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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행궁 탐방] 수원 화성, 임금이 걷던 길을 따라 걷다
[행궁 탐방] 수원 화성, 임금이 걷던 길을 따라 걷다
  • 박상대 기자
  • 승인 2018.11.28 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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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효성과 애민정신 담긴 화성
혜경궁 홍씨 회갑연 열렸던 봉수당
수원 시내 한눈에 담는 서장대 등
사진 / 박상대 기자
정조대왕의 영혼과 숨결이 살아 있는 수원 화성.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수원] 수원 화성에는 효심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극진했던 정조대왕의 영혼과 숨결이 살아 있다. 성곽을 거닐면서 옛사람들의 넉넉함과 배려, 낭만과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임금의 효행을 위해 지어진 수원행궁
수원 화성에서 행궁에 들어가기 위해 정문인 신풍루 앞에 섰다. 금방이라도 정조대왕이 “넌 누구냐? 어서 들어 와!”하고 부르는 것만 같다. 목례를 하고 신풍루 안으로 들어갔다. 봉수당이 당당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봉수당 안을 기웃거리는데 정조 임금이 어머니(혜경궁 홍씨)에게 회갑연을 베풀고 있는 모형 밀랍이 눈에 띈다. 근엄한, 매우 비장한 얼굴을 한 정조의 얼굴에 시선이 머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효성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낳고 길러준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것이 사람의 도리일 텐데 그렇지 못한 무리들이 많은 까닭이리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수원 화성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아야 한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사진 / 박상대 기자
수원 화성 행궁 입구인 신풍루 앞마당에서 매일 오전에 전통무예 시범공연이 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수원 화성과 행궁은 조선 정조 임금이 효를 실천한 과정에서 건축한 건축물이다. 화성의 밑그림을 그린 것은 임금이고, 1794년부터 96년까지 채제공이 총감독을 맡고, 정약용이 화성을 설계했다고 전한다. 당시 정조의 나이 42세, 정약용의 나이 32세였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양주(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수원시 화성으로 옮겼고, 이름을 현륭원(懸隆園)이라 붙였다. 훗날 융릉(隆陵)으로 격상되면서 왕릉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정조는 당시 아버지의 묘를 풍수지리설에 맞춰 길지에 이장하였고, 아버지의 묘에 다닐 때 며칠씩 머무르기 위해 행궁을 지었다. 

봉수당은 정조 임금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연 곳으로 유명하다. 아들이 어머니의 회갑연을 연 것은 당연한 일인데, 백성들은 임금이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곳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연 것에 주목했다. 더군다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갑이었으니 비록 고인이 되었지만 아버지를 다시 세상 밖으로 불러온 일로 비치지 않았을까?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시비를 거는 무리들에게 함부로 덤비지 말라는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조 사후에도 잘 관리 되던 수원 행궁은 일제 때, 민족문화와 역사를 말살하려는 정책 때문에 경기도립병원으로 개축 사용되는 수모를 겪었고, 한국전쟁 때 크게 훼손된 것을 90년대 말에 복원공사를 거쳐 2003년에 현재 모습으로 재탄생하였다.

행궁 마당에서 봉수당 지붕 너머로 시설을 돌리자 팔달산 정상에 서장대가 보인다. 수원 화성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아야 한다. 성곽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것이 서장대에 오르면 수원 시내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다고 하니 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 / 박상대 기자
팔달산 위에 있는 수장대. 사진 / 박상대 기자

정조가 걷던 길서 정조의 향기를 맡다 
행궁을 둘러보고 돌아나와 오른쪽으로 10여 분 걸어가니 팔달문이 나온다.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기 위해 팔달문 안내소를 출발했다. 정조가 신하들을 대동하고 걷던 길이다. 성곽길을 오를 때마다 시야가 넓어지고 수원 시내가 더 넓어진다. 

서남각이다. 서남각류는 화양루로 불리던 곳이다. 임금은 이곳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을까? 

길가에 빨강 단풍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숲속에서 정조의 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성곽은 하얀 화강암으로 잘 정돈되어 있다. 어느 지점은 아름답고, 어느 지점은 웅장하다. 임금이 행차했을 때는 성곽 군데군데 초병이 서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초병을 대신하여 巡(순)이란 글씨를 담은 깃발이 대신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성곽의 길이는 5.7km, 면적은 37만㎡, 숲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묵묵히 서 있다. 어떤 나무는 정조의 손길이 닿았을 수도 있고, 더러는 정조가 직접 식수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부친의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서던 정조는 송충이들이 솔잎을 갉아먹어 나무가 앙상해진 것을 보고, 자신의 효성이 부족한 탓이라며 송충이를 잡아 삼켰다고 한다. 아버지의 묘역을 지키는 소나무 대신 자신의 창자를 갉아 먹으라면서. 그러자 어디선가 새들이 날아와 송충이들을 모두 잡아먹었다는 전설이 떠오른다.  

