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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⑨] 경상도 대표 고을 상주를 지나며 낙동강 역사를 더듬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⑨] 경상도 대표 고을 상주를 지나며 낙동강 역사를 더듬다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 승인 2018.10.2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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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삼강나루에서 상주 낙동나루까지
낙동강 절경 경천대와 상주에 남은 옛이야기들
예천 삼강나루를 지나며 낙동강은 상주로 흘러간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예천 삼강나루를 지나며 낙동강은 상주로 흘러간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편집자 주
평생을 산천을 걸으며 보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신정일 대표는 낙동강을 세 번째 걷는다. 지난 2001년 9월, 517km의 낙동강을 걸었으며, 그로부터 여덟 해가 훌쩍 지난 2008년 60여 명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지난 2월부터 1년간의 일정으로 ‘우리 땅 걷기’ 회원 90여 명과 함께 ‘낙동강 1300리 길’을 걷고 있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라는 제목으로 낙동강 걷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여정을 연재한다. 

[여행스케치=상주] 낙동강은 삼국시대에는 황산강(黃山江), 황산하(黃山河), 황산진(黃山津)으로 불리었다가 고려에 들어와서 낙동강 명칭이 추가되어 같이 사용하였다. 조선조 이후에야 낙동강이 대표 명칭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경상북도지명유래집>을 보면 낙양리(洛陽里)는 중국의 낙양성을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낙양의 동쪽을 낙동, 서쪽을 낙서, 남쪽을 낙평, 북쪽을 낙원이라 한다. 이와 관계된 상주의 옛 이름인 상락(上洛)이 부근에 있으며, ‘낙동면과 낙동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곳을 둘러 흐르는 낙동강의 이름을 따서 낙동면이라 하였다고도 기록되었다. 상주의 옛 이름이 낙양이었기에 낙양의 동쪽에 있으므로 낙동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가락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낙동강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강 따라 다다른 상주의 옛이야기
삼강나루를 지나며 길은 끊어지고, 낙동강 걷기를 이어가기 위해 하풍제방을 따라간다. 강 건너에 보이는 경북 문경시 영순면 말응리에서 강물이 휘돌아 가는데, 모양이 말처럼 생겼다는 말바우 아래에서 영강이 낙동강으로 접어든다.

영강은 속리산 문장대에서 발원한 물줄기다. 먼저 동북쪽으로 흐른 뒤 문경시 농암면 중앙을 뚫고 가은읍 남부를 지나며 서북쪽에서 오는 물과 합쳐진다. 다시 마성면 남쪽에서 소야천을 만나 흐르다가 점촌읍과 호계면을 지나 영순면과 상주시 합창읍의 경계를 이루고, 이안천과 합류하여 동쪽으로 꺾이면서 낙동강에 몸을 푼다.

와룡산 자락을 끼고 있는 와룡리에 접어들자 반듯하게 만들어진 제방이 나타나고, 그 아래에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강 건너 매호 정수장을 바라보며 상풍교를 지나면 상주시 사벌면에 도착한다. 예부터 상락(上落)사량벌(沙粱伐)사벌(沙伐)상산(商山)같은 이름으로 불리던 이 땅이 상주라는 이름으로 고쳐져 신라 9주의 하나인 큰 고을이 된 것은 제35대 경덕왕 때였다. 고려 성종 때에는 12목 중의 하나가 되었고 조선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8도의 지방행정구역을 다시 정리할 때에 경주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라 칭하게 됐을 만큼 규모를 유지해왔다.

사벌면을 포함한 상주 지역에 사벌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사벌면을 포함한 상주 지역에 사벌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한편,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상주의 다른 명칭은 낙양(洛陽)이며, 조령 밑에 있는 하나의 큰 도회지로서 산이 웅장하고 들이 넓다. 북쪽으로 조령과 가까워서 충청도경기도와 통하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에 임해서 김해(金海)동래(東來)와 통한다. 운반하는 말과 짐 실은 배가 남쪽과 북쪽에서 물길과 육로로 모여드는데, 이것은 무역하기에 편리한 까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 사벌면을 비롯한 상주 지역에 삼한시대 소국 중 하나인 사벌국(沙伐國)이 있었다고 한다. 일명 사량벌국(沙粱伐國)이라고도 불렀는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진한(辰韓) 호로국(戶路國) 또는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에 비교하기도 한다.

낙동강의 절경으로 이름난 경천대
매호리를 지나면 경천대가 바로 지척이다. 경천대는 주변으로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굽이쳐 흐르는 강물, 그리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형성되어 하늘이 만들었다는 뜻의 자천대로도 불렸던 명소이다. 그 뒤 하늘을 떠받든다는 의미로 경천대로 이름이 고쳐졌고, 낙동강 전체에서도 자연경관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라 1987년 국민관광지로까지 지정되었다.

경천대 부근의 사벌면 화달리에도 사벌국과 관련된 왕릉이 있다. 이곳 사벌국은 정사에서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고 야사에만 등장하는데, 신라말 제54대 경명왕의 아들이었던 사벌왕자가 견훤과 궁예가 세력을 떨치자 그에 맞서기 위해 세운 나라였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자그마한 고대국가로 신라 제12대 침해왕 때 정복되어 그때부터 상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도 한다. 조촐하지만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벌국 왕릉 옆에 신라시대 양식을 지닌 화달리 삼층석탑(보물 제117)이 있고, 그 인근에 임진왜란 때 뭍의 이순신으로 불리었던 의병장 정기룡 장군의 유적지가 있다. 한편, 경천대 남쪽 200m 지점에 있는 바위에서도 정기룡 장군이 용마를 타고 훈련하였다고 한다.

