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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12월호
[역사 기행] 충남 부여 무량사에서 김시습을 조우하다
[역사 기행] 충남 부여 무량사에서 김시습을 조우하다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 승인 2018.11.0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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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중의 천재'라 불리던 인물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집필
전국을 유랑하다 무량사에서 마감한 생애
전국을 유랑하던 김시습이 나이 59세에 생을 마감한 부여 무량사 겨울 풍경.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여행스케치=부여] 조선 500년 역사 속에서 천재중의 천재인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1435년에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고 ‘한 번 배우면 곧 익힌다’하여 이름도 시습으로 지어진 인물이다.

김시습이 가진 뛰어난 재주는 대궐에까지 알려져 세종대왕이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린 바 있다. “내가 친히 그 아이를 불러보고 싶으나 일반 백성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 그러니, 그 가정에 권하여 잘 감추어 교양을 쌓도록 하고, 그의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그때부터 그의 명성은 전국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단종 폐위 사건을 접하고, 세상과 등지다
그처럼 어릴 적부터 명성이 남달랐던 김시습이지만 벼슬길에 나설 운명은 아니었다. 김시습의 나이 21세가 되던 1455년에 세조가 단종에게 임금의 자리를 빼앗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김시습은 조정에서 벼슬을 살았던 신하가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절개를 지킬 필요는 없었으나, 그 후로 세상의 부귀를 뜬 구름처럼 여기고 이리저리 떠돌았다. 

그는 지금의 개성인 송도를 기점으로 관서 지방을 4년간에 걸쳐 유람한다. 그리고 공주 동학사에 머물던 중인 1456년 6월, 폐위된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일으킨 단종 복위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고 곧바로 서울로 달려갔다.

하지만 김시습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종 복위사건의 주모자였던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이개, 유성원 등이 죽임을 당했고, 김시습은 그들 중 몇 사람의 시신을 한강 남쪽인 노량진의 언덕배기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산천을 구석구석 답사한 김시습이 가장 살만한 곳으로 여기고 사랑했던 곳은 아마도 경주의 금오산(지금의 경주 남산)이었을 것이다.

경주 남산은 김시습이 가장 살만한 곳으로 생각했다고 여겨지는 곳이다. 사진 / 노규엽 기자
김시습이 사랑했던 금오산(경주 남산)은 신라시대부터 불교 흔적이 많이 남은 곳이다. 사진 / 노규엽 기자

<매월당집> 부록 제2권에 실린 <매월당시사유록후서>를 보면 “금오에 살게 된 이후 멀리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다만 바닷가에서 한가로이 노닐며 들판과 마을을 말과 행동에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로이 다니며, 매화를 찾고 대밭을 찾아 언제나 시를 읊고 술에 취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하였다”고 적혀있다.

이런 정황을 보아 김시습이 얼마나 경주의 금오산을 사랑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서, 관동, 호남은 하나의 도로 여겨서 하나의 유록으로 만들면서 금오는 하나의 부인데도 하나의 유록으로 만들었다. 그의 호인 매월이라는 당 역시 금오산의 금오매월에서 따왔으며 그가 머물렀던 금오산실은 바로 용장사이며, 그 집의 당호가 바로 ‘매월당’이다. 

이 금오산에서 서른한 살부터 서른일곱 살에 이르는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남겼다.

1481년 47세가 되던 해 김시습은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제사를 지냈다. 그런 후 그는 안씨를 아내로 맞아들이며 환속하여 고기도 먹고 일반인처럼 살고자 하였다. 세상으로 돌아온 듯한 그에게 벼슬을 권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세상과의 불화가 깊다고 느낀 김시습은 벼슬에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경주 남산을 방문하면 김시습뿐 아니라 다양한 불교 문화를 둘러볼 수 있다. 사진 / 노규엽 기자
현재 노량진 인근에 남아있는 사육신묘. 김시습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사진 / 노규엽 기자

