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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⑮]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던 작원잔도 너머 통도사를 품은 양산에 이르다
[신정일의 1300리 낙동강 걷기 ⑮]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던 작원잔도 너머 통도사를 품은 양산에 이르다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 승인 2019.03.1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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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삼랑진에서 양산 물금나루까지
외적 침입 막던 작원관과 작원잔도
석가모니 진신사리 모신 통도사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하는 삼랑진을 지나간다. 사진은 낙동강 철교.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하는 삼랑진을 지나간다. 사진은 낙동강 철교.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여행스케치=밀양, 양산] 삼랑진에서 남강을 받아들인 낙동강은 더 없이 넓고 푸르다. 이름부터 아름다운 삼랑리(三浪里)는 본래 밀양군 하동면(삼랑진읍)의 지역으로서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하여 마을을 싸고 흘러간다해서 삼랑진이라 부르기도 하고 세 갈래의 강물이 부딪쳐서 물결이 거센 곳이라 하여 삼랑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가파른 벼랑에 길을 낸 조상들이 놀랍네
뒷기미 마을에서 낙동강철교를 지나 물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보면 조선시대 영남대로 중 제일의 관문이었던 작원관에 도착한다. 이름 중 작원(酌院)은 서울에서 충주, 문경을 지나 낙동나루를 거쳐 대구, 밀양을 넘어 부산까지 이르는 총 길이 380km의 영남대로 중의 중요한 역원이었다. 이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원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부의 동쪽 41리에 있다. 원으로부터 남으로 5~6리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구비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의 연못인데 물빛이 짙은 푸른빛이고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 예전에 한 수령이 떨어져서 물에 빠진 까닭에 지금까지 원추암이라고 부른다.”

고려시대부터 교통과 국방의 요새지였던 이곳은 평상시엔 사람들과 화물을 검문하는 역할을 했고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군사적 전략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 박진(朴晉)이 왜장 소서행장 부대와 맞붙어 싸우다 병사 300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이 전투에 대해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택당 이식(李植)은 이곳을 지나며 한편의 시를 남겼다.

 

겨우 수레 하나 지나갈 협소한 잔도(棧道)

거룻배 거꾸로 밀고 오르는 층층의 여울

어량을 통과하면 그대로 바다 통하지만

섬 오랑캐 장사꾼도 더 이상은 못 나가네.

예로부터 뜻밖의 환란 막아낸 험한 요새

기개세(氣蓋世)의 호걸에게 맡겨야 하고말고

임진년 그 때 일을 어찌 차마 말하리요.

그럼에도 생취는 갈수록 쓸쓸해지누나.

 

이식의 시 속에 남아 있는 작원관은 경부선 철도가 지나면서 사라져버렸고, 지금의 작원관은 이곳 주민들이 1990년대에 새로 세운 것이다.

가파른 벼랑에 길을 낸 모습이 신기롭기만 한 작원잔도.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가파른 벼랑에 길을 낸 모습이 신기롭기만 한 작원잔도.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작원잔도를 거치면 양산 원동 부근의 낙동강을 만나게 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작원잔도를 거치면 양산 원동 부근의 낙동강을 만나게 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작원관을 지나 4대강 사업 때 만들어진 길을 가다보면 작원잔도를 만난다. 잔도란 깎아지른 바위 벼랑에 석축을 쌓아 낸 길을 말한다. <대동여지도>에는 작천잔도라고 실려 있는데, 밀양 삼랑진에서 양산 원동에 이르는 길이다. 저토록 가파른 벼랑에 잔도를 만들 수 있었던 우리네 조상의 슬기도 경탄할 일이지만, 얼마나 많은 수고가 더해져 저 잔도를 만들었을까?

