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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역사 기행] 홍성에서 만해 한용운을 만나다…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독립운동가의 삶
[역사 기행] 홍성에서 만해 한용운을 만나다…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독립운동가의 삶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 승인 2018.09.14 1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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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터와 홍주성, 그가 머문 설악산 백담사를 걷다
홍성에 자리한 한용운 생가.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여행스케치=홍성] “조선의 7천 승려를 다 합해도 만해 한 사람은 당해내지 못한다.” 소설 <임꺽정>을 지은 벽초 홍명희는 한용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우리 민족의 선각자였고, 뛰어난 시인이었던 만해 한용운의 고향이 홍성이다.

홍성은 1914년에 홍주와 결성이 이름을 합치며 만들어진 고을이다. 예부터 “관청 많은 홍성에 가서 아는 체 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 홍성. 

그 말처럼 홍성에서는 고려 말의 대장군 최영과 고승 보우, 사육신으로 알려진 성삼문과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 등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태어났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은 1879년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불자 만해스님으로서의 삶
만해 한용운은 여섯 살부터 마을의 서당에서 한문 교육을 받았고, 아홉 살에 <기삼백주>와 <서상기>를 읽고 한 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아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그의 유년시절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홍성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닌 것은 분명하다.

한용운이 만 15세가 되던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동학농민혁명과 을미의병이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그가 살고 있던 홍성에서도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다. 그 후 그는 숙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으나, 1897년에 돌연 부모님과 아내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집을 떠났다.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였다.

한용운이 불자의 삶을 시작했던 백담사 전경.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만해 한용운은 1879년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한용운의 목적지는 서울이었으나 딱히 길을 아는 것도 아니요, 뚜렷한 목적이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정처 없는 여행에 지쳐가며 서울로 가던 길목에서 어떤 사람에게 설악산 백담사에 법력 높은 도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강원도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도사는 만나지 못하고 오세암에 머물며 불목하니 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세계 일주를 하기로 마음먹고 해삼위(海蔘威ㆍ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으나 실패하기도 했던 그는 1904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불자의 삶을 시작한다. 법명을 용운, 법호를 만해(萬海)라고 지은 그는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등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 등의 저서를 통해 ‘시대의 대세에 맞추어 조선불교개혁의 역사적 필연성을 통감하고 여기에서 어긋나는 장애를 유신(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해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가 진단한 당시의 불교는 근원적으로 병이 들어있었고, 근본적 개혁을 위해 유신이 불가피하며, 또 그를 위해서는 파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한용운이 내세운 유신의 대상은 “낡은 교단의 조직화, 선교의 일체화, 승려의 자생력 확립, 포교 방법의 현대화, 사찰의 도시 진출, 청년 교육의 중시, 각종 의식의 개혁 등” 여러 방면에 걸친 것들이었다. 이처럼 <조선불교유신론>은 급진적이었고 과격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도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담겨있다. 

백담사로 향하는 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독립운동가로서 그가 끼친 영향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한용운은 애국심이 높기로도 유명하다. 다음은 그와 관련된 일화이다. 1911년 불교와 관련한 일체의 통제권한을 조선총독부가 갖도록 하는 조선사찰령이 발표되면서 조선 불교는 어용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 어느 해에 태고사 대법당에서 주지 대회의가 열리게 되고 그 자리에 강연자로 초대받은 한용운은 전국에서 모인 승려들에게 묻는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물음에 누구하나 대답하지 않자, 그는 재차 묻는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입니다. 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번에도 승려들은 무슨 말이 나올까를 몰라 전전긍긍하며 얼어붙은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알기론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은 송장 썩는 것입니다. 똥 옆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용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그곳에 모인 승려들은 무언가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자리를 털고 일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한용운이 다시 물었다. 

“송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물음에 승려들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때 한용운이 법상을 주먹으로 두들기며 뇌성벽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것은 바로 여기 앉아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 

이렇게 말한 한용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법당을 나가버렸다. 이처럼 한용운은 불의와 일제에 타협한 사람들을 향해 호통을 치는 등 엄격한 모습을 보였던 인물이다.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조양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한용운은 1919년 3ㆍ1운동을 이끌었던 민족대표 33명 중에 불교측 대표로 이름을 올린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독립선언서에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라”라는 단호한 결의를 밝힌 공약 삼장을 덧붙이기도 했다. 

