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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낙동강을 걷는 중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산, 청량산을 즐기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낙동강을 걷는 중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산, 청량산을 즐기다
  • 신정일 객원기자
  • 승인 2018.06.1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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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봉화군에서 안동호로 흘러가는 낙동강 물길
봉화군 명호면에서 안동호로 흘러가는 낙동강을 따라 걷는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편집자 주
평생을 산천을 걸으며 보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신정일 대표는 낙동강을 세 번째 걷는다. 지난 2001년 9월, 517km의 낙동강을 걸었으며, 그로부터 여덟 해가 훌쩍 지난 2008년 60여 명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지난 2월부터 1년간의 일정으로 ‘우리 땅 걷기’ 회원 90여 명과 함께 ‘낙동강 1300리 길’을 걷고 있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라는 제목으로 낙동강 걷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여정을 연재한다. 

[여행스케치=봉화] 삶이란 무엇일까? ‘사소한 고통의 연속의 연속’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사소한 기쁨의 연속의 연속’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의 차이에 따라 사람의 한 평생이 기쁨과 슬픔의 이중주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걷는 일도 그렇다. 가뿐하게 시작된 걷기가 시간이 흐를수록 무거워지고, 힘들어지다가 어느 순간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하지만 날이 저물어 갈수록 늙은 낙타가 사막을 건너듯 육신이 무거워지고, 숙소에 도착할 때쯤이면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걸음을 한 발 한 발 옮기는 사이 날이 저문다.

그런 날은 온 몸이 파김치처럼 축 늘어져 누워도 잠은 오지 않고, 뒤채며 돌아눕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신기하기도 하다. 어디 한 구석 성한 데 없이 아팠던 몸이 새벽을 지나면서 조금 나아진다. 강물이 흐르면서 스스로 자정 역할을 하듯 사람도 하룻밤을 자고 나면 나아지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인가. 

주변 산들이 에워싸는 물길 따라 걷는다
봉화군 명호면의 낙동강에는 아침 물안개가 물씬 피어오르고, 산허리엔 구름이 띠를 둘렀다. 명호면 일대는 안동댐 담수 이후 육봉화(陸封化)된 은어들의 고향이다. 낙동강에 댐이 건설된 후 바다로 나가지 못한 은어들이 안동호를 바다 삼아 번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96년까지만 해도 단천면 토계리에서 명호까지 수십만 마리의 은어들이 회유하며 장관을 이루었는데, 1997년 이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환경오염과 남획 등 복합적인 원인 탓으로 여긴 봉화군은 1999년부터 명호면 일대를 은어보호수역으로 정한 뒤 은어 치어를 방류하고 있다.

명호면 일대 낙동강은 안동댐이 만들어진 후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정착한 은어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고계리에서는 강 주변으로 산들이 에워싸고 있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안동호로 향하는 물길을 따라 도산서원 방면으로 가는 길. 영양, 재산, 안동으로 길이 갈라진다. 강 건너 황우산(黃牛山ㆍ601m) 자락을 바라보며 명호리를 지나면 안동군과 봉화군의 경계가 되는 지점이라고 해서 고계리라고 이름 붙은 지역에 이른다.

고계삼거리에서 좌측으로는 병풍처럼 생긴 바위를 지닌 문명산(文明山)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풍락산(豊樂山) 자락이 강을 향해 뻗어있다. 이곳은 풍락산과 낙동강의 뜻을 따서 풍호리(豊湖里)라고 이름 지었는데, 400여 년 전 마을 뒷산에 임경업 장군의 조부인 울릉 부원군이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임경업 장군이 타고 다닌 용마가 나왔다는 용소를 지나면 관창리로 들어선다.

관창리(觀漲里)는 마을 뒤 바위에서 낙동강 물이 불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이름 붙었다 한다. 계속 길을 이어 관창2교를 지나면 청량산의 위용이 한 눈에 들어오고, 관창1교에 이르면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보이기 시작한다.

