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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11월호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⑬] 사라진 가야국 땅을 지나 사라져가는 길을 보며 걷는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⑬] 사라진 가야국 땅을 지나 사라져가는 길을 보며 걷는다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 승인 2019.02.1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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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척경비부터 가야국의 흔적까지
사라져가는 길 앞에 두고 떠오르는 세월의 무상
창녕과 영산을 지나 남강을 받아들이는 낙동강
낙동강 창녕 구간을 건너면서 가야국과 남강에 얽힌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낙동강 창녕 구간을 건너면서 가야국과 남강에 얽힌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편집자 주
평생을 산천을 걸으며 보낸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신정일 대표는 낙동강을 세 번째 걷는다. 지난 2001년 9월, 517km의 낙동강을 걸었으며, 그로부터 여덟 해가 훌쩍 지난 2008년 60여 명과 함께 이 길을 걸었다. 다시 10년이 흐른 지난 2월부터 1년간의 일정으로 ‘우리 땅 걷기’ 회원 90여 명과 함께 ‘낙동강 1300리 길’을 걷고 있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라는 제목으로 낙동강 걷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여정을 연재한다.

[여행스케치=창녕] 삼한시대에 불사국(不斯國)의 땅이었던 창녕은 신라 진흥왕 16년에 신라에 합병되었으며,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火郡)이라 불렀다. 경덕왕 때 화왕군(火旺郡)으로 개칭했다가 고려 태종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창녕을 지나며 놓치지 말아야할 것들
창녕읍 교상동에 있는 만옥정이라는 작은공원에는 대원군의 척화비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신라시대의 석탑 그리고 진흥왕의 척경비(拓境碑)가 있다. 이중 척경비는 1914년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창녕의 고적을 조사하러 왔던 도리이가 비석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보고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비문의 첫 머리에 적힌 신사년 21을 근거로 하여 척경비가 세워진 때를 신라 진흥왕 22년인 561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세운 최초의 비인 평남 용강군 점제현의 신사비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비인 셈이다. 이 비는 화왕산 기슭에 묻혀 있다가 발견되었다. 두께가 30cm에 높이가 178cm. 자연 그대로의 화강암에 23줄을 한문으로 새긴 이 비의 비문은 진흥왕이 나라 안을 살피고 다닌 발자취와 그를 수행했던 42명의 신하의 이름이 위계에 따라 차례차례 기재되어 있다.

진흥왕 척경비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비일 수도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진흥왕 척경비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비일 수도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가야국 고분군. 낙동강을 잠시 벗어나 이곳들을 들러보지 않을 수 없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가야국 고분군. 낙동강을 잠시 벗어나 이곳들을 들러보지 않을 수 없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한편 창녕에는 가야무덤군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모두 허울만 멀쩡할 뿐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다. 조선 총독부에 제출된 <창녕 고분도굴 조사 보고서>다른 유물들은 고사하고라도 유독 고분만은 놀랍게도 이백 채가 넘는 것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대부분이 도굴의 난을 입은 일은 유감스럽기 이를 데 없다라고 적혀있는 것처럼, 일본인들뿐만이 아니라 해방이 된 뒤에도 도굴꾼들의 끈질긴 도굴이 그치지 않아 그야말로 토기 한 개까지도 남기지 않은 채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 식민지 시대 이 땅의 민중들은 일본에 복속당한 가야의 왕들이 일본의 왕들에게 엎드려서 조공을 바치는 치욕의 역사를 배웠다. 그렇듯 6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가야의 역사는 잃어버린 왕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진주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고령의 대가야 등 6가야의 동맹체들이 미궁 속으로 숨어들고 말았고,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가야시대의 금관을 비롯한 금동장신구 가야 토기들을 숱하게 만날 수 있으니 역사는 항상 이긴 자의 것이라는 말이 만고의 진리인지도 모른다.

발길을 돌려 하병수 가옥과 술정리 3층석탑을 찾아가는 길은 어린 시절의 고향집 돌담길을 연상케 하는 묵은 길이다. 1969년에 중요민속자료 10호로 지정된 술정리의 하병수 가옥은 오백여년 전에 지어진 것이다. 그 후로 지금까지 이 집은 해마다 지붕을 갈은 것 외에는 거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억새로 지붕을 얹었고 대개의 조선집에 흙을 바른 것과는 달리 듬성듬성 대나무로 엮었다. 지붕이 가벼워 들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칡넝쿨로 서까래를 묶었다. 그래서 마루에 누워 지붕을 올려다보면 저절로 참을 수 없는 집의 가벼움이 실감이 나는 집이다. 정남향으로 지어진 이집은 네 칸으로 동쪽에서부터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이 차례로 붙어 있으며 못은 한 개도 쓰지 않았다.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하병수 가옥.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하병수 가옥.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국보 제34호인 술정리 동삼층석탑의 모습.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국보 제34호인 술정리 동삼층석탑의 모습.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그곳에서 술정리 동삼층석탑이 멀지 않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인 술정리의 탑은 기단과 탑신의 균형이 안 맞고, 탑신이 단정 명쾌하며 석재의 가공 또한 예리하고 정밀하다.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비길만한 이름난 탑의 하나로서 국보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사라져가는, 잊혀져가는 길을 걷는 빛나는 시간
창녕의 이곳저곳을 답사하고 난 후, 다시 낙동강을 따라 이어가는 여정은 창녕군 남지읍에 이른다. 창아리 나루터를 지나 아지리 사람들이 남지장 보러 가던 길이 보인다. 바위벼랑을 정으로 쪼아 만든 그 길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다.

