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신정일의 역사기행]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수도, 철원을 찾아가다
[신정일의 역사기행]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수도, 철원을 찾아가다
  • 신정일 객원기자
  • 승인 2018.06.29 22: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후고구려와 6.25전쟁, 그리고 한탄강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비무장지대 내에 태봉국의 중심지였던 궁예도성이 있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철원] 한자를 풀이하면 ‘쇠둘레 땅’이란 이름을 가진 철원. 이 땅은 궁예가 세운 ‘태봉’이라는 나라가 있던 곳이다.

사람들에게 궁예는 악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가 남북한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제일 먼저 휴전선에 가로막혀있는 궁예도성을 발굴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도 궁예는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다.

“궁예란 자는 신라의 왕자로서 젊었을 때부터 무뢰한(無賴漢)이었고, 장성하여서는 안성ㆍ죽산 사이의 도둑이 되어 고구려와 예맥 지역을 차지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성품이 잔인무도하였으므로 부하에게 쫓겨나고 태조 왕건이 드디어 군중에게 추대되었는바, 이것이 고려를 건국하게 된 시초였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 되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단순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 탓에 궁예는 어느 기록에서든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궁예에 대한 재조명이 있다
궁예가 지금의 개성인 송악을 한강 이북에서 산수가 가장 빼어난 곳이라 여기고 도읍을 정했던 때가 898년이다. 옛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한 궁예는 901년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한 뒤에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정했다.

905년에 도읍지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겼으며, 911년에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국호를 태봉(泰封)이라고 고쳤다. 나라를 안정시킨 궁예는 경기도와 강원도 그리고 황해도ㆍ평안도ㆍ충청도까지 세력을 뻗치며 후백제의 견훤과 자웅을 겨루었다.

철원에서 금강산으로 향하는 철교. 통일이 된다면 우리는 궁예도성을 발굴해야만 한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905년부터 왕건이 고려를 세우게 되는 918년까지 열다섯 해 동안 태봉국의 서울로서 한 나라의 중심지였던 궁예도성이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의 비무장지대에 있다. 하지만 그 역사의 자취가 서린 궁예도성은 그 누구의 발길도 허락하지 않은 채 풍천원(楓川原)이라는 들에 터만 남아 있고, 궁예가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御水井) 역시 그 흔적만이 남아 역사를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 전기의 문장가인 서거정은 태봉국과 궁예를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나라가 깨어져 한 고을이 되었구나
태봉의 끼친 자취 사람으로 하여금 수심하게 하네
지금은 미륵이 와서 노는 곳
예와 같이 어룡들은 적막한 가을일러라
비낀 채 엷은 연기는 하늘과 함께 멀고
떨어진 곳 나는 버들개지는 물과 같이 유유하네
당시의 거울의 참언은 참 임금께 돌아갔는데
가소롭다 궁예 왕은 제멋대로 놀기만 일삼았으니,

역사 속에서 악역을 담당했기 때문에 시대의 추인(麤人)으로 평가했던 궁예를 서거정 역시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오늘날에는 다르게 보는 시각들이 많다.

그는 미륵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불경을 20여 권 저술했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왕건과 결탁한 토호세력들의 반발로 역사에서 패자가 되고 말았다고 평하는 것이다.

철원에는 무려 열흘 동안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백마고지가 있다. 사진은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전쟁의 상흔도 남아있는 철원
철원은 6.25전쟁 이전까지 38선 북쪽으로 북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6.25전쟁 당시 나라 안에서도 손꼽히던 격전지로 이름을 날린 백마고지가 있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동안 백마고지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 때의 전투는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에 세워진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에 적힌 대로, 포탄가루와 주검이 쌓여서 무릎을 채울 정도였다고 한다. 이 산봉우리에서 열흘 동안에 주인이 스물네 차례나 바뀌면서 1만4000명에 가까운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쏟아진 포탄만 해도 30만 발이 넘었다고 한다.

높이가 395m인 백마고지에서는 철원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나라 안에 어딜 가도 있음직한 자그마한 산봉우리 백마고지에서 가까운 듯 먼 듯 서 있는 삼자매봉을 바라다본다.

전투 당시 상황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사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현재 평화롭기 그지없는 이곳의 풍경 때문이리라. 멀리 김일성 고지라는 산이 보이는데, 철원 전투에서 드넓은 철원평야를 빼앗기고 김일성이 사흘 동안을 운 곳이라고 한다. 그랬을 수도 있고,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으리라.