하지만 평온했던 시절도 채 일 년도 안 돼 아내인 안씨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머리를 깎고서 방랑을 시작하였다. 이번 방랑에서는 강원도의 강릉과 양양 그리고 설악산과 춘천의 청평산 등에 오래 머물렀는데, 그 당시 양양부사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다. 유자한과의 서신에서 김시습은 다시 방랑을 시작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자주 몸과 세상이 서로 어긋나서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갓과 같았습니다. 또 옛날 지기들은 모두 죽어서 없고 새로 사귄 사람들은 아직 익숙하지 못하니 그 누가 나의 본 뜻을 알아주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다시 형해를 산수 간에 방랑하게 된 것입니다”

유자한이 그를 접대하면서 가업을 일으켜 출세하기를 권하였지만 깁시습은 정중히 편지를 써서 사절하였다고 한다. 

무량사에 남은 김시습의 초상
오십대에 이르러서야 인생에 대하여 초연해진 김시습이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은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의 무량사였다. 어째서 김시습은 이곳 무량사를 말년을 의탁할 곳으로 정했던 것일까? 무량이란 셀 수 없다는 말의 한 표현으로서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다는 곳으로 그곳이 바로 극락정토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곳으로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고려시대 때 석탑인 보물 제185호 무량사 오층석탑.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고려시대 때 석탑인 보물 제185호 무량사 오층석탑.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무량사 산신각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무량사 산신각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만수산(575m) 기슭에 자리 잡은 무량사는 사지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 고승인 무염국사가 머물렀다고 전한다. 하지만 범일국사(810~889)는 문무왕 때(661~680)와 훨씬 동떨어진 후대의 인물로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명주굴산사에서 주석하다가 입적하였기 때문에 그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때 크게 중창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무량사는 임진왜란 당시 크게 불탔으며 17세기 초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있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10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알려진 무량사 석등(보물 233호)이 먼저 들어오고 그 뒤에 오층석탑이 있어 볼만하다.

김시습이 무량사에서 세상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그가 이곳에서 보낸 생활은 정작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다만 그가 무량사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에 버릴지어다.” 그래서 지금의 무량사에는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불만이 가득한 표정의 김시습의 초상화가 지나는 길손들을 맞고 있다. 

무량사에 있는 김시습의 묘. '오세김시습지묘'라고 적혀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무량사에 있는 김시습의 묘. '오세김시습지묘'라고 적혀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충남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무량사의 일주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충남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무량사의 일주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김시습은 그의 나이 쉰아홉인 1493년(성종 24년) 2월 어느 날 무량사에서 쓸쓸히 병들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죽을 때 화장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였으므로 그의 시신은 절 옆에 안치해두었다고 한다. 그러다 3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었는데, 김시습의 안색이 생시와 다름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어 그의 유해를 불교식으로 다비를 하였고,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만들어 세웠다 전해진다. 

무량사를 한 바퀴 둘러보고 ‘만수산 무량사’라고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나설 때 매월당의 시 한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림자는 돌아다 봤자 외로울 따름이고
갈림길에서 눈물을 흘렸던 것은 길이 막혔던 탓이고
삶이란 그 날 그 날 주어지는 것이었고
살아생전의 희비애락은 물결 같은 것이었노라고.

한편, 무량사가 있는 만수산 건너편으로 성주산 자락에 있는 보령군 미산면의 성주사(聖住寺) 터도 함께 둘러볼 만하다. 이절에는 최치원의 사산비문중의 하나로써 국보 제8호로 지정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있다. 그때의 것으로는 가장 큰 비로 전체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외형에 듬직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를 발휘한 작품이다.

무량사 인근으로 여러 보물이 남아있는 성주사지도 들러볼 만하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신라시대의 석비를 대표하는 이 비는 귀부의 일부에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특히 귀부의 구름무늬나 이수도 그렇지만 4면에 운룡문은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이 비에는 낭혜화상의 행적이 모두 5천여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다. 글은 최치원이 지었고 글씨는 최치원의 사촌동생이었던 최인연이 썼는데 고어(古語)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주사지에는 이 탑비 외에도 신라 말에 건립된 4기의 석탑이 있다. 보물 19호인 성주사지 오층석탑과 보물 20호인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및 조각수법이 뛰어난 보물 47호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그리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40호인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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