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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대가야는 살아있다’, 겨울잠 자는 가야사... 봄에는 깨어날까? 
‘대가야는 살아있다’, 겨울잠 자는 가야사... 봄에는 깨어날까? 
  • 조용식 기자
  • 승인 2019.01.04 1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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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사, 삼국시대에서 사국시대로 표기해야
대가야 백제로 영토 확장하며, 맹주 역할
9줄에 불가한 대가야 연대기, 가야사 복원 절실 
700여 기의 고분군이 자리한 고령 지산동 대야가고분군. 겨울잠을 자는 대가야, 봄에는 깨어나 520년의 역사를 말해줄 수 있을까? 사진 / 조용식 기자

[여행스케치=고령] 고령의 대가야 역사는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와 더불어 여전히 고분 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다. 크고 작은 700여 기의 고분이 분포된 경북 고령 지산동 대가야고분군은 언제쯤 깨어나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고증할 수 있을까? 

1560년경, 영남학파의 거봉인 남명 조식 선생이 대가야 왕릉을 보고, “산 위에 저게 뭣꼬!”라며 놀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주산의 서남쪽 산등성이와 산록을 중심으로 고아리 고분군 뒷산의 정상부까지 분포해 있다.

400년 이후, 맹주 역할을 했던 대가야... 백제로 영토 확장
“처음에는 금관가야가 힘이 셌지만, 400년 이후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맹주 노릇을 하게 됩니다. 도읍지인 고령에서 진안, 장수, 임실, 남원까지 크게 영역을 차지했으며, 52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가야에 대한 역사 기록이 없고,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가야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모른다’는 말이 맞습니다.”

대가야박물관에 전시된 토기로 보는 대가야의 영역 지도. 사진 / 조용식 기자
700여 기의 고분 중에 가장 높이 있는 것이 당시 왕의 무덤일 것을 추정하고 있다. 사진 / 조용식 기자
1977년 발견된 지산리 44호분을 설명하는 성정자 고령군 문화관광해설사. 사진 / 조용식 기자 

이렇게 베일에 싸였던 가야의 역사는 “지난 1977년 고령에서 순장 무덤 44호가 발견되면서 학계에서 관심을 가지고 가야사를 연구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성정자 고령군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이다. 

순장이란 왕이나 높은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강제로 죽여서 함께 묻어둔 장례풍습을 말한다. 

지산리 44호분은 주산의 남쪽 능선 위에 위치한 고분으로 밑지름이 27m에 이르며, 가운데에 왕이 묻힌 큰 돌방이 있고, 그 남쪽과 서쪽에 부장품을 넣는 딸린 돌방이 2개 있다. 32개의 순장자 무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은 40명 이상이 한꺼번에 묻힌 왕릉으로 추청하고 있다.

순장묘, 왕과 함께 살아있는 사람도 강제로 죽여서 묻는 장례풍습
그렇다면 고령 지산동 대가야고분군에 있는 700여 기의 고분이 전부 순장묘일까? 그렇지 않다. 왕이나 높은 사람의 경우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봉분이 크고 높았다.  

봉분이 큰 고분을 따라 밑으로 내려갈수록 작아지는데, 이는 귀족들의 고분이라는 것이 성정자 해설사의 설명이다. 대가야 무덤은 주로 뒤에는 산성이 있고, 앞에는 마을과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와 산줄기에 위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가야 시대의 순장묘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만들어졌다.

1단계 - 무덤 위치 선정 및 무덤 구덩이 파기

▲무덤 위치 선정 및 무덤 구덩이 파기 - 왕이 죽으면 왕릉을 만들 위치를 정하고 주변을 잘 정비한다. 가운데에는 왕이 묻힐 큰 돌방과 그 옆에 껴묻거리(죽은 이를 장식하거나, 죽은 이가 사후세계에서도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물건들을 함께 묻는 것)를 넣을 딸린 돌방을 만들고 그 둘레에 순장자들의 무덤구덩이를 판다.

2단계 - 무덤방의 둘렛돌 쌓기

▲무덤방의 둘렛돌 쌓기 - 그런 다음에는 주변의 채석장에서 돌을 깨어와 돌방과 돌덧널에 둘렛돌을 쌓는다. 더불어 무덤 주위에는 둥글게 돌을 돌려 무덤 구역을 표시한다. 그리고 완성된 무덤방 속에 왕과 순장자들을 꺼묻거리와 함께 넣는다. 

