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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⑪] 금호강 만난 낙동강은 계속하여 남으로 남으로 흐른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⑪] 금호강 만난 낙동강은 계속하여 남으로 남으로 흐른다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 승인 2019.01.1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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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왜관에서 고령과 대구까지 이어가는 길
대구 서부에서 합류하는 금호강 물줄기
고령을 지나며 가야의 흔적을 묻는다
왜관철교를 지난 낙동강은 달성으로 향해간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왜관철교를 지난 낙동강은 달성으로 향해간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편집자 주
평생을 산천을 걸으며 보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신정일 대표는 낙동강을 세 번째 걷는다. 지난 2001년 9월, 517km의 낙동강을 걸었으며, 그로부터 여덟 해가 훌쩍 지난 2008년 60여 명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지난 2월부터 1년간의 일정으로 ‘우리 땅 걷기’ 회원 90여 명과 함께 ‘낙동강 1300리 길’을 걷고 있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라는 제목으로 낙동강 걷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여정을 연재한다.

[여행스케치=달성] 한 발 한 발 걸어서 천리, 만리를 걸어간다. 가능은 하지만 걷기는 매일 매일이 새로운 것처럼 숙달되지 않고 항상 다리가 아프다. 그런데 가끔은 통증을 잊어버리고 그저 습관처럼 한발 한발 앞서간 사람들을 따라갈 때가 있다. <연필의 역사>를 지은 한트케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걷는다-멈춘다-걷는다, 이것이 이상적인 존재 방식이다

사육신의 흔적 남은 달성군
강물을 따라 한 발 한 발 내딛는 여정은 이제 낙산리에 접어들고, 가까운 곳에 위치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유적이 있다.

먼저 사육신기념관이 있는 묘골아름마을에는 사육신의 3대 정문인 삼충각(三忠閣)이 있고, 북쪽에는 보물 제554호로 지정되어 있는 태고정(太古亭)이 있다. 본래는 부헝골에 99간으로 지었던 것인데, 조선 명종 10(1555)에 참봉 박계창(朴繼昌)이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지금은 24간만 남아있다. 정자에는 사방이 7치 되는 옥돌 12개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친필이라는 태고정 현판과 초천자(草千字)가 있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낙동강과 좀 더 가까운 곳에도 낙빈서원(洛濱書院)과 삼가헌, 하엽정 등이 있다. 낙빈서원은 숙종 4(1678)에 창건하여 사육신인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배향하였는데, 숙종 20(1694)에 사액되었다. 서원 인근의 삼가헌(三可軒중요민속자료 제104)은 박팽년의 11대 손인 박성수가 1747년에 세운 것이고, 하엽정은 원래 이곳에 있던 파산서당을 개축한 것이다.

보물 제554호로 지정되어 있는 태고정.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보물 제554호로 지정되어 있는 태고정.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하엽정으로 향하는 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하엽정으로 향하는 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아름다운 하엽정 누마루에서 바라보는 연못 풍경이 사뭇 운치가 있다. 연당은 본채를 지을 때 필요했던 흙을 파낸 자리를 손질하여 만든 것으로, 세로로 긴 장방형의 못 가운데는 동그란 섬이 있다. 조선시대 정원을 세울 때 대부분이 이런 형태를 취했는데, 방형의 못은 땅을, 원형의 못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동양적 우주관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엽정에서 나와 금남리에서 성주대교까지 낙동강 길은 더 없이 아름답고, 성주대교 근처 하목정(霞鶩亭) 마을에 아름다운 정자 하목정이 있다. 조선 제19대 숙종이 순시 도중 이 정자에 둘러 쉬면서 앞뒤 경치를 칭찬하며 친필로 하목정이라 써주었다고 한다.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의 11대 손인 박성수가 세운 삼가헌.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의 11대 손인 박성수가 세운 삼가헌.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아름다운 못을 지닌 하엽정.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아름다운 못을 지닌 하엽정.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금호강을 마주하다
달성군 다사면 문산리로 건너가는 논실나루터를 지나 곽촌동(藿村洞)에 이른다. 강변에 포플러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고, 이곳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두 번째로 긴 지류인 금호강(琴湖江)이 합류한다.

유로연장이 117.5km고 유역면적이 2,053인 금호강은 포항시 죽장면 가사리 가사령(佳士嶺)에서 발원한다. 영천시 금호읍을 지나 경산시의 북부를 뚫고 대구시 동쪽에서 북쪽을 둘러 서쪽으로 활 모양을 이루면서 달성군 성서면 파호동(巴湖洞)에서 낙동강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에는 금호강에 대한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금호(琴湖)는 영천시 서쪽 6km 지점에 있는데 금호읍 남쪽과 북쪽이 구릉지로 호수와 같아 갈대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 비파소리와 같은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하여 금호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에는 4대강 사업으로 강정 고령보가 만들어졌고, 금호강이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두물머리를 바라보는 곳에 화원관광지가 있다.

