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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⑩] 낙동강 방어선의 첨병, 왜관철교 아래로 낙동강은 흐른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⑩] 낙동강 방어선의 첨병, 왜관철교 아래로 낙동강은 흐른다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 승인 2018.12.1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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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낙동나루에서 칠곡 왜관철교까지
금오산 품은 선산이 배출한 인물과 낙동강 방어선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강물은 상주와 구미를 거쳐 칠곡까지 흘러내려 왔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편집자 주
평생을 산천을 걸으며 보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신정일 대표는 낙동강을 세 번째 걷는다. 지난 2001년 9월, 517km의 낙동강을 걸었으며, 그로부터 여덟 해가 훌쩍 지난 2008년 60여 명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지난 2월부터 1년간의 일정으로 ‘우리 땅 걷기’ 회원 90여 명과 함께 ‘낙동강 1300리 길’을 걷고 있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라는 제목으로 낙동강 걷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여정을 연재한다.

[여행스케치=칠곡] 낙동강에서 가장 큰 나루였던 낙동나루를 지난 강물은 유유히 흘러서 낙정역 부근을 지난다. 옛날 이곳은 칠창부곡(漆倉部曲)이 있었고 칠창 북쪽에는 전북 임실 오수와 비슷한 전설이 있는 의구총(義狗塚)이 있다.

영남의 중심에서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한 곳
조선시대 수많은 길손들이 묵어갔던 미라원이 있었던 원촌(院村)에는 선산면 독동리의 고네미로 건너가는 여지나루가 있었고 찻길 너머에 일선현의 대문간 마을이 있다. 신라 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이라 일컬었던 이곳 선산군 해평면 일선리에는 일선현(一善縣) 터만 남아있다. 이곳에서 강 건너 금오산을 바라보며 선산과 금오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영남의 한복판에 있는 선산군, 산과 물이 서로 어울려 기세가 화합하고 정기와 맑음이 모여 대대로 뛰어난 인물이 났다”
조선 왕조 선조 때의 학자인 여헌 장현광이 그의 고향 선산을 자랑했던 말이다.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조선 인물의 반은 영남에서, 영남 인물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말했다. 그만큼 이곳에서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났다. 포은 정몽주로부터 학통을 이어 받은 고려 말의 삼은 중 한사람이었던 야은 길재도 이곳 선산군 고아면에서 태어났다.

서른여덟 살에 고려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낙향한 길재는 강호 김숙자 같은 제자를 길러냈고 김종직은 김숙자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무오사화 당시 함께 희생되었던 서른 세명의 선비들이 김종직의 제자들이었다.

사육신의 한사람이었던 단계 하위지는 선산읍 영봉마을에서 태어났고 조선 중종 때 반정공신이었던 성희안이 청송의 이름난 잣과 꿀을 보내달라는 청을 받자 “잣은 높은 산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으니 내가 어떻게 구하리요”라는 답장을 썼던 청송의 원이었던 정붕이 제자들을 길러낸 곳도 그의 고향인 선산이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선산 죽장사와 오층석탑.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금오산 아래 세워졌던 금오서원.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금오서원의 ‘칠조(七條)’ 현판과 그 해석이 걸려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신라 최초의 절로 지어졌던 선산 도리사
선산읍 죽장리에 죽장사 오층석탑은 신라시대 탑으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고, 원리에 금오서원(金烏書院)이 있다. 선조 3년(1570)에 금오산 아래에 서원을 세워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 말의 삼은인 야은 길재를 배향하고 금오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광해군 원년(1609)에 이곳으로 다시 옮겨 세우고 액자를 다시 썼으며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 등을 배향하였다.

산비탈을 이용하여 지어진 금오서원은 서원으로 들어서는 읍청루를 지나면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고, 강당인 정학당과 대성전 역할을 하는 상현묘 등 다섯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재미있는 것은 정학당의 대청 안쪽 벽에 걸려 있는 ‘칠조(七條)’라는 현판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과 벽에 낙서를 하거나, 책을 망가뜨리거나, 놀면서 공부를 안 하거나, 함께 살면서 예의가 없거나, 술이나 음식을 탐하거나, 난잡한 이야기를 하거나, 옷차림이 단정하지 않거나, 이 일곱 가지를 어긴 사람은 왔으면 돌아가고, 아직 오지 않았다면 오지 말라”

서원 앞으로 마을이 있고 마을 앞을 흐르는 감천이 멀리 보이는 낙동강을 향해 흐르고 있다.

