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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3.1운동 100주년 기념] 수많은 독립운동가에게 숨을 불어넣은 왕산 허위 선생
[3.1운동 100주년 기념] 수많은 독립운동가에게 숨을 불어넣은 왕산 허위 선생
  • 조유동 기자
  • 승인 2019.03.08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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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신임을 받은 구한말 독립운동가의 생애
전국 의병 연합 군사장 맡아 서울 진공 작전 감행
1962년, 안중근 의사 등과 함께 건국훈장 수훈
사진 / 조유동 기자
구한말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의 고향 구미에서 선생의 생애를 만날 수 있다. 기념공원 내부 선생의 동상. 사진 / 조유동 기자

[여행스케치=구미]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이르는 3.17km의 구간엔 왕산로가 있다. 왕산로는 1908년 13도 창의군의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했던 구한말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의 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선생의 고향인 구미에서는 선생의 행적을 만나볼 수 있다. 왕산 허위 선생은 1855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구미시 임은동에 해당하는 곳으로 현재 이곳에는 왕산허위선생기념관과 생가터가 자리하고 있다.

고종의 곁에서 항일운동 펼친 대법원장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은 전시관보다는 기록관에 가까운 모습이다. 선생의 순국 이후 일가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뿔뿔이 흩어지다 보니 한국에 남은 유물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늦게나마 구미시에서 선생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후손들이 기증한 물품 등을 모아 허위 선생의 생애를 알리고 있다.

사진 / 조유동 기자
구미시는 기념사업을 통해 2009년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을 설립했다. 사진 / 조유동 기자
사진 / 조유동 기자
기념관 중앙에 전시된 왕산 허위 선생의 흉상. 사진 / 조유동 기자
사진 / 조유동 기자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사 곳곳으로 계승된 허위 선생의 공훈과 정신을 기려 1962년 독립유공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사진 / 조유동 기자

기념관 한쪽의 영상추모관에서는 짧은 영상을 상영해 허위 선생을 소개한다. 전시실에 입장해 훈장실을 지나면 허위 선생의 활동을 사진과 연표 등의 기록으로 보여준다. 선생의 발자취는 의병 활동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반발해 전국적으로 의병이 들고일어난 을미의병에 영향을 받은 허위 선생은 1896년 김산(현재의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김산의병은 충북 진천까지 진격하지만, 고종의 ‘의병을 급히 해산하라’는 밀서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이를 따른다.

이후 선생은 능력과 포부를 높이 산 대신 신기선의 천거로 1899년 45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관직에 진출한다. 그리고 6년간 오늘날의 대법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평리원 수반판서와 비서원승 등 고위직에 오를 정도로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

사진 / 조유동 기자
기념관에서는 선생의 생애를 기록과 사진으로 보여준다. 사진 / 조유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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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의병 활동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전시물. 사진 / 조유동 기자
사진 / 조유동 기자
기념관에서는 늦게나마 선생과 관련된 유물과 후손들이 기증한 유품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사진 / 조유동 기자

선생이 관직에 진출해있던 당시의 조선은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일제의 내정간섭, 경제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일제의 침략을 직접 본 선생은 제일은행권 유통반대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고, 일제를 규탄하며 전국의 의병 활동을 독려하는 배일통문을 돌리는 등 활발한 항일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항일운동의 계속된 실패와 일제의 탄압과 구금에 분함을 이기지 못한 선생은 1905년 관직을 사임하고 은거를 시작한다.

서울 진공 작전의 선봉, 생을 마치다
전시실을 돌아 나오는 길에는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 장면을 재현한 디오라마가 눈에 띈다. 허위 선생이 선봉으로 나섰던 서울 진공 작전의 모형이다.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고, 군대가 강제 해산됐던 1907년, 전국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이들은 각지의 조직을 합쳐 13도 창의군이라는 의병 연합을 결성한다. 당시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펼치던 왕산 허위 선생도 작전 참모장 격인 군사장으로 13도 창의군에 합류하게 된다.

