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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유성룡의 자취를 읽는 안동 낙동강의 핵심 지역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유성룡의 자취를 읽는 안동 낙동강의 핵심 지역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 승인 2018.08.3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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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영호루에서 병산서원을 지나 하회마을까지
풍산읍 인근을 흐르는 낙동강 모습.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강물은 변함 없이 흐르고 흐를 뿐이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편집자 주
평생을 산천을 걸으며 보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신정일 대표는 낙동강을 세 번째 걷는다. 지난 2001년 9월, 517km의 낙동강을 걸었으며, 그로부터 여덟 해가 훌쩍 지난 2008년 60여 명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지난 2월부터 1년간의 일정으로 ‘우리 땅 걷기’ 회원 90여 명과 함께 ‘낙동강 1300리 길’을 걷고 있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라는 제목으로 낙동강 걷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여정을 연재한다. 

[여행스케치=안동] 낙동강을 두 번째로 걸었던 2008년과 2018년 현재 사이에 그침 없이 흐른 것은 시간의 강물이다. 그 10년 사이에 4대강 사업도 지나갔다. 강변으로 나있던 흙길은 자전거도로로 변했고, 자연스레 휘감아 돌던 강물은 일률적이고 획일적으로 만들어진 틀 속을 흐른다. 강은 변화를 겪으며 상처를 입었지만, 강물은 상처를 내색하지 않고 휘감아 돌 뿐이다.

수려한 낙동강가에 자리 잡은 병산서원
안동 시내를 벗어나며 고개를 넘자 송현동에서 제일 큰 마을인 호암동(豪岩洞)이다. 호암동 남쪽 낙동강 가의 절벽 위에 호골방우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범의 뼈처럼 괴이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부근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송야천에는 공민왕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문경새재를 넘어 예천, 풍산을 거쳐 이곳에 닿은 공민왕 일행의 행색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곳까지 몸소 걸어온 왕비를 어떻게 하면 강을 건너게 할까 고민하던 안동의 부녀자들이 강물을 가로질러 한 줄로 섰다. 그들은 허리를 구부려 사람다리를 만든 뒤에 그 위로 왕비를 부축하여 건너게 했는데, 그것이 놋다리밟기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화산 자락을 지나 그 아래 병산서원으로 향하는 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송야천이 합류한 낙동강을 따라 걷다보면 풍산읍 인근에 이른다. 풍산 벌판의 푸른 들이 펼쳐지고, 멀리 서녘 끄트머리에는 화산이 보인다. 그 산 아래에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이 있다.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은 포장이 되지 않았고, 길도 비좁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대형트럭이나 버스가 지날라 치면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빠져나가지만, 덕분에 걸어서 이 길에 들어설 때면 그리운 고향길에 접어든 듯한 착각에 빠진다. 특히 찔레꽃 피는 오월쯤에 이 길을 지날라 치면 찔레꽃 내음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병산서원은 1613년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성룡(柳成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면서 설립되었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豐岳書堂)으로 풍산 유씨(豐山 柳氏)의 교육기관이었는데, 1572년(선조 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29년에 유진(柳袗)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863년(철종 14)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서원은 본래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거나 후진들을 가르치던 곳이었으나 갈수록 향촌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사림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사림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결속을 다졌고 세력을 키운 뒤 중앙 정계로 진출할 기반을 다졌다. 도처에 서원을 건립했던 영남학파의 큰 유학자 퇴계 이황은 서원을 두고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의 유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적 성과가 크다.”