선산은 신라 초기에 불교가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고장이다. 법흥왕 14년인 527년에 불교가 신라 국교로 공인되었으나 그 전까지만 해도 외래종교인 불교는 뿌리를 못 내린 채 박해를 받고 있었다.

불교가 공인되기 백 년 전에 위나라에서 온 한 스님이 있었다. 열아홉 살쯤 되었던 그 스님은 묵호자(墨胡子)라고 불리었는데 그 스님이 다녀간 뒤에 아도(阿道)라는 스님이 시종 2명과 함께 모례 장자의 집에 왔다. 모습이 묵호자와 닮았던 그 스님이 머무는 동안 그 마을에 질병이 없었다. 그는 지금의 선산군 도개면에 살았던 모례 장자의 집에서 머슴 일을 하며 밤에는 불법을 전하고 있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도리사를 지어 신라에 불교를 뿌리내리게 한 아도화상.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도리사 극락전 뒤로 돌아가면 독특한 양식의 석탑이 나타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그러던 어느날 아도가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갔다가 돌아와 냉산 밑에 이르니 눈 덮인 겨울이었는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해 있었다. 아도스님은 그곳에 절을 짓고 그 절의 이름을 ‘도리사’라고 지었다. 신라 최초의 절이 태어난 그 때가 신라 눌지왕 2년(418)이었다.

아도가 소 천 마리와 양 천 마리를 길렀다고 하는 곳을 지금도 쇠골이라고 부르며 신라 불교의 ‘길이 열린 곳’이란 뜻인 ‘도개’가 이 면의 이름으로 이어져 온다. 또 1975년에 이곳을 답사한 학자들이 모례의 집터로 어림되는 곳에 있는 털레샘(모례정)이 신라 초기의 우물임을 밝혀냈다. 도리사의 조사전에는 아도화상의 초상화가 있는데 절 둘레의 담을 보수할 적에 아도를 새긴 것으로 짐작되는 석상이 발견되었다.

신라와 고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간 이 절은 조선 숙종 때 불에 타 버렸고, 지금의 건물은 영조 5년에 아미타불상의 금칠을 새로 하여 유일하게 타지 않고 남아있던 금당암을 중심으로 해서 지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사는 터만 남았고 금당암이 지금의 도리사인 것이다.

도리사 극락전 뒤편에는 우리나라의 절 어디에서고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석탑 한 기가 있다. 기본형태가 방형인 이 탑은 지대석 위에 기단이 놓이고 그 위에 탑신부와 상륜 등이 중첩되었다. 전체 높이 3.3m이며 보물 제470호로 지정된 이 탑을 현지에서는 화엄석탑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고 다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이 신라의 불교에 씨를 뿌린 곳임은 도리사 둘레에 주륵사의 터, 석적사의 터, 죽림사의 터, 죽장사의 터, 보천사의 터 같은 대 가람터가 이어 확인됨으로써 더 분명해졌다.

인근 지역에 영향을 준 금오산 산세
도리사에서 나와 걷는 낙동강에는 몇 사람이 강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국고속철도 낙동강대교가 건설되고 있는 그 너머로 구미시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선산에 딸려있던 조그마한 마을이 산업화 속에서 전자산업도시의 중심이 되어 선산읍을 거느린 구미시로 탈바꿈되었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조그마한 마을이었던 구미는 전자산업도시의 중심으로 탈바꿈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이곳 선산 땅이 인물이 많이 태어난 곳임을 말할 때마다 이곳의 명산인 금오산과 이곳을 거쳐 흐르는 낙동강의 수려한 흐름도 함께 이야기된다. 금오산(金烏山)은 선산군 구미시와 금릉군 남면, 칠곡군 북삼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976m밖에 안되지만 옹골찬 바위로만 이루어진 벼랑이 많아 명산의 기개가 어려있다. 금오산의 본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으나 중국의 오악 가운데 하나인 숭산에 비겨 손색이 없다하여 남숭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금오란 이름은 이곳을 지나던 아도스님이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 즉 태양 속에 산다는 금오(金烏)가 나는 모습을 보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산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산마루인 현월봉에는 기암과 괴석이 늘어섰고 곳곳에서 물이 솟아 금오산 중턱에 높이가 38m인 명금 폭포가 있다. 해를 뜻하는 ‘금오’라는 이름이 붙은 것만 보아도 예로부터 존귀하게 여기는 대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이 산은 현재 구미시에 속해 있지만 선산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산이다.

