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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안동을 지나며 수몰의 역사를 읽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안동을 지나며 수몰의 역사를 읽다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 승인 2018.08.16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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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안동호와 안동댐을 거쳐 임청각까지
낙동강을 따라 안동시에 이르기 전에 만나는 안동댐에는 안동 사람들의 수몰의 역사가 담겨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편집자 주
평생을 산천을 걸으며 보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신정일 대표는 낙동강을 세 번째 걷는다. 지난 2001년 9월, 517km의 낙동강을 걸었으며, 그로부터 여덟 해가 훌쩍 지난 2008년 60여 명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지난 2월부터 1년간의 일정으로 ‘우리 땅 걷기’ 회원 90여 명과 함께 ‘낙동강 1300리 길’을 걷고 있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라는 제목으로 낙동강 걷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여정을 연재한다. 

[여행스케치=안동] 도산서원을 지나며 낙동강은 안동댐으로 흘러간다. 안동댐은 낙동강 본류를 가로막은 다목적댐으로 1971년에 착공하여 1976년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양수(揚水) 겸용 발전소이다.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안동호는 휴양 및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으나, 충주댐이나 소양강댐과 달리 기암괴석이 적고 경관이 빼어난 곳이 많지 않아 여객선은 다니지 않는다.

댐에 갇힌 안동호에 수몰의 역사가 흐르고
1914년까지 하나의 독립된 현이었던 예안은 안동시로 편입되고 나서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나마 안동댐이 들어선 후로는 세 지역으로 나뉘고 말았다. 35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국학문화회관 아래의 도산면 서부리가 옛 예안 지역이다. 안동댐으로 마을이 수몰된 후로도 고향을 지키겠다고 남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서부리의 선착장에서 김영선 옹을 만났다. 그는 댐이 들어선 후 일어난 변화상을 가감 없이 이야기한다.

마을이 수몰된 이후에도 고향에 남아 살고 있는 수몰민들이 이용하는 선착장.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댐 만들기 전에는 작살로 찔렀다하면 은어가 은빛으로 빛나며 잡혀 올라왔어요. 댐이 만들어진 후에는 베스나 블루길 같은 외래어종들만 판을 치고 있어요. 이곳에 살던 사람들 거의 다 나갔지요. 그때 나간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았어요. 집도 사고 땅도 사고 혀서 나간 다음 부자 된 사람 많아요. 그때 안 나가고 서부단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소득이라곤 없고 힘들게 살고 있지요. 객지 나가서 살고 있는 아들이 집으로 오라고 하지만 회사에 간 아들은 저녁에나 오지. 손자들도 학교 간다, 학원 간다, 저녁에나 오지. 뭐 하러 가겠어요. 그냥 저냥 여기 살다 가는 거지 뭐.”

도시로 갈 수도 없고, 시골에서 살기도 힘든 우리나라 모든 시골 노인들의 이야기다.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은 통일이 되면 돌아갈 곳이라도 있지만, 수몰민은 영영 돌아갈 곳을 잃어버렸다는 말이 어찌 그리 가슴이 아리게 다가오던지. 안동호에 남은 안동 사람들의 이야기다.

안동댐으로 향하는 도중 들러볼 수 있는 오천문화재단지 전경.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안동댐 아래에는 수몰된 마을에서 옮겨놓은 가옥으로 꾸민 민속촌도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안동댐에 다다른 곳에는 안동민속촌이 있다. 댐으로 인해 수몰이 되면서 민속자료로 가치가 있는 12채의 가옥을 옮겨와 꾸린 곳으로, 안동 대표 음식인 헛제사밥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민속촌 옆에 있는 민속박물관 경관지 내에는 옛날에 얼음을 저장해두던 석빙고가 있다.

이 석빙고는 예안현감 이매산이 1733년과 40년 사이에 전에 있던 빙고를 돌로 개축했다고 한다. 겨울철에 낙동강에서 얼음을 떠다가 석빙고에 저장해두고 여름에 썼을 뿐만 아니라 고장의 특산물인 낙동강의 은어를 잡아 저장했다가 임금에게 진상하기도 했다. 축조연대가 거의 정확하고 구조가 튼튼한 18세기의 전형적인 석빙고라서 보물 305호로 지정되었는데, 이 또한 예안 서부리에 있던 것을 수몰과 함께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세월이 바꿔버린 법흥사와 칠층전탑
안동민속촌 앞 월영교를 지나 법흥동에 접어든다. 본래 법흥사라는 절이 있던 곳인데, 현재 이곳에는 ‘신세동 칠층전탑’이 남아있다. 칠층전탑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전체높이 17m의 탑으로 통일신라 전에 세웠다고 한다. 법흥사에 대해서는 고려말인 1381년에 중수되고, 성종 18년(1487)에 개축되었으나 조선 중엽에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608년에 편찬된 <영가지>에 절의 규모가 세 칸만 남아있다고 적혀있는데, 지도에 표시된 법흥사와 전탑 자리가 일치한다.

