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근현대사를 담은 굵직한 작품
오는 4월 14일까지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
[여행스케치=서울] 세트 하나 없이 텅 빈 무대는 오히려 꽉 차 보였다.
“아픈 역사를 다루는 만큼 관객과 함께 호흡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극을 보면서 극을 본다는 생각보다는 3.1 만세운동을 함께 하고 싶다, 같은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가 지난 3월 1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개막했다. 4월 14일까지 공연되는 이 극은 짧은 공연 기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로부터 연일 호평을 얻고 있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1975년부터 1981년까지 6년 동안 일간스포츠에서 연재한 김성종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극화한 작품이다.
회당 평균 시청률 44%, 최고 시청률 58.4%을 기록했던 드라마는 당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렇기에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에 실리는 기대감은 생각보다 무겁다.
최대치 역을 맡은 박민성 배우는 “원작의 아성을 넘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며 “마음을 비우고 작품이 보여주는 대로, 더하거나 빼지 않고 관객들이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연기할 것”이라고 전했다.
장하림 역을 맡은 이경수 배우 또한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다”며 “희망을 잃은 여인에게 어떤 것을 해줄 수 있을지 생각하는 마음으로 작품에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극은 일제 강점기인 1943년 겨울부터 한국 전쟁 직후 겨울까지 동아시아 격변기 10년의 세월의 장대한 서사를 담고 있다.
휘몰아치던 격동의 근현대사 속 중국 남경 부대로 징집된 조선인 학도병 최대치와 같은 부대의 정신대로 끌려온 윤여옥, 그리고 동경제대 의학부를 다니다 종군 된 장하림 세 남녀의 일대기를 그려내고 있다.
변숙희 프로듀서는 “36부작으로 구성된 드라마가 담은 내용이 방대하다 보니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 담지는 못했다”며 “대신 우리 민족이 꼭 알아야만 하는 굵직한 역사를 위주로 다뤘다”고 말했다.
특히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제주 4.3 사건 등 일제강점기 외에도 중요하지만 주목받지 못한 역사적 사건을 다뤘다.
그중 민감한 문제인 일본군 ‘위안부’(작품 속 정신대) 이야기도 있어 개막 전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문혜원 배우는 “피해자를 표현함에 있어서 너무 과하거나 전시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며 “직접적인 묘사를 삼가고 조심스럽게 표현하려고 많이 노력했다”고 말을 전했다.
문 배우의 말과 같이 극 중에서도 소녀상을 묘사하거나 앙상블의 몸짓 등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사건을 표현하고 있다.
앞서 극을 관람한 관객 중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은 장면 연출을 보고 눈물을 쏟아냈다. 변 프로듀서는 “직접적인 표현 없이도 상황이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했다는 것에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원작인 드라마의 스토리 라인은 그대로 유지했다.
중국 남경부대의 학도병과 ‘위안부’로 만난 대치와 여옥은 같은 조선인으로서 민족의 아픔을 공유하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여옥은 대치의 아이를 갖지만 행복도 잠시, 대치가 버마전쟁에 끌려가게 되어 헤어진다.
사이판으로 끌려온 여옥을 만난 하림은 임신 중인 그녀를 보살피며 연민의 정을 느껴 두 사람은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해방 후 세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는데, 서로 엇갈리고 또다시 찾아온 전쟁으로 비극은 새로 시작된다.
큰 줄기는 유지하되 여옥과 대치, 하림을 비롯해 최두일, 윤홍철, 김기문 등을 제외한 인물을 새로 창조해 신선함을 더했다. 드라마를 본 관객이라면 잠시 내용에 혼선이 있을 수도 있지만, 배우들의 매력적이고 섬세한 연기가 극에 녹아들어 이내 적응하게 된다.
최대치 역의 김수용 배우는 “작품을 준비하면서 이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과연 자신들의 의지대로 살았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다”고 전했다. 이어 “이들 모두가 시대에 희생당하고, 유린당한 청춘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런 것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말을 마쳤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화려한 세트장은 없는 대신 “STEP 1 길”이라는 부제를 더해 무대 옆으로 관객석을 만들었다.(나비석) 아픈 역사를 그리는 만큼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느끼고 싶었다는 것이 프로듀서의 설명.
작품 속 배경에서, 또 지금도 남과 북으로 갈라서 있지만 작품 속에서 계속 얘기하는 주제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것. 변 프로듀서는 “작품의 주제도 그것”이라며 “극을 통해 갈라진 남과 북이 아닌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창작 뮤지컬 중에서도 제주 4.3사건이나 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등을 모두 다룬 작품이다. 지금 커가는 다음 세대 아이들이 극을 봤을 때도 왜 이 시기에 이렇게 힘들고 슬픈 삶을 살았는지 잘 알 수 있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이 시기에 꼭 필요한 작품이다.
그저 함께이고 싶었다는 여옥의 말처럼 이념도 사상도 뛰어 넘은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오는 4월 14일까지 디큐브아트센터에서 펼쳐진다.
비극적인 작품을 통해 잊은 과거와 역사를 들춰보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