서장대안내소를 지나자 효원의 종이 있다. 안내소에서 1인당 2,000원을 내고 세 번 타종할 수 있는데 종을 치면서 효도를 다짐하고, 가족의 건강을 빌고, 나의 발전을 다짐하는 소원을 빌라고 한다.(이것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서장대 뒤편의 서노대. 사진 / 박상대 기자

5분여 걸어가자 서장대가 늠름한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수원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축물이다. 수원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에서 정조는 군사들의 훈련 상황을 점검하였다. 

정조는 수차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죄인인 사도세자의 아들이란 원죄 때문에 임금 자리에 앉을 때도 반대세력이 많았고, 보위에 오른 뒤에도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독살이나 저격의 위협에 시달리며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면서 돌파했다. 

강한 왕권은 강한 병권이 있어야 유지된다. 궁궐을 지키고 임금을 수호하는 경비부대원 3,800명이 이곳에서 함성을 지르며 훈련했다. 무예와 병법에 조예가 깊은 정조가 직접 군사훈련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그때마다 병사들의 함성이 천지에 진동했다. 마치 하늘에서 천둥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니 그 위용을 짐작할 만하다.

화서문을 지나 장안문에 이르렀다. 성곽 밖으로 야산과 언덕에는 억새꽃이 한창이고, 삼삼오오 나들이객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장안(長安)은 나라의 중심(서울)을 상징하는 말이다. 장안문이 북쪽에 있는 수원성의 정문이고, 남쪽에 있는 문이 팔달문이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수원천 위에 있는 화흥문. 그 아래 홍예로 연중 물이 흐른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사진 / 박상대 기자
수류정에서 본 용연. 당시 정조와 대신들이 뱃놀이를 했다고 한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장안문을 지나가자 북수문(화흥문)이 나타난다. 화흥문은 광교산에서 흘러내린 냇물이 흐르는 개울 위에 있다. 반원형 홍예 수문 여섯 개가 건축물을 받치고 있는 모양새다. 홍예 수문에서는 사계절 물이 흐르고, 홍수 때는 제법 큰 물줄기가 쏟아진다고 한다.

화흥문에서 몇 걸음 옮기자 동북각류 즉, 방화수류정(訪華隨柳亭)이란 근사한 건물이 멋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뜻을 지닌 아름다운 정자이다.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 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화성에서 가장 아름답고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는데 정자에 올라 성곽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용연이 눈에 들어온다. 정조는 이곳에서 활을 쏘고, 시를 쓰며 풍류를 즐기곤 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정조의 숨결이 느껴진다.

용연은 용머리 바위 아래에 커다란 연못을 파고, 그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은 당초 설계를 변경하여 정조가 직접 지휘해서 만들었는데 뱃놀이를 즐길 수 있을 만큼 큰 규모였다. 이때 정조는 “아름다움은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멋진 말을 남겼다. 아름다움과 평화가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설파한 것이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수원성의 정문 가운데 북쪽에 있는 장안문. 사진 / 박상대 기자
사진 / 박상대 기자
수원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방화수류정. 사진 / 박상대 기자

부모에게 효도하고 백성을 사랑한 임금
3년에 걸쳐 성곽을 완성한 정조는 백성들이 집집마다 부자가 되고 사람들이 서로 즐거워야 한다는 “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 여덟 글자를 강조했다!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지 않고 이웃이 서로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열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백성들에게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지를 만들어 주고, 농업용수를 저장하는 저수지를 만들어 농사에 이롭게 했다. 또 농사지을 때 필요한 소를 농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수원이 조선시대 이래 근대까지 우리 농업의 메카가 되게 한 시발점이었다. 그 덕분에 수원에 농업진흥청이 들어서고, 서울대 농대가 수원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성곽 안으로 팔도의 장사치들이 들어와 장사를 시작하면서 농업용 소를 서로 팔고 사는 우시장이 생기고, 시전 거리에서 농수산물이 거래되었다. 수원 갈비의 역사가 그 시절 늙은 소를 잡아 고기를 팔고, 구워 먹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수원 상인들의 상술이 이때부터 전국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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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을 도는 동안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마주하게 된다. 사진 / 박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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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과 행궁은 조선 정조 임금이 효를 실천한 과정에서 건축한 건축물이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수원화성의 4대문에는 각 성문마다 감동, 패장 등 공사 관계자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는 각자가 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수원성을 완공한 후 화성성역의궤를 썼다. 이 의궤에는 1796년 11월에 판중추부사 윤숙이 정조의 교서를 받들어 지은 화홍문의 상량문이 실려 있다. 

당시 윤숙은 눈병을 얻어 시력을 잃은 상태였고, 이후에 관직도 고사하고 집에 있었는데 정조가 상량문을 쓰게 했다. 정조는 친히 어찰을 써서 윤숙에게 보내 “병으로 집에 있지만 다른 사람보다 문장력이 뛰어난 줄 알고 있으니 이 건물에 대해 좋은 송축의 말이 없을 수 없다”고 하면서 상량문을 쓰게 했다는 것이다. 친히 상량문 쓰는 데에 필요한 자료까지 챙겨서 어찰을 보냈다니 군신간의 신의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윤숙은 상량문을 쓴 이듬해 3월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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