안동댐 아래 월영교를 건너면 옛 시절 법흥사가 있었던 법흥동으로 갈 수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법흥동에 법흥사는 사라지고 칠층전탑만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박효수라는 사람은 낙동강이 흘러가는 자리에 위치한 절의 아름다운 정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이 절에 오르면 황홀하여 공중에 있는 것 같다. 열두 봉우리들이 서로 등지기도 하고 마주보기도 하네. (중략) 호수에 날이 개니 가늘게 밝은 자태를 희롱한다. 먼 마을의 단풍든 나무에는 저녁볕이 머무르고, 높은 산 차운 소나무에는 가을안개 물러간다.”

하지만 법흥사에 있던 칠층전탑은 조선시대 이후 끊임없이 수난을 겪었다. <영가지>에 따르면 탑 위에 있던 금동장식들을 객사를 만드는 데 쓰기 위하여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전탑 바로 옆으로 중앙선 기찻길을 만들면서 ‘기찻길 옆 칠층 전탑’이 되고 말았다. 일제 때 탑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기단부의 모양을 변형시켰을 뿐 아니라 시멘트를 발라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또한 수없이 지나다닌 열차의 진동음에 탑은 점차 손상되어가고 있다.

안동권 낙동강 흐름을 보기 좋은 임청각
탑에서 조금 내려가면 기와지붕들이 연달아 있는 집이 보인다. 임청각이다. 조선 세조 때 현감을 지낸 이증이 안동에 내려와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중종 10년에 형조좌랑을 지낸 이낙(李烙)이 임청각을 짓고, 퇴계 이황이 약관(若冠)에 액자를 썼으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농암(聾岩) 이현보(李賢輔)가 글을 남긴 아름다운 집이다.

아흔아홉칸 집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이 집은 중앙선 철도가 만들어지면서 행랑채와 부속건물이 철거되어 50여 칸만 남아있다.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는 임청각의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에 올라보면 멀리 낙동강이 보이고 동쪽에는 수련이 피어나는 작은 연못이 있다. 한국의 빼어난 건축가 중의 한사람이었던 김수근은 ‘인간적인 치수를 반영하여 지은 집이다’라고 설명했을 정도로 겸허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의 개념을 연출해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보물 제182호인 임청각은 겸허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의 개념을 연출해 지었다. 사진은 임청각 내 군자정.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임청각 아래에서 낙동강은 임하댐을 거쳐온 반변천을 받아들인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임청각 아래에서 낙동강은 임하댐을 지나온 반변천(半邊川)을 받아들인다. 반변천은 영양군 일원면 일월산(日月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청송군 진보면을 거친 뒤 안동시 용상동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한편 낙동강 변에서 나고 자란 사람 중에 유성룡, 조목과 함께 퇴계 이황의 삼대 제자로 손꼽혔던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서인 황윤길이 “일본이 침략할 것 같다”고 보고한 것과 달리 민심의 동요를 걱정한 결과 “침략의 조짐이 없다”고 보고했던 인물이 김성일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처벌을 받게 될 궁지에 몰린 김성일은 유성룡의 변호로 경상 우도를 방어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 후 김성일은 각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1593년 진주성에서 군사를 지휘하던 중 장렬하게 숨을 거두었다.

<영가지>를 편찬한 권기는 안동을 일컬어 “산은 태백으로부터 내려왔고 물은 황지로부터 흘러온 것은 환하게 알 수 있다”고 했으며 “산천의 빼어남과 인물의 걸특함과 토산의 풍부함과 속의 아름다움과 기이한 발자취”를 지니고 있는 고장이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몰라도 안동지역 사람들을 일컬어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얼굴에다 그에 걸맞게 끈질긴 인내심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유교문화권에서 찾기도 하지만 이 지방의 열악했던 자연환경과 독특한 역사에 있다고 보고 있다.

영호루에 남아있는 정도전의 시 한 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영호루에서 바라본 안동시내 전경.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바람 부는 낙동강 건너편에 영호루가 있다. 영호루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1361년 12월 15일에 고려 공민왕이 찾은 것은 확실하다. 안동에 머물던 공민왕은 18일에 영호루에 거둥하여 뱃놀이를 하였고, 그 이듬해 2월에 안동을 떠나 상주와 충북 청주를 거쳐서 1363년 2월에 개성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1366년 겨울에 서연(書筵)에서 공민왕이 친히 ‘영호루’ 석 자를 써서 봉익대부(奉翊大夫) 권사복(權思復)에게 주어 현액(縣額)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 선조 38년(1605)에 찾아온 큰 장마에 영호루가 떠내려갔고, 숙종 2년(1676)에 안동부사 맹주서(孟冑瑞)가 다시 중건하였다고 한다.

영호루 건너편에 안동은 하나의 풍경으로 존재하고 일직 의성으로 가는 다리는 길고도 길다. 저 다리 아래를 흐르는 강을 따라 무심의 경지에서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길 뿐이다.

연미사를 방문하면 볼 수 있는 제비원 석불.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Tip 안동시에서 영주로 가는 길가에 위치한 이천동에는 거대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제비원 석불이 있다. 신라 때 도선국사가 634년에 새겼다고 전해지는 이 석불은 11m 높이의 화강암 암벽을 이용하여 몸통을 만들고 2m 높이의 바위를 부처의 머리로 만들었다.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이 석불이 있는 이곳에는 연미사라고 부르는 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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