3단계 - 시신과 꺼묻거리를 넣은 후 덮개돌 덮기

▲시신과 꺼묻거리를 넣은 후 덮개돌 덮다 – 왕과 순장자의 시신을 넣은 후 미리 준비해 둔 덮개돌을 덮는다. 그 후 무덤 앞에서 풍성한 제사상을 차린 후 제의를 지낸다.

4단계 - 봉분 만들기

▲봉분 만들기 – 제사에 사용된 토기와 음식을 무덤 주위에 흩뿌리고 무덤방 위로 봉토를 쌓기 시작한다. 봉토를 쌓을 때는 일정한 두께로 흙을 편편하게 쌓아서 다지는 과정을 반복하여 무덤을 완성한다.

9줄에 불가한 대가야 연대기, 가야사 연구 복원 필요
지산동 44호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대가야는 백제, 중국, 왜와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는 물론 중국과 왜와도 문물을 교류하며 발전했다. 사진 / 조용식 기자
대가야의 왕이 쓰던 왕관인 금관과 금동관. 사진 / 조용식 기자
대가야의 대외교류를 소개하는 안내문. 사진 / 조용식 기자

백제와의 문화적 교류는 등잔과 청동합 및 고아동벽화고분 등이 있으며, 일본 각처에서 출토된 대가야계 토기, 갑옷, 투구, 야광조개국자 등은 왜와의 활발한 교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가야 연대기에 기록할 만한 내용은 9줄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① 42년 대가야의 탄생과 함께 소개된 건국신화, ② 400년 가야·백제·왜가 서로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했으며, ③ 479년 하지왕이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본국왕’이라는 작호를 받은 기록이 있다.  

④ 481년 고구려와 말갈군이 신라를 공격하자 대가야와 백제가 신라를 구해줌 ⑤ 이뇌왕이 신라 왕족 여자와 결혼함 ⑥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고, ⑦ 551년 우륵과 그 제자들이 신라의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수모를 겪었다. 

⑧ 554년 백제와 힘을 합쳐 관산성에서 신라와 싸웠으나 패배하였으며, ⑨ 562년 제16대 도설지왕이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멸망하며 520년의 대가야 역사는 끝을 맺는다. 

대가야 연대기는 단 9줄에 불가하다. 사진 / 조용식 기자
오는 2월 17일까지 전시하고 있는 전북의 가야이야기. 사진 / 조용식 기자
대가야 왕릉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관람객들. 사진 / 조용식 기자

대가야 연대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가야 시대의 사료나 문헌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분봉에서 나온 유적과 유물로 가야역사의 흔적을 찾아내야 한다는 설명이다. 

지난 2017년 6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연구 복원은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라며 “국정기획위가 정리 중인 국정과제로 포함시켜주면 좋겠다”는 발언으로 가야사 복원 작업이 탄력을 받는 모양새다. 

현재 25개 시·군이 참여한 가야문화권 지역발전 시장·군수협의회의 곽용환(고령군수) 의장은 “2019년인 올해에는 ‘가야문화권 개발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꼭 제정돼 국가 균형발전과 영·호남 상생발전을 앞당기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가야박물관의 내부에 설치된 조형물에는 '대가야는 살아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사진 / 조용식 기자
대가야박물관 전경. 사진 / 조용식 기자
오는 4월 개장 예정인 대가야생활촌의 모습. 사진 / 조용식 기자

대가야박물관 기획전시실(1층)에서는 ‘전북의 가야이야기’라는 주제로 남원, 장수, 임실, 진안 등 전북지역에서 출토된 가야 유물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이는 전시를 하고 있다. 대가야가 백제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는 실체를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 전시이다. 이번 전시는 전북의 가야와 고령의 대가야가 1500년의 세월이 지난 뒤 다시 만나는 역사적인 만남의 장이기도 하다.

한편, 한편, 오는 4월 개장 예정인 대가야생활촌은 영상관, 건국신화공원, 불묏골(철기 제련), 한기촌(숙박체험마을), 고분전시관, 주산성, 메나리골(용사체험), 토기공방촌 등 다양한 전시·체험시설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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