅’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양옆엔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과 최영 장군을 형상화한 석물이 있는데, 최영이 목호와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은 새별오름이 애월읍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골에 굴복하지 않은 의지’에 이어 ‘몽골 오랑캐의 잔당을 끝내 모조리 없앤 전적’을 연이어 기념하는 이 비석에서 ‘우리 민족의 결연한 자주 의지’만을 읽을 수 있을까? 정용연의 만화 <목호>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애월읍경은 항몽멸호의 땅’ 비석. 사진 / 서찬휘 여행작가
만화 <목호> 속 장면이 표지로 실린 <보고(BOGO)> 5호. 사진 / 서찬휘 여행작가

<목호>의 주인공은 원이 망하고 제주에 고립된 목호, 그중에서도 무리의 우두머리 격은 아닌 ‘석나리보개(또는 석방리보개)’와 그 아내인 고려 여성 ‘버들아기’다. 만화 <목호>는 역사적 사건을 이끈 주역이 아닌 어찌 보면 평범한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악독한 오랑캐 잔당을 부수는 애국 군인’과 ‘애국 군인에게 토벌당하는 오랑캐 잔당’이라는 선악 및 국가로 대비되는 구도는 그려지지 않는다. 오롯이 제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무게 중심을 맞춘 것이다.

고려에 편입되기 전 제주는 ‘탐라국’으로서 독립성을 유지해 온 섬나라였다. 이런 곳을 몽골인이 쳐들어가 목장을 만들고, 죄 없는 사람들을 유린한 것도 엄연히 ‘침략’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이미 100년이 지나 혼혈인이 많아진 시점에 ‘저들은 모두 한통속, 아닌 자를 구분하기 힘들다’는 논리를 들며 2만 여명을 동원해 토벌하러 온 이들을 제주에서 태어나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했을까.

애초에 고려 사람이라는 인식도 크게 자리 잡지 않았고, 고려 관리들의 공출에 시달리던 입장에서는 ‘고려나 원이나’하는 심정을 가진 경계인 아니었을까.

<목호>의 주인공 석나리보개와 버들아기의 에피소드. 사진 / 서찬휘 여행작가
외돌개에서 바라본 범섬. 사진 / 서찬휘 여행작가
외돌개를 가까이에서 본 모습. 최영의 치장으로 목호들이 겁먹고 자살했다는 전설은 과장이 섞였을 것이나 바위의 위용만은 진짜다. 사진 / 서찬휘 여행작가

4.3사건으로 시작해 목호 토벌 이야기로 이어지는 이 작품은 토벌전의 끝을 장식한 범섬에서의 집단 투신자살과 몽골인은 물론 혼혈아까지 전부 죽여 없애는 장면을 보여준 후 범섬이 보이는 강정 앞바다의 2014년 현재를 언급하며 마무리된다. 

고려가 저물고 새로 들어선 왕조 조선은 버들아기가 죽은 뒤 ‘비록 오랑캐의 아내이나 정절을 지켰다’는 이유로 성리학적 가치에 따라 열녀로 평가해 비를 세웠다.

이 건을 보면 훗날 병자호란 뒤에 살아 돌아온 여성들을 ‘화냥녀’라며 비난하며 버린 양반들이 떠올라 입맛이 몹시 쓰다.

결국은 국가 차원의 어떤 정의와 방향성 이면에서 누군가는 편리하게 이용당하고, 누군가는 이름 없는 희생자로 어느 들판 구석에 쓰러지고 치워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4.3 사건 70주년인 이 시점에, 만화 <목호>가 보여주는 옛 역사는 오래지 않은 아픔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Tip 정용연은 3대에 걸친 자신의 가족사를 만화로 풀어낸 <정가네 소사>(2012, 휴머니스트, 전3권)로 이름을 알린 작가다. <목호>에서는 한층 더 원숙한 솜씨로 역사의 일면을 들춰내고 있다. 

중편 <목호>는 만화 무크지 <보고(BOGO)>의 창간호부터 4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며, 과월호를 구입하면 감상할 수 있다.

만화와 함께 하는 여행 코스

만화 <목호>는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비교적 찾아다닐 곳이 명확하다. 올레길도 두 곳이나 지나므로 자동차든 걷기 여행으로든 몇 곳을 끼워 찾아보기에 좋다. 만화 속 ‘석나리보개’가 그토록 좋아했던 제주 향토음식 빙떡을 챙겨들고 다녀봄직 하겠다.

* ‘애월읍경은 항몽멸호의 땅’비석(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462-1) : 올레길 16코스 시작점과 가깝다. 16코스는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를 지나므로 삼별초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 새별오름(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산 59-3) : 목호와의 전투에서 토벌군이 승기를 잡은 곳. 이곳에서 밀리면서 목호들은 지금의 강정마을인 오음벌판으로 밀려난다.

* 강정마을(서귀포시 말질로 290) : 옛 이름은 오음벌판. 새별오름에서 밀린 목호들은 이곳에서도 지면서 범섬으로 들어가 농성전을 벌이려다 자결한다. 강정천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의 정취는 멋있지만 현재 해군기지 건설로 갈등을 빚고 있다.

* 외돌개(서귀포시 서홍동 791) : 목호들이 최후를 맞이한 범섬이 잘 보이는 곳이다. 우뚝 솟은 20여m 돌기둥이 신비한 느낌을 주는 곳으로, 최영 장군이 이 돌을 치장시키자 목호들이 겁을 먹고 자살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장군석으로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말엽 일본이 연합군 상륙에 대비해 제주도 전역에 만들었던 진지 땅굴 중 일부와 ‘회천(回天)’자폭 어뢰정을 숨기기 위해 만든 인공동굴 12개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범섬(서귀포시 법환동 산1-1~2) : 목호의 최후를 지켜본 섬. 현재는 무인도로 사람이 접근할 수 없으나 외돌개와 강정마을에서 볼 수 있다. 사방으로 둘러친 절벽과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모양새로 올레길 탐방객들에게 사랑받는 섬이다. 

목호들은 이곳에서 버티다 빠져나와 나머지와 합류하려 하였으나 최영의 포위 작전으로 계획이 어그러지자 자살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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