양산에 들어 용의 전설 전해지는 사당을 찾다
양산시에 접어들어 중리마을을 지나면 들판 한 가운데에서 가야진사(伽倻津祠)를 만난다. 이곳에는 신라가 가야국을 병합하기 전부터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양주 도독부의 한 전령이 대구로 가던 길에 이곳 주막에서 잠을 자는데, 꿈속에 용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는 황산강(낙동강) 용소에 살고 있는 용인데, 남편 되는 용이 첩만 사랑하고 나를 멀리 하니, 내일 용소에 가서 숨어 있다가 남편과 첩이 어울려 놀 때 첩을 죽여주면 은혜를 갚겠습니다라고 애원하였다. 아내 용의 딱한 사정을 들은 전령은 쾌히 승낙하였다. 그 이튿날 용소에 가서 칼을 뽑아들고 바위틈에 숨어 기다리는데, 용소의 물이 끓어오르며 두 마리의 용이 불쑥 솟아올라 어울린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린 나머지, 정신없이 칼을 들어 그 중의 한 마리를 내리쳤는데 공교롭게도 남편을 죽이고 말았다. 남편의 죽음을 애통해 하던 아내 용은 전령에게 용궁을 구경시켜 주겠다 했고, 전령은 입었던 전복과 칼, 투구를 벗어놓고 용의 등에 올라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은 영영 자취를 감췄다 한다. 그 뒤부터 마을에 알 수 없는 재앙이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힘을 모아 용소가 보이는 곳에 사당을 짓고, 3마리의 용과 전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봄과 가을에 돼지를 잡아 용소에 던지며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용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가야진사.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용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가야진사.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물금읍에 가까워지면 용화사를 만나게 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물금읍에 가까워지면 용화사를 만나게 된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보물 제491호로 지정되어 있는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보물 제491호로 지정되어 있는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계속 하여 원동역을 지나 낙동강 따라 길을 이어가면 어느덧 물금읍 근처에 이른다. 역시 낙동강 물길을 따라 물금으로 향하는 기찻길 옆에서 보물 제491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용화사를 만난다. 통일신라시대 말이나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이 용화사로 오게 된 사연은 여러 가지다. 600여 년 전 강 건너 고암마을에 살던 한 농부가 낙동강에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하는 물체를 보고 건져보니 이 불상이었다고 하기도 하고, 1947년 무렵 낙동강 변에 나뒹굴고 있던 것을 이곳 용화사로 옮겨왔다고도 한다.

낙동강과 양산천 합수점에서 통도사를 떠올린다
물금역과 남부동을 지나 들녘으로 내려선다. 남부동은 원래 낙동강 변에 있었던 마을이나 1946년 대홍수로 마을이 휩쓸려가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마산으로 빠지는 큰 다리를 지나 차들은 쏜살처럼 지나가고, 드디어 양산천이 낙동강으로 접어든다. 이 양산천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는 유명한 통도사가 있다.

삼보사찰 중의 불보사찰인 통도사가 이 자리에 들어앉은 때는 신라 선덕여왕 15년인 646년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있는 청량산에 들어가서 날마다 기도를 하는데 어느 날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그에게 석가여래가 입었던 가사와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주며 신라로 돌아가 사리탑을 짓고 절을 세우라고 했다. 자장율사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일부를 모시고 와서 통도사 자리에 사리를 넣은 탑을 세운 다음 절을 짓고 통도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통도사에서는 석가의 사리를 모시게 된 만큼 그 뒤로 줄곧 따로 부처의 형상을 모시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통도사에서 신앙의 정수가 되는 것은 사리탑과 사리탑이 있는 금강계단이다.

계단은 계, 곧 불가에서 지켜야 할 계율을 일러주는 처소를 말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율사는 통도사에 머물면서 보름마다 한 번씩 금강계단에서 계율을 강의하였는데 그에게 계율을 받기위해 전국의 스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금강계단은 겹으로 된 연화대 위에 받쳐진 종 모양의 사리탑을 한 가운데에 두고 그 아래에 이루어진 돌층계들을 이르는데, 그 층계의 왼쪽 끝에는 석등이, 오른쪽 끝에는 돌 향로가 놓였다.

물금읍 인근에서 낙동강으로 합수되는 양산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삼보사찰 중 하나인 통도사를 방문할 수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물금읍 인근에서 낙동강으로 합수되는 양산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삼보사찰 중 하나인 통도사를 방문할 수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는 사리탑과 금강계단.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는 사리탑과 금강계단.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석가여래 영골사리 부도비에 적혀있는 이 계단의 내력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만든 뒤로 조선 선조 37년 곧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에 중 송운이 재건하였고, 숙종 때에 중 계피가 다시 고쳤다. 그 뒤로 1911년에 또 한 차례 손을 보았으므로 원래의 모습을 알 길은 없으나 그 규모와 배치 형식만은 대체로 지켜온 것으로 짐작된다.

부처의 형상을 모시지 않았기 때문에 통도사에 대웅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금강계단을 등지고 서있다. 부처의 형상이 놓이지 않았더라도 대웅전의 불단 자리를 보고 예배를 하면 석가여래 사리탑에 예배를 하는 형식이 되도록 되어있다.

1961년의 대웅전 공사 때에 발견된 합각머리의 서까래에 적힌 글에 따르면 이 건물도 조선 인조 때인 1645년에 지어졌다. 용마루를 한자의 고무래 정()’자 모양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건물로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두드러져 보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그밖에도 통도사를 이룬 크고 작은 집 서른 다섯 채 중에 용화전, 응진전, 대광명전, 관음전, 약사전, 극락전, 불이문, 천왕문, 영산전, 만세루 등은 조선왕조 말기에 지어진 것들로서 조선 건축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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