민족대표에 속했던 일로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은 한용운은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를 집필했다. 한용운이 지은 독립선언서라고도 부르는 이 글은 상해까지 건너가 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지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감옥에서 나온 한용운은 강연의 연사와 여러 활동을 하면서 1926년에는 <님의 침묵>을 펴냈다. <님의 침묵>에 수록된 시들은 ‘시 문학사상 가장 넓고 높으며 깊은 인간성을 표현한 진실한 시’라는 호평을 받으며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것과 동시에, 일제의 언론 탄압 내지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저항정신을 내보인 작품이다.

그 후로도 불교 계통의 민족투쟁 비밀결사 단체인 ‘만당’의 당수로 추대되는 등 활동을 이어가다가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의 삼우장에서 69세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한용운이 세상에 왔던 그곳에 서서
만해 한용운의 활동 영역은 전국에 걸쳐있지만 대부분의 생애는 서울에서 살면서 독립운동과 민족사상을 펼쳤다. 한용운과 관련된 유적지로는 그가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가한 연유로 동국대학교에서 인제군 북면 백담사 아래에 조성해 놓은 만해마을이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출생한 홍성과 그의 생가터도 그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장소이다.

먼저 한용운이 태어났던 고을 홍성에서는 홍주성을 들러볼 만하다. 조선 시대 초기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홍주성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천둥이 땅에 떨어지는 형세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에선 싸움이 많이 치러졌다. 열여섯 번에 걸쳐 왜구들이 침입하였고 최향의 반란, 이몽학의 반란, 동학혁명과 의병전쟁 등 수많은 전란을 거치며 성의 본모습을 많이 잃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810m 정도의 홍주성벽과 홍주아문, 그리고 동문이었던 조양문 등 불과 몇 가지일 뿐이다.

전쟁을 많이 겪었던 홍주성 성벽.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홍성군청에 남아있는 홍주아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옛 시절 홍주목 자리었던 홍성군청을 찾으면 홍주 동헌 외삼문이었던 홍주아문을 볼 수 있다. 1870년에 홍주 목사 한응필이 고쳐지은 것이라는 홍주아문은 정면 3칸으로 가운데에 솟을대문이 우뚝 솟아있어 당시의 권위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데, ‘홍주아문’이라고 쓰인 현판 글씨는 대원군의 친필이라고 한다.

지금은 문이 굳게 닫혀있고, 사람들은 새로 만든 홍성군청 정문으로 들락거린다. 꼭 필요한 차량만 새 문으로 드나들게 하고 홍성군수를 비롯한 모든 내방객들은 홍주아문을 사용하게 했다면 얼마나 운치가 있을까? 그러한 아쉬움은 조양문에서도 마찬가지라서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결성면에서 한용운의 옛집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청룡산이 보인다. 청룡산의 정상 바로 아래에 고산사라는 절이 있는데 신라의 도선 국사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절과 석탑의 위치로 보아 고려 때에 세워진 절로 추정되고 있다.

나지막한 청룡산(230m) 자락에 자리 잡은 고산사의 대광보전(보물 제399호)은 여러 차례 중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 건축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홍성 고산사의 불상.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한용운 생가 인근에 있는 고산사.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주심포방식과 다포방식의 절묘한 결합을 보이는 대광보전 가운데에 오른쪽의 불상은 흙으로 만든 것이고 왼쪽의 석가여래좌상은 돌로 만든 것이다. 이처럼 돌로 만든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만들었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산사를 나와 조금 더 북쪽으로 향한 결성리에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지’가 있다. 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어 홍성군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출가 전까지 생활했던 방 2칸, 부엌 1칸의 초가집을 복원해 놓았다. 

생가 옆으로는 <조선 독립의 서>에 적었던 어록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가 적힌 비석과 한용운 동상도 세워져 있다. 외롭고 고집스러운 삶을 살았던 그가 흐르는 세월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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