해산된 군인 3,000여 명을 포함해 총 병력 1만여 명에 이르는 13도 창의군은 일제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되찾기 위해 1908년, 서울로 진격한다. 이때 선생은 3백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약 11.8km, 현재의 중랑구 망우동 일대)까지 진격하지만, 일본군의 화력과 후발 본진의 늦은 합류로 결국 패배하고 만다.

사진 / 조유동 기자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을 묘사한 디오라마. 사진 / 조유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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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에서는 1966년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구간을 왕산의 호를 딴 왕산로로 지정했다. 사진 / 조유동 기자

서울 진공 작전은 실패했지만, 전국으로 흩어진 의병들은 국내와 만주에서 활동을 이어가며 독립군의 기반을 다진다. 왕산 허위 선생도 임진강, 한탄강 유역을 중심으로 게릴라식 항전을 이어나간다. 그러나 1908년 6월, 은신처를 파악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된 선생은 같은 해 10월 21일(음력 9월 27일), 생을 마친다.

허위 선생의 순국은 서대문형무소(옛 경성감옥)가 정식으로 개소한 날의 첫 사형집행으로도 남아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의 모습, 허위 선생의 재판 판결문과 유서는 전시관 말미에서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독립운동사에 계승된 당당함과 의연함
왕산 허위 선생은 순국 전 심문 과정에서도 ‘의병을 일으킨 것은 누구냐’는 질문에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으면 의병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의병을 일으킨 것이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고 누구겠느냐!’고 일갈할 만큼 마지막까지 당당함과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사진 / 조유동 기자
영상추모관의 허위 선생 초상화. 영상추모관에서는 선생의 생애를 요약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사진 / 조유동 기자
사진 / 조유동 기자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의 모습, 허위 선생의 재판 판결문과 유서는 전시관 말미에서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사진 / 조유동 기자

왕산 허위 선생이 순국한 지 1년 뒤인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도 이러한 허위 선생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허위 선생 순국 후 그 시신은 제자 박상진 선생이 수습해 장사를 지냈다. 장례를 마친 박상진 선생은 이후 대한광복회를 조직한다. 대한광복회는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적극적인 무력 항일활동을 펼쳤다. 그 활동은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우고, 민족정신이 3・1운동으로 계승되는 기반을 닦았으니 허위 선생의 항일정신은 독립운동사 곳곳으로 계승돼 전해진 것이다.

사진 / 조유동 기자
기념관 옆 언덕을 오르면 유허비와 사당, 선생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사진 / 조유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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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선생의 묘소는 기념관을 지으며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사진 / 조유동 기자

한편, 기념관 옆의 작은 언덕을 오르면 허위 선생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박상진 선생이 안치했던 묘는 김천시에 있었으나 기념관을 지으며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선생의 묘와 함께 유허비, 사당을 함께 모시고 있으니 기념관 관람이 끝난 후 잠시나마 선생을 추모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늦게라도 기억해야 할 역사로 남아
기념관을 나와 도보로 약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는 허위 선생의 생가터가 자리 잡고 있다. 비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생가는 복원하지 못했지만, 직계 후손이 기증한 부지에 공원이 들어섰다. 공원에는 허위 선생의 기념 동상과 함께 선생의 행적이 전시되어 있어 인근 주민들의 휴식 공간과 기념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기념 공원을 지키고 선 허위 선생의 동상 뒤엔 선생이 순국하기 전 남긴 유서의 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父葬未成 (아버지의 장례를 아직 마치지 못했고) / 國權未復 (국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 不忠不孝 (충성과 효도를 다 하지 못했구나) / 死何暝目 (죽은들 어찌 눈을 감겠는가)’. 비록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후손들도 국내외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선생의 정신은 잊혀지면 안 될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사진 / 조유동 기자
선생의 후손이 기증한 생가터에는 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사진 / 조유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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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은 기념 공간이자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진 / 조유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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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선생의 동상 뒤엔 선생이 순국하기 전 남긴 유서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사진 / 조유동 기자

Info 왕산허위선생기념관
관람시간 하절기(3월~10월) 오전 9시~오후 6시 / 동절기(11월~2월) 오전 9시~오후 5시 (매주 월요일 휴관)
주소 경북 구미시 왕산로 28-33
문의 054-465-6622

Info 왕산허위선생 기념공원
주소 경북 구미시 임은동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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