이제는 자동차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 옛날 다녔던 이 길을 잊어 버렸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도 길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존재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한 사람 지나갈 정도의 길. 예전에는 이 길을 나귀타고 가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소를 팔러 가기도 하고, 송아지를 사서 가슴 졸이며 돌아오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벼랑길을 개나 다닐 정도의 길이라 하여 개비리 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같이, 첫 사랑의 기억처럼 감미로운 옛 길 중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길은 얼마나 많을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낙동강은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나 세월의 무상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유장하게 흐르고만 있다.

개나 다닐 정도의 길이라 하여 '개비리 길'이라 불렸던 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개나 다닐 정도의 길이라 하여 '개비리 길'이라 불렸던 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벼랑 옆에 겨우 난 길이지만, 옛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장터를 오고 갔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벼랑 옆에 겨우 난 길이지만, 옛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장터를 오고 갔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에서 태어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사라져 가는 우리

그 사이의 빛나는 시간이 우리의 일생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이다. ‘사라져 버려서 없다, ‘가지 말라고 말렸던 길. 그 보석 같은 길을 걸은 기억들이 어쩌면 먼 훗날 내 인생의 빛나는 시간중의 귀중한 시간으로 기억될 지도 모른다.

드디어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에 있는 창진(창나리)에 도착한다. 창진나루에서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로 건너는 나루를 거던강 나루라고 부르고, 이곳에서 낙동강은 남강(南江)을 받아들인다.

낙동강으로 접어드는 남강변에 서서
낙동강을 벗어난 이야기지만, 남강을 마주한 자리에서 남강변이 배출한 인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뼈대 있는 고장을 이를 때 좌 안동, 우 함양이라고 부른다. 낙동강의 동쪽인 안동은 훌륭한 유학자를 많이 배출한 땅이고, 낙동강 서쪽인 함양 등지에도 빼어난 인물들이 많이 태어났다는 설이다.

남강 자락에 뛰어난 인물이 배출된 이유는 빼어난 산세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 자락에서 발원한 남강은 산청 즈음에 이르러서는 경호강으로 불리다가,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되어 시천면을 거쳐 온 덕천강을 만나면서 다시 남강으로 불린다. 그리고 그 시천면에는 남명 조식을 모신 덕천서원이 있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큰 유학자인 남명 조식은 과거공부보다 경사와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힌 인물이다. 남명이 그의 제자 덕계 오건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한평생 간직한 장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책 읽는 것뿐이었다. 그러한 내가 성리를 논변한다면 어찌 남에게 뒤지겠는가?’하고 자부한 것으로 비추어 볼 때 남명의 독서량은 일반 성리학자들의 추종을 불허 할 만큼 방대한 것이었다.

남명의 학식과 명망이 높아지자 회재 이언적과 퇴계가 남명을 왕에게 천거하였으나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이가 지긋해지자 지리산 천왕봉 아래 덕산에 산천재를 지어 학문에 열중하며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 뒤로도 남명에게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지만 끝끝내 나아가지 않고 백면서생으로 살았던 대쪽 같은 인물이다.

남강이 지나는 의령군 정곡면에 있는 삼성 창업자 故이병철의 생가.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남강이 지나는 의령군 정곡면에 있는 삼성 창업자 故이병철의 생가.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창녕군 남지읍 인근에서 남강의 흐름이 낙동강과 합쳐진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창녕군 남지읍 인근에서 남강의 흐름이 낙동강과 합쳐진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또한, 남강이 그윽하게 펼쳐놓은 땅 진주에는 의기 논개의 자취가 남아 있다. 현재의 장수군 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난 논개는 아버지를 일찍 잃고 숙부의 집에 의탁되었다. 그러다 숙부가 논개를 첩으로 팔려고 하자 어머니와 함께 장수 현감 최경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여 재판을 받게 되었다. 무죄로 풀려난 논개는 의지할 곳이 없어 최경희의 후실로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희는 진주성 싸움에 투입되었고, 성이 왜군에 함락되자 김천일과 함께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이에 논개는 스스로 기생이 되어 촉석루 잔치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남강가의 바위로 유인, 그의 허리를 껴안고 남강에 빠져 순절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20이었다.

그 후 조정에서 논개가 뛰어든 바위에 의암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진주의 촉석루 곁에 논개사당을 지었다. 그리고 1955년에는 장수에 의암사라는 논개의 사당이 지어졌고, 그가 태어난 주촌마을 생가에는 논개 동상도 세워져 있다.

낙동강 1300리 물길 중 가장 큰 지류인 남강변에서 세계 속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는 삼성과, 엘지, 그리고 효성그룹을 일군 사람들이 태어났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강은 유장하게 흘러서 남지읍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갔고, 갈꽃이 눈부시게 핀 강변에는 유난히 강물이 푸르고 잔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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