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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신정일의 한강1300리 걷기 ①] 한강의 발원지, 태백 검룡소를 시작으로 한강의 발자취를 걷다
[신정일의 한강1300리 걷기 ①] 한강의 발원지, 태백 검룡소를 시작으로 한강의 발자취를 걷다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 승인 2019.05.1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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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되고자 했던 흔적이 남은 검룡소에서
광동댐 물길 따라 삼척 하장면까지
발원지서부터 시작한 한강 걷기 여행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의 모습.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의 모습.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편집자주] 지난 2월 28일 강원도 태백 검룡소를 시작으로 매달 2박 3일 동안 '한강 1300리 걷기'를 하는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가 '낙동강 1300리 걷기'에 이어 <여행스케치>에 다시 연재를 시작했다. 신정일 대표가 90명의 일행들과 함께 '한강 1300리'를 걷는 이유는 한강의 물길이 흐르는 곳의 지명 유래, 한강 유역을 따라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이야기<단종(영월), 정도전(도담삼봉), 신립(탄금대), 이색(여주 신륵사), 권일신, 권철신(양평), 정약용(남양주), 김시습(서울), 이규보(조강포)>, 그리고 한강의 숨겨지고 사라진 모습들을 찾아 복원하기 위해서다. 그는 서울에 '한갈 박물관'과 '길 박물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행스케치=태백]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 1.3km라고 써진 대형 안내판 앞에서 차를 세웠다. 휴대폰을 꺼내 본다. '서비스 지역이 아닙니다.' 그렇지 여기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 단절된 곳이고 오직 불고 가는 바람소리와 흐르는 물소리 그리고 새소리뿐이다. 대덕산 금대봉에서 검룡소로 가는 길 음지쪽으로는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고 내가 가는 길에도 녹다가 만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이 봄에 밟는 마지막 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검룡소 탐방로 코스 안내도.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검룡소 탐방로 코스 안내도. 사진 / 조용식 기자

용이 몸부림 쳤던 곳, 물 맑은 검룡소
검룡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45분. 북어 한 마리에 귤 몇 개를 까놓고 소주잔에 술을 따른 뒤 하늘에 고하는 천제를 지낸다. 

"유세차 신사년 4월 초이레 민족의 젖줄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에서 한강 따라 천삼백 리 길을 한 발 한 발 걸어가기 위해 지극정성 모아 하늘에 고합니다……. 반가이 흠향하시옵고 자연과 사람이 모두가 공경하고 섬기는 그러한 시간을 만들어주옵소서. 상향." 

음복으로 소주 한 잔씩을 나눈 뒤 그냥 엎드려 검룡소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신다. 이 물맛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수돗물보다 몇 배는 깨끗할 이 물맛을!

이곳 검룡소는 한강 514.4km의 발원지로 하루 2천여 톤가량의 수원이 석회암반을 뚫고 나온다. 깊이 1.5m, 넓이 1.2m 규모의 소는 2~30m정도 이어져 흐른다. 사계절 내내 9℃를 유지하는 수온과 암반 주변 풀 이끼는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변 자연은 오염되지 않아 아름답다. 

전설에 의하면 지금의 이곳 폭포는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강줄기를 거슬러 이 산으로 올라오며 몸부림친 흔적이라고 한다. 폭포 부근에서 풀을 먹기 위해 온 소를 그 용이 잡아먹기도 해 마을사람들이 내려가 버렸다고 한다.

검용소는 20~30m 정도를 이어 흐른다. 용이 되고자 했던 이무기가 산을 올라오며 몸부림 친 흔적이 검용소가 되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검용소는 20~30m 정도를 이어 흐른다. 용이 되고자 했던 이무기가 산을 올라오며 몸부림 친 흔적이 검용소가 되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검룡소가 있는 태백산국립공원을 빠져나와 조탄마을 방향으로 걷는 우리땅 걷기 동호인들. 사진 / 조용식 기자
검룡소가 있는 태백산국립공원을 빠져나와 조탄마을 방향으로 걷는 우리땅 걷기 동호인들. 사진 / 조용식 기자

강은 점점 넓어지고, 강변 돌에선 사람이 읽힌다
푸른 이끼를 헤집고 물은 흐르고 한강의 발원지 아래 첫 마을인 ‘안창죽마을’에 도착한다. 두 채의 집이 서 있는데 다 비어 있으니 뭐라고 물어볼 수도 없다. 안창죽 시내버스 정류소도 마찬가지. 버스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사라진 지 오래인지 먼지만 수북이 쌓여 있다. 

두 개의 통나무로 만든 나무다리를 건너 다가선 집은 문짝마저 다 떨어져 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빨간 의자 두 개가 놓여 있고 금세 고등어를 구워도 될 법한 자세로 석쇠가 나무 찬장에 얹혀져 있다.