강물이 불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관창리 일대.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자리 잡은 청량산(淸凉山ㆍ870m)은 1982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진안 마이산과 같은 수성암으로 이루어진 청량산은 경일봉, 문수봉, 연화봉, 축융봉, 반야봉, 탁필봉 등 몇 개의 암봉들이 어우러져 마치 한 송이 연꽃을 연상시킨다. 산세는 그리 크지 않지만 아름답게 솟아 잇는 기이한 경관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청량산을 예찬한 학자들
낙동강을 걸으면서 청량산을 오르지 않고 갈 수야 없다는 생각에 청량산으로 향한다. 청량산 산행은 낙동강의 청량교를 지나면서 시작된다. 청량교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청량산의 산세와 더불어 빼어난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천천히 오르는 산. 나무들 사이로 깎아지른 절벽들이 연이어 나타나고, 그 틈새마다 푸른 소나무와 잡목들이 암벽에 뿌리를 내린 채 서 있다. 조선조에 주세붕은 <청량산록>이라는 기행문에서 아름다운 청량산을 이렇게 예찬했다.

“해동 여러 산중에 웅장하기는 두류산(지금의 지리산)이고 청절하기는 금강산이며 기이한 명승지는 박연폭포와 가야산 골짜기다. 그러나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하며 비록 작기는 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청량산이다.”

낙동강을 걸으며 지나게 되는 청량산 자락.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퇴계 이황이 지었다는 오산당의 모습.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또한 주세붕보다 여섯 살이 아래고 이곳 예안이 고향인 퇴계 이황은 청량산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스스로 호를 ‘청량산인’이라 짓고 이렇게 노래했다.

“청량산 옥류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하랴 못 믿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 알까 하노라.”

청량산의 내청량사 가는 길옆에 퇴계 이황이 지은 ‘오산당(吾山堂)’이라는 집이 있는데, 그 이름에 대한 유래가 재미있다. 청량산이 원래 진성 이씨라고 불리는 예안 이씨의 종중산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의 산’이라는 당호를 딴 집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남명 조식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황은 조식과는 달리 벼슬길에 여러 차례 나갔다.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였기에 임금이 부르면 벼슬길에 나갔다가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기를 몇 차례. 그 동안에 풍기군수와 대사성 부제학과 좌찬성이라는 벼슬에 올랐고, 그가 마지막으로 귀향한 것이 68세였다. 이황은 도산서원을 마련하기 전까지 이곳에 집을 지어 ‘청량정사’라는 이름을 짓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산을 거쳐 간 인물은 많으나 흔적은 별로 없네
연화봉 기슭에 위치한 내청량사와 금탑봉 기슭에 자리 잡은 외청량사는 663년에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도 하고,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하지만 창건연대를 볼 때 당시 의상은 중국에 있었으므로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청량사의 본전인 유리보전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자그마한 건물이다. 유리보전은 동방 유리광 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유리보전 안에는 약사여래상이 모셔져 있고 유리보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라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유리보전 앞에는 가지가 세 갈래인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봉화군지>에 의하면 명호면 북곡리의 남민이라는 사람의 집에 뿔이 세 개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는데 힘이 세고 성질이 사나워서 연대사 주지 스님이 데려가 짐을 나르게 했다고 한다. 소는 이 절이 완성되자 힘이 다했는지 죽어 절 앞에 묻혔다. 그 후 무덤에서 가지가 세 개인 소나무가 생겼기 때문에 ‘세 뿔 송아지 무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청량산 산세에 파묻혀 있는 청량사 전경.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청량산 답사를 마치고 다시 낙동강을 걷는 길은 안동으로 향한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청량산에는 고려 공민왕을 비롯해 신라의 명필 김생과 고운 최치원의 발자취가 남아 전한다. 금탑봉으로 오르는 길과 갈라져서 산허리를 접어 돌면 김생굴로 향한다. 김생이 10여 년 동안 수도하며 글씨 공부를 했던 곳이다. 하지만 김생굴에 김생의 글 한 구절도, 치원대에 최치원의 시 한 구절도 남아있지 않은 점이 아쉽다. 오직 주세붕의 글 속에만 그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청량사에서 건너편을 보면 청량산성이 마주 보인다. 공민왕 16년(1361), 10만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오자 노국대장공주를 데리고 청량산으로 온 공민왕이 축융봉 아래 산성을 쌓고 1년 간 숨어 지냈다는 곳이다.

청량산 답사를 마치고 다시 낙동강 길을 걷는다. 그 사이 발길은 선비의 고장 안동에 접어들었다. 태백과 봉화를 지나온 낙동강은 휘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고 뒤돌아보면 청량산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강은 강대로 흐르고 산도 사람도 강물이 되어 흐르는 그 사이 햇살은 강물에 부서지고 또 부서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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