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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10월호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 효창원에 잠든 삼의사 중 하나…정읍의 독립운동가, 구파 백정기는 누구인가?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 효창원에 잠든 삼의사 중 하나…정읍의 독립운동가, 구파 백정기는 누구인가?
  • 유인용 기자
  • 승인 2019.03.06 1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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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가 효창원에 안장한 독립투사 3인 중 한 명
정읍에 기념관 및 영정 모신 사당 있어…
3대 의거 중 하나로 꼽히는 육삼정 의거의 주역
사진 / 유인용 기자
서울 효창원에 안장된 삼의사묘역. 맨 왼편은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여행스케치=정읍]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3월의 어느 날, 서울 용산구의 효창원을 방문했다. 해방 이후 조국으로 돌아온 김구 선생은 자신의 지휘 하에 의거에 뛰어들었다가 타지에서 목숨을 잃은 독립투사 3인의 유해를 이곳에 안장했다. 이 '삼의사묘역'의 주인공은 윤봉길, 이봉창 그리고 백정기 의사다.

세 명의 의사 중 백정기(白貞基, 1896~1934) 의사는 그 이름이 다소 낯설다. 삼의사묘역의 가장 오른편에 자리한 백정기 의사의 묘소를 눈에 담으며 그의 삶을 따라가 봤다. 그의 유해는 서울에 잠들어있지만 백정기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유품이 전시된 기념관은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정읍에 자리한다.

부호 자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빈농의 아들
백정기 의사는 1896년 전북 부안의 한 농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2살이 되던 해 정읍으로 이사했다. 백 의사는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총명했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공부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당시 정읍의 부호였던 조성승이 백정기 의사의 영특함을 미리 알아봤다. 조성승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백정기 의사를 자신의 딸과 혼인시키고 백 의사가 영주정사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영주정사는 이른바 ‘천석꾼’, ‘만석꾼’으로 불리는 당대 호남 지역의 최고 부잣집 자제들이 학문을 닦던 곳이다.

사진제공 / 백정기의사기념관
백 의사가 어린 시절 공부하며 인맥을 쌓은 영주정사. 기념관에서 차량으로 20분 거리에 있으며 등록문화재 제212호다. 사진제공 / 백정기의사기념관
사진 / 유인용 기자
지난 2004년 복원된 백정기 의사 고택. 사진 / 유인용 기자
정읍 백정기의사기념관 내에 백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 의열사. 백 의사의 영정 앞에 향을 피우며 그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린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정읍 백정기의사기념관 내에 백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 의열사. 백 의사의 영정 앞에 향을 피우며 그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린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이후식 정읍시청 문화관광해설사는 “영주정사는 백정기 의사가 어린 나이부터 항일 의식에 눈을 뜬 계기가 된 곳”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때 영주정사에서 만난 선배들이 훗날 동아일보를 창간한 김성수,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주었던 박승규 등”이라며 “선배들이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찾고 독립해야 한다’고 수 차례 주창했고 백 의사도 자연스레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당시 백 의사가 살던 마을에는 물레를 이용해 실을 뽑는 가내수공업을 하는 집이 많았다. 하루는 일본 경찰이 마을의 한 농가에서 물레를 부수고 길쌈하는 아낙네를 희롱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백정기 의사는 일제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경찰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백정기 의사는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된다.

Info 효창공원
조선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의 묘를 비롯해 왕실의 묘역이 있던 곳.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이 묘들을 현재의 경기 고양시 서오릉으로 옮기고 효창원을 공원으로 바꿔버렸다. 삼의사와 백범 김구, 임정 요인 3인(이동녕‧차리석‧조성환)의 묘가 안장돼 있으며 백범김구기념관이 있다. 3.1운동 100주년인 올해를 기점으로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다시 조성될 예정이다.
주소 서울 용산구 효창원로 177-18

조국 독립을 향한 염원
정읍과 서울, 인천 등을 오가며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백정기 의사는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로 인해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1921년 중국으로 망명한다. 이때 북경에서 만난 인물이 바로 우당 이회영과 단재 신채호다. 두 인물의 공통점은 무정부주의자였다는 것. 이들의 영향을 받은 백정기 의사도 무정부주의를 주창하게 된다.

망명 후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간 백정기 의사는 1923년에는 영주정사에서 만난 지인 고희석 선생에게 독립 자금을 조달해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백 의사의 친필로 두 장을 빼곡하게 채운 이 편지는 정읍의 백정기의사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백 의사의 유품인 편지와 나무도장.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정읍의 백정기의사기념관에서는 백 의사의 항일활동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이후식 해설사는 “백정기 의사는 주로 해외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유품이라곤 이 편지와 나무도장 한 개가 전부”라고 설명한다.

백정기 의사는 일제의 눈을 피해 타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길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1924년 의거를 준비해 떠난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조선인에 대한 학살이 이어지면서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이회영 선생을 필두로 결성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연맹’에서는 기관지 <정의공보>를 펴내며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고취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지만 자금난으로 휴간하게 된다.

1920년대 후반에는 결핵을 앓아 1년 간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백정기 의사는 조국 독립에 대한 염원을 놓지 않았다.