한강 발원지 아래 첫 마을인 안창죽 마을에 있는 두 채의 집은 텅 비어있다.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통나무로 만든 나무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집은 텅 비어있다.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밭에서 돌을 고르고 있는 마을주민을 만난다. 오랜 세월에 걸쳐 농사철마다 골라내고 골라내도 또 다시 나오는 돌, 얼마나 성가실까. "돌들이 귀찮지요?" 하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란다. 돌이라고 해서 아무 돌이나 골라내는 것이 아니다. 밭에도 쓸모 있는 돌이 있고 쓸모없는 돌이 있다. 고랭지 채소인 배추나 무에는 기후가 중요한데 한낮에 햇볕을 받은 돌들이 추운 저녁에 열을 내어 채소를 얼지 않고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쓸모없는 돌만 골라내는 중이란다. 

사람도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있는 반면 있으나 마나한 사람도 있고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여기저기 뒤섞여 무질서 혹은 뒤죽박죽과 기우뚱한 균형 속에서 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발전해 온 것이리라. 나는 그렇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요즈음 이곳에서 심는 주 작물은 무엇이냐고 묻자 “배차(배추)와 옥수수, 감자 등을 심지만 주로 고랭지 배추 재배를 한다”고 설명한다.

권춘섭집앞 구름다리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우리땅 걷기 회원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권춘섭집앞 구름다리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우리 땅 걷기 회원들. 사진 / 조용식 기자
'권춘섭집앞'이라고 적힌 마을버스정류소 이름이 이색적이다.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권춘섭집앞'이라고 적힌 마을버스정류소 이름이 이색적이다. 사진 / 조용식 기자

상사미교를 지나자 강은 휘돌아간다. 조선시대 사미창(士美倉)이 있었다는 창말마을을 지나니 강물이 조금 더 넓혀지고, 강바람은 차다. 임계 39km, 하장 11km. 강물은 여울져 소리를 내며 흐르고 강가에 있는 밭들은 온통 자갈투성이다. 내 유년 시절에 할머니가 밭을 매다가 "아가 저 돌멩이 주어다 저 밭둑에 놓아라" 하고 성화를 대곤 하셨는데 저 많은 자갈을 골라내지도 않고 농사를 짓는 강원도 사람들의 심성의 무던함 또는 애로사항을 알 듯도 하다.

검용소 근처 한강의 발원지 아래 첫 마을인 '안창죽마을'이 나타난다.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검용소 근처 한강의 발원지 아래 첫 마을인 '안창죽마을'이 나타난다.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버들강아지
흐르는 강 근처에 버들강아지가 피어있다. 사진 / 조용식 기자
한강에 가득 핀 버들강아지. 사진 /
한강에 가득 핀 버들강아지.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광동댐에서 다시 만나는 물길, 삼척에서 마무리
골지천에는 복합비료 포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더러는 떠내려간다. ‘비료를 뿌린 다음에 차곡차곡 포개놓고 그것을 농협에서나 면사무소에서 수거해 가기만 해도 될 텐데 왜 저렇게 포대를 떠내려가게 놔둘까?’ 하는 생각도 잠시 옹기점이 있었다는 점촌마을의 외나무다리가 나타난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외딴 집이 한 채 있다. 시멘트 다리를 놓아줄 리는 만무하고 목마른 사람이 시암(샘) 판다고 저렇게 나무다리를 놓은 것이리라. 나는 강을 따라 걸으며 이곳이 정말 강원도가 맞는구나 생각한다. 시상에 한강의 발원지에서 여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논배미 한 뙈기 못 만났으니 말이다. 

35번 국도를 따라 걷는 우리 땅 걷기 회원들.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35번 국도를 따라 걷는 우리 땅 걷기 회원들. 사진 / 조용식 기자

하촌마을에서 골지천은 이상스레 마른 냇가가 되고 만다. 조금 전까지도 시종여일하게 흐르던 그 강물이 어디로 숨어들었는가. 강 아랫자락을 보면 오랫동안 말라 있었던 듯싶은데, 저 물길을 근처 채석장에서 가둔 채 쓰기 때문인가? 

하촌(옛 이름 도릉골)마을에서 권여옥 할머니를 만나자 그 의문이 풀린다. "눈이 내려 녹거나 비가 오면 물이 흘러요. 이 마을에선 저 개천에 물이 있으면 농사가 안 된다고 했어요. 저그가 큰골, 새골이고 저그 물이 좋아요. 저 물만 가지고도 이 동네가 물 걱정 안 하고 먹고살아요. 배추, 감자, 옥수수 심고 살았는디 물이 없응개 논이 있을 턱이 있나요.“ 그도 그럴 것이다. 물이 없는 곳에서 농사가 제대로 되겠는가?  

한강의 최상류천 골지천에는 비료 포대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한강의 최상류천 골지천에는 비료 포대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상수원보호구역 표시.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상수원보호구역 표시. 사진 / 조용식 기자
한강 변에 가로수로 심긴 자작나무.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한강 변에 가로수로 심긴 자작나무.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숙암 2교 다리 아래에는 빈 집 한 채가 서 있고 그 아래에서 광동댐은 시작된다. 아까 사라졌던 물길이 이 광동댐에서 합류한다. 「또 오십시오. 고원의 도시 태백시로」라고 씌어진 플래카드를 바라보며 드디어 삼척으로 접어들었음을 안다. 

