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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제주 오가피로 1년 간 빚은 약주 ‘녹고의 눈물’
제주 오가피로 1년 간 빚은 약주 ‘녹고의 눈물’
  • 김선주 주류칼럼니스트
  • 승인 2018.10.13 1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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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알길 수월봉에 얽힌 전설 따라 술도가 투어
제주 오가피로 빚은 약주, 녹고의 눈물. 사진 / 김선주 주류칼럼니스트

[여행스케치=제주] 카페, 바다, 서점, 오름, 미식, 건축… 제주를 여행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다양한 테마를 포괄할 수 있는 여행, 제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 번쯤은 제주의 본질을 만날 수 있는 여행을 만났으면 한다. 제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경쟁력은 뭐니 뭐니 해도 자연이다.

제주의 자연이라면 화산 지형을 빠뜨릴 수 없다. 제주 고산리의 수월봉은 약 1만 8000여 년 전 뜨거운 마그마가 물을 만나 생긴 화산체의 일부다. 화산 활동으로 인해 생긴 제주의 단층구조를 자세히 볼 수 있기 때문에 수월봉은 ‘화산학 교과서’라 불린다. 수월봉에서 차귀도포구까지 이어지는 길을 ‘엉알길’이라고 하는데, 엉알은 제주어로 ‘절벽 아래, 낭떠러지’라는 뜻이다. 

녹고의 눈물을 만드는 (주)토향의 내부 모습. 사진 / 김선주 주류칼럼니스트

녹고의 눈물에 얽힌 전설
엉알길을 걷노라면 좌측에는 화산 쇄설성 퇴적층의 단면이, 우측에는 청정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지는 풍경을 목도하게 된다. 마치 요르단 페트라 협곡이 연상된다고 할까. 시간, 불, 물을 재료로 빚은 경이로운 예술 작품 안으로 서서히 들어가 여행자도 자연의 일부가 된다. 

지층의 단면, 갯바위, 다양한 형태의 주상절리, 길가에 작은 암석까지 이곳에서는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특히 해안절벽의 틈 사이로는 촉촉한 용천수가 흐르는데 여기에는 한 남매의 효심에 얽힌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녹고와 수월이라는 효성 지극한 남매가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렸는데 어떠한 약을 써도 병의 차도가 없었다. 이들 남매를 안타깝게 여긴 스님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할 100가지 약을 알려주었고 남매는 99가지의 약을 가까스로 구했다. 

제주 오가피. 사진 / 김선주 주류칼럼니스트

남매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지 약, 오가피를 찾아 헤매다 수월봉 벼랑 아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월이 절벽으로 내려가 오가피를 꺾는 순간,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감격에 잡고 있던 녹고의 손을 실수로 놓았고 수월은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죽은 수월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에 대한 효를 이루지 못한 슬픔으로 녹고는 이곳에서 일주일 동안 울었고 그 눈물은 ‘노꼬물(녹고물)’이 되어 아직도 절벽 틈에서 흐르고 있다고 전해진다. 녹고와 수월의 전설이 얽힌 수월봉은 ‘노꼬물 오름(노꼬메 오름)’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주 오가피를 발효 숙성한 술
녹고와 수월이 구하고자 했던 오가피에는 항암, 관절 등 신체의 항상성 유지에 탁월한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조선 시대 선조는 무릎이 아플 때 의관이 오가피 달인 물을 처방했다고 전해지며, 동의보감에도 한 마차의 금괴보다 한 줌의 오가피가 더 값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토록 몸에 좋은 오가피를 술의 재료로 사용한다면, 보약처럼 몸에 이로운 술이 되지 않을까? 

(주)토향의 공장 내부 모습. 사진 / 김선주 주류칼럼니스트

제주 한경면에 있는 ㈜토향에서는 물과 바람, 불이 만들어낸 생명의 약초, 오가피의 뿌리로 술을 빚는다. 오가피를 따다 슬픈 운명을 맞이한 녹고와 수월 남매의 이야기에 착안해 술 이름을 ‘녹고의 눈물’이라 지었다.