퇴계의 말과 같이 모든 서원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 잡았는데, 병산서원만큼 그 말에 합당한 서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병산서원의 백미인 만대루. 이름인 '만대'는 당나라 두보의 시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에서 따왔다고 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만대루는 24개의 기둥 위에 지붕이 놓인 구조로, 나무가 자란 그대로의 모양을 살려 지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병산서원과 서애 유성룡의 삶
병산서원에 모셔진 유성룡(1542~1607)의 본관은 풍산이고, 자는 이견(而見)이며, 호는 서애(西厓)로, 관찰사를 지낸 유중영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스물한 살 때 형인 겸암 유운룡과 함께 퇴계 이황을 찾아갔는데, 그를 처음 본 이황은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 말했다고 한다. 선조 역시 “경은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절로 경의가 생긴다”며 크게 칭찬한 바 있고, 이항복은 “이분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꼬집어 말할 수 없다”고 했으며, 이원익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유성룡은 총명했지만 정여립 같은 과격한 성품은 아니었다. 동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맞서 있을 때에도 동인에 속해 있었지만 서인에게도 항상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조정에 분란이 생길 때마다 중간 입장을 견지했는데,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선조가 어느 날 조정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물었다. “과인을 예전의 성군인 요ㆍ순과 폭군인 걸ㆍ주에 비긴다면 어느 쪽이겠는가?” 이에 정이주는 “요ㆍ순과 같은 군주이옵니다”라고 말했고, 김성일은 “걸ㆍ주와 같사옵니다”라고 답했다. 김성일의 말에 선조는 안색이 변하여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유성룡이 “둘 다 바른 말입니다. 정이주는 장차 전하의 성덕을 바라는 뜻이요. 김성일은 전하께 경계를 드리는 말인 줄 아옵니다”라고 말하여 어색한 자리를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병산서원 내 강당인 입교당의 모습.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정치가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그의 학문은 체(體)와 용(用)을 중시한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에게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서를 주고 실전에 활용케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1605년 풍원부원군에 봉해졌고, 파직된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 임진왜란의 기록인 <징비록>과 <서애집>, <신종록>, <영보록>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말년에는 그가 병들어 누워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가 궁중 의원을 보내어 치료케 했지만 65세에 죽었다. 그런데 하회에서 세상을 떠난 유성룡의 집안 살림이 가난해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빈집이 있는 서울의 마르냇가로 몰려들어 삼베와 돈을 한푼 두푼 모아 장례에 보탰다고 한다.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가는 길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는 하회마을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가는 길은 문체부에서 선정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로, 언제 가도 아름답고 고적한 산길이다. 가지각색의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계절에 따라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리기도 하는 산길을 따라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낙동강 흐름이 보인다. 산길을 내려서며 숲을 벗어나면 들판 너머로 하회마을이 나타나며 멀리 부용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안동하회마을은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지정 민속마을이다. 조선 전기 이후 전통적 가옥군이 남아있고, 풍수적 경관과 아울러 역사적 배경, 별신굿과 같은 고려 시대의 맥을 이은 민간전승 등이 현대사회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이유로 중요민속자료 122호에 지정되어 있다. 또한, 같은 이유로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하회마을은 유성룡이 속한 풍산 유씨 동족마을이다. 그 터전은 낙동강이 마을 전체를 동ㆍ남ㆍ서 방향으로 감싸 도는 명당자리라고 하며, 지형은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한다. 풍산 유씨가 집단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許氏)ㆍ안씨(安氏) 등이 유력한 씨족으로 살아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1635년(인조 13)의 <동원록(洞員錄)>에도 3개 성씨가 들어 있기는 하나 이미 유씨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그 이전에 유씨들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오늘날과 같은 유씨의 동족기반은 유운룡ㆍ유성룡 형제시대에 이룩된 것이다.

하회마을이 가까워지면 마을 전경과 부용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서애 유성룡이 공부를 했던 옥연정사.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낙동강 상류인 화천(花川)이 마을을 감싸 돌며 그 둘레에는 넓은 모래밭이 펼쳐지고, 서북쪽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들어서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백사장이 펼쳐진 강 건너에는 층암절벽이 펼쳐지고 그 위에 여러 누정이 자리 잡고 있어 승경(勝景)으로서의 면모도 잘 갖추고 있다.

음력 7월 보름이면 부용대 밑에서 시회가 열리고 아울러 유명한 줄불놀이가 벌어진다. 이 강상유화(江上流花)의 놀이는 하회별신굿과 함께 이 고장의 오랜 민간전승놀이이다. “하회별신굿을 보지 못하면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별신굿이 열릴 때면 나라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하회별신굿에 쓰이던 가면들은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부용대에 오르면 낙동강이 휘돌아가는 하회마을의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다. 부용대 아래로는 겸암 유운룡이 공부를 하던 겸암정사와 유성룡이 공부를 하던 옥연정(玉淵亭)이 있다. 낙동강이 이곳에 이르러 옥같이 맑은 못을 이루었다는 뜻을 따서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고도 부르는 자리 앞으로 강물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부용대에서 내려다 본 하회마을 전경.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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