1940년 나무를 심어서 유원지를 만든 화원유원지(花園遊園地)는 사방이 틔어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신라 때에 선덕여왕이 이곳에 와서 놀았고, 둘레에 신라 고총이 많이 있으며, 이조 때에는 봉수대를 두어서 성주(星州), 덕산(德山)의 봉화를 받아 마천산(馬川山) 봉수에 응하였다.

4대강 사업 이후 자전거길 정비된 낙동강 변.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4대강 사업 이후 자전거길 정비된 낙동강 변.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화원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금호강 합류지점.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화원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금호강 합류지점.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옛 이름이 달구화, 또는 달구벌이라는 이름의 부족국가였던 대구가 지금의 이름으로 명명된 것은 신라 경덕왕 때인 737년이었다. 조선시대인 1601년 경상좌도와 경상우도가 합쳐지면서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었고, 그 뒤 300여 년간 경상도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화원유원지에서 강이 휘돌아가는 자리에는 옛날 사문진 나루가 있었다. 지금은 그 나루터에 사문진(沙門津)교가 서있고 그 아래 강물이 여울져 흐르는 곳에서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고령을 바라보며 가야를 떠올리다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월성리로 향한다. 강 건너 본리동(本里洞)은 시내가 옥빛같이 맑으므로, 옥개, 옥계 또는 옥포라고 하였는데, 조선시대 때 이곳의 이름을 따서 옥포면이 되었다.

차남마을을 지나 인봉산 아래 산길을 지나면 노강서원(老江書院)이 있는 놉닥마을에 이른다. 숙종 3(1712)에 창건된 서원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봉안하고, 뒤에 수암 권상하(權尙夏), 남당 한원진(韓元震), 병계 윤봉구(尹鳳九), 금곡 송환기(宋煥簊)를 추배했다. 놉닥마을에는 노론(老論)들이 많이 모여 살았으므로 노다(老多)라 하였는데, 그 말이 변하여 놉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구의 서쪽을 흐르는 낙동강변에 자리 잡은 고령은 조선 전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김종직의 고향이기도 하다.

대가야의 지역이었던 고령 부근을 흘러가는 낙동강.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대가야의 지역이었던 고령 부근을 흘러가는 낙동강.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김종직이 풍속이 순박하니 백성들의 삶이 조용하다라고 노래한 고령의 형세를 두고 금유는 두 줄기의 물이 남쪽을 둘러 있고 여러 봉우리가 북쪽으로 읍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고령은 옛 가야국 지역으로 오랜 옛날부터 낙동강을 중심으로 터를 잡았던 마을들이 점차 부족국가 의 형태를 띠면서 6가야를 이루었다. 김해 지방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진주 또는 상주군 함창 지역의 고령가야, 고성의 소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그리고 고령의 대가야다.대가야는 신라 유리왕 18(42)에 이진아시왕이 세운 부족국가로, 500년경부터 세력을 떨쳐 금관가야가 망하고 난 뒤 침체했던 가야의 역사에서 새로운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16대 임금인 도설지왕 때인 562년에 마지막으로 신라에 정복됨으로써 가야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역사학자 천관우는 일찍이 가야국이 문화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정치도 발전하여 삼국 초기에 이미 왕관을 만들 만큼 국가 체제를 갖춰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는 신라와 맞서 난형난제의 세력을 이루었던 만큼 당시를 고구려, 신라, 백제와 북쪽의 부여를 포함하여 5국시대로 볼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그는 초기 가야국의 중심이던 금관가야가 급격하게 쇠망한 것도 김해를 터전으로 삼았던 그 지배세력이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인 듯하다고 추정하였다. 가야는 중국 대륙의 산업이나 전투기술을 포함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는 길목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의 땅이었던 고령은 신라 진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어 고양군이 되었으며, 고려 현종 9(1018)에는 영천현이 되어 지금의 성주인 경산부에 속하였다. 그러다가 조선 태조 3(1395)에 고양군과 영천현에서 한 자씩 따서 고령현이 되었고, 1914년에 실시된 부군 통폐합에 따라 고령군이 되었다. “고을이 여러 갈래로 난 큰길가에 있어 시신들의 행렬이 잇따르므로 아전들은 맞이하고 보내느라 괴로워하며 이바지하느라 고달픔을 겪었다라고 기록한 조위의 기문처럼 고령은 예로부터 사통오달의 요충지라 교통이 번잡하였다.

강 동쪽으로는 낙동강 발원지에서 355km 지점인 달성군 논공읍이 있다. 남은 거리 162km, 헐렁하게 두 구간이면 그리운 을숙도에 가 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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