낙동강에서도 아름답기로 이름 난 경천대.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낙동강에서도 아름답기로 이름 난 경천대.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 사벌국의 왕릉도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 사벌국의 왕릉도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경천대를 벗어나 도남리에 이르면 대비 나루터가 있고 나루터 북쪽에 도남서원(道南書院)이 있다. 조선 선조 39(1606)에 창건한 도남서원에는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노수신, 유성룡, 정경세를 배향하였으나 고종 때 헐리었다가 4대강 사업 이후 다시 지어졌다.

상주보를 지나서 길은 제방으로 계속 이어지고 중동교를 건너 바라보는 작은 마을 아래에서 위천(渭川)이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위천은 일연스님이 입적한 인각사가 있는 군위군 고로면 학암동 화산에서 발원하여 여러 곳을 거친 뒤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낙동강에 몸을 푸는 물줄기다.

우물리에는 우무실 마을이 있는데, <상주의 얼>에 기록된 바로는 위천의 물이 낙동강으로 접어드는 것에 더해 속리산, 팔공산, 일월산 등 세 산의 지맥도 한 곳에 모인 절승의 명기라고 한다. 우물리 마을은 동, , 남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영양군에 솟구친 일월산이 남쪽으로 내려와 낙동강과 만나고 동쪽 쉰등골은 대구의 팔공산이 위천을 따라 올라와 매듭을 지었다. 그러고 강 건너 나각산은 상주시 하북면에서 비롯된 속리산이 내려와 마무리 지었기 때문에 이곳이 이수삼산합국(二水三山合局)의 천하대지라고 불리는 것이다.

조선 선조 때 창건되어 유학자들을 배향했던 도남서원.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조선 선조 때 창건되어 유학자들을 배향했던 도남서원.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낙동강 변의 제일 큰 낙동나루
소라의 뿔과 같이 생겼다는 나각산 자락을 휘돌아가자 낙동리 뒷마을인 뒷디미(원마)마을이다. 이곳 뒷디미 마을에서 의성군 단밀면 생송동 밤실로 건너가는 나루가 뒷디미 나루터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멀리 낙단대교가 보인다.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가는 낙단대교 변두리에 강 건너 낙점동 역말로 건너갈 수 있는 낙동나루가 있다. 낙동여울목으로 여울져 흐르는 강물을 보며 상주와 낙동나루의 어제를 떠올려 본다.

낙동나루는 낙동강 하류지방의 각 조세창고에서 한양으로 세곡을 실어 나르던 뱃길의 최상류 종착지점이기도 했다. ‘낙동강 700라는 말이 생긴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조의 문물(文物)의 유통은 수로(水路)를 주로 이용했는데 세미(稅米)의 경우, 영남지방에서는 낙동강을 이용, 상주 낙동진에 모아서 육로를 이용해 점촌, 문경을 지나고 조령을 넘어 충주 가흥창(可興倉)에서 다시 한강 수로를 이용 한양으로 운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남 지방 사람들이 한양으로 갈 수 있는 길목 중 하나였던 문경새재.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영남 지방 사람들이 한양으로 갈 수 있는 길목 중 하나였던 문경새재.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낙단대교를 건너면 의성군으로 들어서게 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낙단대교를 건너면 의성군으로 들어서게 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옛 시절의 낙동나루는 영남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용무를 보러가거나 과거 보러 갈 때에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길목 중 하나였다. 경산, 영주, 영천, 대구 등지에 사는 사람들은 상주를 거쳐 영동으로 빠지거나 문경새재를 넘어 괴산으로 가는 두 길 밖에 없었고 죽령을 넘는 사람들은 안동, 영양 일대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과거를 보러가던 사람들은 죽령은 죽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았고 추풍령 또한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말 때문에 넘지 않았으므로 문경새재 내 계립령을 넘어서 서울로 갔다. 그런 연유로 상주를 거치는 사람들은 낙동나루를 거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이 나루가 안동 아래쪽의 낙동강 나루로는 가장 큰 것이었는데 이곳에서 이십리 쯤 아래로 떨어져 있는 선산군 도개면 신림동에 일선교가 놓인 1967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근처 주민들이 관공서에 진정을 해 이곳에다 낙단교를 세우기로 했으나 다릿발 여섯 개만 세운 채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그 뒤 국회의원 선거 때만 되면 후보들이 저마다 다리를 완공시키겠다는 공약을 들고 나왔지만 선거만 끝나면 그만이어서 선거 다리라는 별명까지 붙여졌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과거 길이자, 해방되기 전까지 부산에서 온 소금배가 낙동강을 거슬러 와 안동과 예안으로 올라간 건널목이었다는 낙동나루에는 오랫동안 매운탕집 몇 채와 다릿발뿐인 낙단교가 썰렁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이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1986년에야 낙단교가 세워졌다.

관수루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정취를 즐긴다는 뜻으로 지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관수루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정취를 즐긴다는 뜻으로 지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낙단교를 건너 의성군 단밀면으로 들어서자 농민생존권 대책없는 낙동강 특별법 결사반대라는 플래카드가 강변에 걸려있다. 낙정리(洛井里)에는 낙동역이 있었던 마을이 있고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던 우물인 양정이 있었다. 낙동과 양정 사이에는 옹기점 마을이 있고 낙동나루터에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정취를 즐긴다는 뜻으로 지은 관수루(觀水樓)가 서있다. 조선 말기 고종 때 홍수피해로 떠내려 가버린 관수루는 1976년 이 지역 사람들이 다시 지은 것이고 그 내부에는 낙동강을 노래한 시 10편이 걸려있다. 지금도 낙동강을 무심히 바라보는 관수루에서 이번 여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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