금오산에 학문이 높은 사람과 명필이 많이 난 이유가, 선산에서 바라보면 붓끝같이 보이는 금오산 봉우리 덕이라는 말도 있다. 이곳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필봉’이라고도 부른다. 반면 개령 지방에서 보면 금오산 산봉우리가 무엇을 노리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적봉’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개령 지방에서 큰 도적이 많이 났거나 모반이 자주 일어났다고 풀이되기도 한다. 또 김천에서 보면 노적가리처럼 보인다고 해서 ‘노적봉’이라 부르며, 구미시 인동에서 보면 관을 쓴 것 같아서 ‘귀봉’이라고 하는데, 예로부터 이곳에서는 큰 부자와 높은 관리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성주 지방에서 보면 여자처럼 보여 ‘음봉’이라 부른다. 그래서 그런지 나라에서 쓰고 있는 관비는 성주에서 많이 뽑혔고 성주 기생이 이름이 난 것도 금오산의 산세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칠곡 왜관으로 가는 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전쟁의 포화가 빗발쳤던 낙동강 방어선에서
석적읍에 조성된 제방 둑을 따라가자 낙동강왜관전적기념관에 이른다. 1950년 6월 25일 칠흙 같은 어둠 속 내리퍼붓던 빗줄기 속에서 시작된 한국전쟁이 시작된 뒤 계속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7월말 낙동강을 건넌 뒤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우리들의 후방에는 더 이상 물러설 방어선이 없다. 우리 부대들은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 균형을 깨뜨리기 위하여 끊임없이 역습을 감행해야 한다...... 부산으로 철수하다는 것은 사상 최대의 살육을 의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우리들은..... 차라리 같이 싸우다가 죽을 것이다”

7월 29일 유엔군 총사령부의 사령관이었던 워커 중장은 상주에 있던 미군 제25사단 사령부에서 각급 참모들을 모아놓고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해야 하는 당위성을 이렇게 비장하게 천명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은 칠곡군 왜관읍을 꼭짓점으로 북쪽으로 동해안의 영덕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낙동강 본류가 남강과 합류하는 경남 창녕군 남지읍에 이르러 총 길이 240km에 달했다. 방어선 안에 연합군의 중요 보급기지였던 부산, 마산, 대구, 영천, 포항 등이 있어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 절명의 방어선이었다.

왜관 작오산에서 마산과 진해로 이어지는 낙동강 서부 방어선은 미군이, 왜관과 영덕에 이르는 동부 전선은 한국군이 맡도록 했는데, 그 당시 8월 16일에 이곳에 북한군 4만명이 집결해 대규모 도하 작전을 벌여 곧 왜관이 함락될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워커 중장은 일본에 있던 맥아더 원수에게 2차 대전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사용했던 ‘융단 폭격’을 해주도록 급히 요청했다. 이날 오전 11시 58분에 일본 요꼬다와 가네다에서 출발한 B29 비행기 98대는 왜관에 있던 북한군 진지를 향해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26분 동안에 퍼부은 폭탄이 무려 960톤에 이르렀다. 이 폭격으로 강을 건너기 위해 모여 있던 북한군 4만명 중에 적어도 3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병사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뒤덮었고 낙동강은 붉은 핏빛으로 물든 채 흘러갔다. 1초에 스무 명, 1분에 1150명꼴로 북한군이 폭사한 셈이었다. 이 폭격으로 국군과 미군이 대구를 방어할 수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가 이루어졌다. 왜관전투를 고비로 하여 전황이 점차로 역전되어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졌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왜관 전투는 한국 전쟁사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 상황을 지켜보았던 왜관철교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낙동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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