녹고의 눈물은 20년이 넘은 오가피 뿌리를 세척 및 절단하고 건조하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맛과 향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일반 스테인리스가 아닌 항아리에서 오가피 뿌리를 발효시킨 후 원액을 추출한다. 

원액을 추출하는 데만 12시간이 걸리고 이후 발효를 하는 기간은 60일 이상이다. 발효 단계 이후 오가피의 찌꺼기를 여과한 뒤 6개월 이상의 숙성기간을 더 거치면 비로소 녹고의 눈물이 탄생한다. 이 모든 공정은 약 1년 정도 걸린다.

김경훈 (주)토향 대표가 녹고의 눈물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 김선주 주류칼럼니스트

느림의 미덕…천천히 음미하는 술
술을 크게 나누면 탁주, 청주 및 약주, 과실주, 소주 등 다양한데, 이중 녹고의 눈물은 약주에 해당한다. 주세법에 의하면 청주와 약주는 구분되지만 일반적으로 약주는 ‘증류하지 않은 맑은 술’을 일컬으며 청주와 약주를 혼용해 약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개 약주는 누룩이나 쌀을 베이스로 발효시키지만 녹고의 눈물은 원액을 추출하고 발효, 여과, 숙성하는 ‘와인공법’으로 빚는다는 점이 특이하다. 김경훈 ㈜토향 대표가 녹고의 눈물을 와인공법으로 빚는 이유는 오가피 본연의 향과 맛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

녹고의 눈물이 발효되고 있는 모습. 사진 / 김선주 주류칼럼니스트

녹고의 눈물은 첨가제가 들어가지 않은 ‘생주’라서 와인처럼 오래 놔두면 성숙해진다. 구입 후 적절한 온도에 제대로 보관하면 맛은 처음보다 원숙해지고 술의 색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진다.

와인이나 커피를 마실 때 종종 싱그러운 열매를 베어 문 듯 산뜻한 신맛과 마주할 때가 있다. 녹고의 눈물의 첫맛도 이와 비슷하다. 새콤하게 다가와 ‘오가피의 떫고 쓴맛’을 예상하는 이들을 무장 해제시킨다. 이후 은은한 오가피의 맛과 향이 입안을 유랑하며, 맛에 익숙해질 즈음 달짝지근함을 퍼뜨린다.

쌉싸름한 맛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1년여의 시간을 거치며 충분히 숙성됐기 때문이다. 새콤함과 은은한 향, 과하지 않은 단맛으로 목넘김이 쉬운 술이지만 ‘녹고의 눈물’의 도수는 16%다. 저도수인 맥주처럼 꿀꺽꿀꺽 마신다면 선명했던 시야가 흐릿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괜히 약주겠는가. 녹고의 눈물은 급하게 마시는 게 아니라 천천히 음미하는 술이다.

녹고의 눈물은 전복 요리와 잘 어울린다. 사진 / 김선주 주류칼럼니스트

느림의 미덕을 지키며 술잔을 기울이려면 환상적인 궁합의 음식과 함께해야 할 터. 과거 강레오 셰프가 녹고의 눈물과 어울리는 음식으로 전복요리나 생선요리를 꼽은 적이 있다. 제주의 산에서 난 오가피와 바다에서 난 전복, 생선이 만났으니 ‘마리아주(음식과 와인의 궁합)’라 할만하다. 올 가을 제주를 찾는다면 수월봉에서 차귀도포구까지 이어지는 엉알길을 걸은 후 전복요리와 함께 녹고의 눈물을 마셔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Info ㈜토향
금액 녹고의 눈물 500ml 2만 3000원 (4만원 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홈페이지 상에서 구입 가능)
주소 제주 제주시 한경면 연명로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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