Info 백정기의사기념관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매주 월요일 휴관)
주소 전북 정읍시 영원면 영원로 1049
문의 063-539-5237

흑색공포단과 육삼정 의거
결핵이 완치된 뒤 백정기 의사는 중국에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1931년, 이회영 선생 등 무정부주의자 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항일 무장투쟁 단체 ‘흑색공포단’의 핵심 단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흑색공포단은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중국 내에서 활발한 항일투쟁을 이어가며 일본 경찰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1932년 4월,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는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가 계획돼 있었다. 행사에는 일본 경찰 간부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었다. 흑색공포단은 백정기 의사를 필두로 의거를 준비했고 백 의사는 그 자리에서 죽는다는 각오를 한 채 행사장으로 향했다.

거사 당일, 백정기 의사가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좌절하고 있을 때 행사장 내에서 폭탄이 터졌다.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가 의거에 성공한 것이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정읍 백정기의사기념관 앞에 조성된 백정기 의사 동상.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백 의사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백정기 의사의 입장에서는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셈이었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백 의사를 비롯한 해외의 독립투사들이 더욱 탄력 받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그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이듬해 3월, 흑색공포단은 중국 주재 일본공사인 아리요시 아키라가 상하이의 고급 요리점인 ‘육삼정’에서 비밀회의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아리요시 아키라는 중국에 머물던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흑색공포단은 의거를 수행할 요원을 선정하기 위해 회의를 개최했다. 백 의사는 ‘훙커우 의거에서 풀지 못한 한을 이번 기회에 풀겠다’며 본인이 나서겠다고 주장했고, 다른 독립투사들 역시 목숨을 담보로 한 의거에서 의미 있는 죽음을 맞겠다며 서로 하겠다고 나섰다. 결국 1차 회의는 가결되고 이튿날 제비뽑기를 통해 백정기 의사와 이강훈 의사가 선정됐다.

흑색공포단은 만전을 기해 의거를 준비했다. 백 의사는 김구 선생으로부터 윤봉길 의사가 의거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도시락 폭탄을 전달받았다.

의거 당일인 3월 17일, 원심창 의사는 주변 동태를 살폈고 백 의사와 이강훈 의사는 육삼정 인근의 다른 음식점에서 대기했다. 의거를 돕기로 한 일본인 한 명이 육삼정 내부 상황을 알려주기로 해 기다리던 중이었다. 하지만 일본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세 의사는 순식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의거가 사전에 발각된 것이었다. 백 의사는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젊고 건강한 다른 독립투사들을 출옥시키기 위해 ‘모두 내가 주도한 일’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이후식 해설사는 “백정기 의사의 정면을 노려보는 듯한 사진은 이때 심문받을 당시 촬영된 것”이라며 “의거 실패에 대한 강한 분노가 얼굴에 짙게 드러나 있다”고 설명한다.

육삼정 의거 이듬해, 백 의사는 결국 차디찬 옥중에서 숨을 거둔다.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백 의사는 육삼정 의거에서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체포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의거를 돕기로 했다가 나타나지 않은 그 일본인이 일본 경찰의 밀정이었다는 것은 최근에서야 밝혀진 사실이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육삼정 의거에 앞서 열린 회의에서 흑색공포단 단원들은 서로 의거에 투입해달라고 나섰다. 기념관 한편에 당시 모습을 미니어처로 재구성 해놓았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사진 / 유인용 기자
육삼정 의거에 나섰던 세 의사가 일제에 체포당한 뒤 찍힌 사진. 세 의사의 표정에서 의거 실패에 대한 허탈함과 일제에 대한 분노를 느낄 수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앞으로 더욱 널리 알려져야 할 이름
삼의사 중 백정기 의사의 이름이 유독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이후식 해설사는 ‘백 의사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950~60년대의 학자들은 아나키스트를 사회주의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했어요. 백정기 의사는 사회주의자다, 이런 인식이 깔리면서 자연스레 백 의사의 이름이 역사에서 희미해진 것이죠. 하지만 백 의사는 조국 독립을 위한 이론으로서 자유와 평화, 평등을 주장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정읍의 백정기의사기념관에는 건국훈장과 유품 등이 전시돼 있고 백 의사와 관련된 영상도 감상할 수 있다. 기념관에서 200m 거리에는 백 의사의 고택이 복원돼 있다.

남대용 정읍시청 백정기의사기념관 주임은 “백정기 의사의 이름뿐 아니라 삼의사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며 “정읍의 대표 독립운동가인 백정기 의사가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와 함께 삼의사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한다.

폭탄이나 총을 지니고 무력으로 항일활동에 나섰던 독립투사들을 ‘의사’라고 한다. 그 무기에 자신의 목숨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사지로 향했던 그들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감히 가늠하기 어렵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서울 효창원에 모셔진 삼의사 영정과 안중근 의사의 사진. 왼쪽부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영정이다. 사진 / 유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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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입구의 비석에는 백 의사가 육삼정 의거를 앞두고 남긴 마지막 말이 새겨져 있다. 사진 / 유인용 기자

정읍의 기념관 입구 비석에는 육삼정 의거를 앞두고 백 의사가 남긴 마지막 말이 새겨져 있다. 훙커우 의거와 육삼정 의거를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거듭 느꼈을 백정기 의사. 비석을 통해 조국 독립에 대한 그의 굳은 의지를 어렴풋이 느껴볼 수 있다.

나의 구국 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 평화 위에
세계 일가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공생 공사의 맹우 여러분
대륙 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주시오
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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