백마고지에서 도피안사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노동당사 또한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유적이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백마고지에서 내려와 휴전선 철책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월정역이 있다. 월정역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표어가 쓰인 채 부서진 열차가 서 있고, 동송저수지 부근에 철원 평화 전망대가 있다. 그 전망대에서 휴전선 안에 있는 궁예도성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곳은 갈 수 없는 땅으로 수풀만 우거져 있고, 통일이 되어야만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궁예가 꿈꾸었던 미륵의 세상은 아직도 요원하다. 하지만 언젠가 미륵의 나라가 도래하지 않겠는가 하는 바람만 마음 속에 품을 뿐이다.

함께 둘러보면 좋을 명소 탐방
궁예의 흔적을 따라가 본 다음에는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있는 도피안사(到彼岸寺)를 찾아볼 만하다. 이 절은 도선국사가 세웠다고 하는데, 속세를 넘어 이상 세계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대표적 유물로 국보 제63호에 지정되어 있는 철불이 있는데, 신라 경덕왕 5년인 865년에 ‘철원지방의 향도(香徒) 1500여 명이 결연(結緣)하여 조성했다’는 기록과 함께 ‘함통 6년 기유 정월(咸通 六年 己酉 正月)’이라는 문구가 뒷면에 남아 있어 제작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원래 이 철불은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려 했던 불상이라고 한다. 운반 도중 없어졌는데 나중에 찾고 보니 현재의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보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는 도피안사 철불.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철원 제일의 절경으로 꼽히는 고석정.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도피안사에서 나와 동송읍을 지나는 길에 다시 철원평야가 펼쳐지고, 평야의 끝머리에 한탄강(漢灘江)이 흐른다.

한탄강은 6.25전쟁 때 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한탄하며 죽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잘못 알려진 강이다. 원래 한탄강의 ‘한’은 ‘크다, 넓다, 길다’는 뜻이고 ‘탄’은 ‘여울, 강, 개’의 뜻이 합한 순수한 우리말 강 이름이다.

한탄강을 내려간 곳에 승일교(承日橋)가 있다. 전쟁 이전에 김일성이 만들다가 만 다리를 전쟁 이후에 이승만이 완성했다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승일교에서 더 나아가면 강폭이 넓어지면서 아름다운 명승지인 고석정(孤石亭)이 나타난다.

고석정은 철원 제일의 절경으로 꼽힌다. 강 한복판에 10여 미터 높이의 거대한 기암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양쪽으로 옥같이 맑은 물이 휘돌아 흐른다. 옛날 있던 정자는 사라지고 없지만, 수수한 모양새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조선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가 말년을 지냈다는 순담.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겸재 정선이 그림으로 남긴 정자연. 금강산 가는 길이 지척인데, 우리는 아직 자유롭게 걸어가지 못함이 아쉽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고석정에서 다시 2km쯤 강을 따라 내려가면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에 이르러 순담계곡이라는 못이 나온다. 조선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金觀柱)가 몸이 허약해지자 벼슬을 사직하고 전국의 휴양지를 물색했다. 그 때 이 고장 출신인 유척기(兪拓基)가 산자수려한 이곳을 추천했다.

이곳은 한탄강 계곡의 양편 언덕이 거대한 암반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마치 신들이 빚어 놓은 조각품 같았다. 말년을 의탁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라고 여긴 그는 오자마자 거문고 모양의 연못을 만들고 제천 의림지에서 순채(蓴菜)라는 나물을 구해다 심으면서 못 이름도 순담(蓴潭)이라고 지었다.

순담은 수련 모양의 약초로 봄이면 줄기에 흰색의 액체가 쌓이는데, 이 순채가 허리병에 생기는 담에 특효약이다.

철원을 흐르는 한탄강을 거슬러 오르면 조선 시대 화가인 겸재 정선이 그림으로 남긴 풍경 정자연이 나타난다. 그리고 길을 이어 금화의 생창역을 지나 단발령을 넘으면 금강산까지 닿을 것이다.

금강산 가는 길이 바로 지척인데, 그 길을 자유롭게 걸어갈 날은 언제쯤일지. 이런 생각을 하며 바라본 강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유장하게 흐를 뿐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