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4월호
[역사 기행] 전남 강진과 정약용…다산의 학문이 꽃 핀 다산초당
[역사 기행] 전남 강진과 정약용…다산의 학문이 꽃 핀 다산초당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 승인 2018.10.15 13: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만덕산 자락을 따라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여행스케치=강진] 요즈음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제주도나 본인이 좋아하는 곳에서 한 달 쯤 사는 것이 유행이다. 한두 달을 살아서 그 지방을 알고 ‘떠남’의 의미를 안다는 것도 좋지만, 필자는 사시사철 한 해를 살아보고픈 장소가 나라 안에 많다. 그 중에서도 앞선 순번에 놓은 곳이 전남 강진군이다. 

<오매, 단풍 들것네>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로 이름이 높은 김영랑 시인의 생가가 있는 강진은 무위사와 월남사지, 그리고 강진청자와 가우도 출렁다리 등 관광지가 많아 찾는 사람들이 많다.

강진을 찾은 이들이 많이 방문하는 김영랑 시인의 생가.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강진 명물이 된 가우도 출렁다리.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또한 도암면 만덕산 자락에서는 남해가 한 눈에 바라다 보여 명소라 말할 수 있다. 백련산이라고도 부르는 만덕산(萬德山)은 높이 408m로, 그 아래에 자리 잡은 귤동마을의 다산초당에서 다산 정약용이 18년에 걸쳐 유배생활을 하였다.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만덕산 자락
도암면 만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 귤동은 유자나무가 많아서 지은 이름이고, 정약용이 귀양살이를 했던 다산(茶山)은 귤동 뒤에 있는 산으로 차나무가 많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던가? 정약용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 숱한 국사범들의 유배지였던 곳, 한 시대를 풍미했던 빼어난 사람들이 절망과 질곡의 시절을 보낸 장소들이 현대에 접어들면서 역사 유적지와 문화관광지로 또는 말년을 지낼 거주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다산 정약용이 머물렀던 강진의 다산초당이다. 

정약용이 남긴 <다신계안(茶信契案)>을 보면 그의 유배생활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신유년(1801년) 겨울 강진에 도착하여 동문 밖의 주막집에 우접(寓接)하였다. 을축년(1805년) 겨울에는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기식하였고, 병인년(1806년) 가을에는 학래의 집에 이사가 살았다. 무진년(1808년) 봄에야 다산(茶山)에서 살았으니 통계를 내보면 유배지에 있었던 것이 18년인데 읍내에서 살았던 것이 8년이고 다산에서 살았던 것이 10년이었다.’

정약용이 새긴 '정석' 글씨.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정약용이 유배를 와 처음 4년간 살았던 사의재.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다산초당에 있는 천일각.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유배지의 오두막집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은 그는 그 집에서 1805년 겨울까지 만 4년을 살았다.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을 조금씩 시작한 그는 이곳에서 <상례사전>이라는 저술도 남겼는데, ‘방에 들어가면서부터 창문을 닫고 밤낮으로 외롭게 혼자 살아가자 누구 하나 말 걸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뻐서 혼자 좋아하기를 ‘나는 겨를을 얻었구나’ 하면서, <사상례(士喪禮)> 3편과 <상복(喪服)> 1편 및 그 주석(註釋)을 꺼내다가 정밀하게 연구하고 구극까지 탐색하며 침식을 잊었다’는 서문을 남겼다.

다산은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뒤에 있는 보은산의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곳에서 주로 주역 공부에 전념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닿는 것, 입으로 읊는 것, 마음속으로 사색하는 것, 붓과 먹으로 기록하는 것에서부터 밥을 먹거나 변소에 가거나 손가락을 비비고 배를 문지르던 것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인들 <주역>이 아닌 것이 없었소.’

이렇게 자신의 감회를 피력했던 시절이 그 시절이었다. 그 다음해 가을에는 강진 시절 그의 수제자가 된 이청(李晴, 자는 학래(鶴來))의 집에서 기거했다. 다산이 만덕산 자락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유배생활이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났던 다산초당
도암만 바다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이는 만덕산 중턱에 다산학(茶山學)의 산실인 다산초당이 있다. 만덕산에는 천년고찰인 백련사도 있는데, 다산초당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길은 바다가 보이는 산길이다.

다산 정약용은 야생차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진 그 길을 셀 수도 없이 많은 나날을 걸어 다녔을 것이다. 정약용이 다산초당에 머물던 시절 가장 각별하게 지냈던 사람이 백련사에 있던 혜장(惠藏)선사였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뤘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정약용의 벗이 되어주었던 혜장선사가 있었던 백련사.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혜장선사(1772~1811)는 해남 대둔사의 스님이었다. 나이가 서른 살쯤 되었던 혜장선사는 두륜회(두륜산 대둔사의 불교학술대회)를 주도할 만큼 대단한 학승으로 당시 백련사에 거처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읍내 사의재에 머물던 1805년 봄에 알게 되어 그 후 깊이 교류하였다.

정약용이 한때 보은산방에 머물며 주역을 공부하고 자신의 아들 학유를 데려다 공부시켰던 것도 혜장선사가 주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혜장은 다산보다 나이가 어리고 승려였지만,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문재도 뛰어났다고 한다.

1811년에 혜장선사가 죽자 다산은 그의 비명을 쓰면서 ‘<논어> 또는 율려(律呂), 성리(性理)의 깊은 뜻을 잘 알고 있어 유학의 대가나 다름없었다’고 하였다.

정약용이 사의재에서 지내던 때에는 혼자 책을 읽고 쓰면서 읍내 아전의 아이들이나 가끔 가르쳤을 뿐 터놓고 대화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정약용은 혜장스님과 만나 그와 토론하는 가운데 학문적 자극을 받고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다산초당으로 옮긴 후 정약용은 비로소 마음 놓고 사색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본격적으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할 여건을 갖게 되었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이 땅과 그 병의 근원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여김공후>에서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느냐의 여부는 오직 나 한 사람의 기쁨과 슬픔일 뿐이지만, 지금 만백성이 다 죽게 되었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면 좋으냐’라고 적고 있다. 그는 실학과 애민(愛民)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 그 당시 백성들이 직면했던 실상을 <애절양(哀絶陽)> 같은 시로 남겼으며, 유배가 풀려 고향인 능내리로 돌아가기까지 5백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다산수련원에 있는 두충나무 숲.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이사장

다산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 그가 가르쳤던 18명의 제자들이 떠나간 스승을 흠모하고 정을 유지하기 위해 ‘다신계(茶信稧)’를 만들었다. 그들은 청명이나 한식날, 스승이 거처하던 초당에 모여 운을 낸 뒤 시를 지어서 다산에게 보냈다.

그 뒤 곡우절에는 연한 차 잎을 따서 겻불에 말려 한 근을 만들고, 입하에는 만다를 따서 떡 두 근을 만들어 그들이 지은 시찰과 함께 스승에게 보냈다. 다산이 별세할 때까지 이어진 제자들의 스승 사랑에 다산 또한 가끔씩 편지를 보내어 그곳의 경향을 물었다. 

‘동암(東菴)의 지붕은 잘 이었는지, 뜰에 심었던 홍도는 잘 살고 있는지, 차는 철을 놓치지 않고 잘 따고 있는지’ 하고 보낸 그의 편지를 보면 몸은 고향에 있어도 마음은 항상 다산초당 일대를 그리워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스승과 제자들의 아름다운 사랑이 머물고 있는 다산초당은 다산이 고난에 찬 한 시절을 보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연유로 즐겨 찾아가 삶터로서의 공간을 모색하고 있고 다산을 그리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찾아오고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