옛날 이곳을 지나던 길손들이 이곳에 집이 없어 바위 위에서 자고 갔다고 하여 숙암리(宿岩里)라 이름 지은 이곳 고개 안 마을에는 소냇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댐 건너편의 지걱산 밑에는 지구렁이라는 마을이 있고 푸른 물결 너머 둔지터에는 수자원공사 건물이 세워져 있다.

숙암마을을 지나며 산불조심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거리고 하장 3km, 임계 31km가 남았다. 광동댐의 물결은 푸르고 잔잔하며 건너 산들에는 잔설들이 남아 있다. 가로수로 심겨져 있는 자작나무숲은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라오고 길가에는 노오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태백지역의 식수원 광동댐은 임계 강릉으로 이어진다.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태백지역의 식수원 광동댐은 임계 강릉으로 이어진다.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하장휴게소에서 잠시 쉬며 신정일 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하장휴게소에서 잠시 쉬며 신정일 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진 / 조용식 기자

물이 넘쳐흐르는 광동댐을 지나 길은 임계, 강릉으로 이어진다. 둔지터, 넉골, 높은베리, 말씹바우 등의 옛 이름 속에 둔지터에서 역암리로 가는 길목에 있던 원터 나드리도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한강을 걷는 첫날 하루해가 저물어가는 데, 광동댐은 아직도 꽁꽁 얼어 있고, 하얀 자작나무만 저만 큼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르는 봄을 침묵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한강(漢江)을 바로 알자>

서울의 젖줄이면서 한국의 젖줄,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젖줄이라고 일컬어지는 한강처럼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던 강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중국의 위나라와 진나라 때의 지리지에는 이 강을 대수(帶水)라고 하였고, 광개토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로 올라 있다.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에는 이 강의 이름을 옥리하(玉里河)라 불렀고, 신라는 상류를 이하(泥河) 하류를 왕봉하(王逢河)라 불렀다. 고려 문헌에 한강은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린 긴 강이라는 뜻으로 열수라고 불렀으며, 모래가 많기 때문에 사평도(沙平渡) 또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 불렀다. 

한강의 명칭에 한(漢)이라는 글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도입하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부르고 있는 한강 및 한수 또는 경강이라고 불렀는데, 한강은 본래 우리말인 한 가람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아리', 즉 '알'은 고대에 크다거나 신성하다는 의미로 쓰였는데, '한'도 이와 비슷한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해마다 제사를 올렸던 네 강, 즉 사독에 들었는데(동독은 낙동강, 서독은 대동강, 북독은 용흥강, 남독은 한강) 독(瀆)이란 바다로 직접 들어가는 긴 강이란 뜻이 있다. 외국의 기록들에는 '서울강(seoul river)'이라는 이름도 있다. 조선 성종 때 만들어진 『동국여지승람』에는 한강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봄이 오는 것이 느껴지는 골지천의 모습. 곳곳에서 초록 잎이 움튼다.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봄이 오는 것이 느껴지는 골지천의 모습. 곳곳에서 초록 잎이 움튼다. 사진 / 신정일 (사) 우리 땅 걷기 대표

‘한강(漢江)은 도성 남쪽 10리 지점 곧 목멱산(木覓山) 남쪽(한남동)으로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하였다. 신라 때에 북독(北瀆), 고려조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고 하였는데 민간에서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의 오대산 우통(于筒)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충주 서북쪽에 이르러 안창수(安倉水(섬강))와 합하고 양근군(楊根郡)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하며 광주 지경에 이르러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광진(廣津(광나루))이 되고 삼전도(三田渡)가 되며 두모포(豆毛浦(두뭇개))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이 되고 용산강이 되며 또 서쪽으로 가서 서강(西江)이 되고 시흥현 북쪽에 이르러서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현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며 교하군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고 통진부 북쪽에서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한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대동지지』 등 옛 문헌들에는 한강의 발원지를 오대산 우통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학자였던 권근은 기문(記文)에 우통수를 이렇게 적고 있다.

인정이 많은 조탄마을의 이정표와 장승. 사진 / 조용식 기자
인정이 많은 조탄마을의 이정표와 장승. 사진 / 조용식 기자

오대산 서대(西臺) 장령(長嶺) 밑에 샘물이 솟아나는데 그 빛깔이나 맛이 특이하였다. 무게도 보통 물보다 무거웠고 사람들은 그 샘물을 우통수(于筒水)라고 불렀다. 우통수는 바로 한강의 수원이다. 사람들은 우통수의 빛과 맛이 변하지 않음이 마치 중국 양자강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뜻에서 중령이라고도 불렀다. 중령이란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물 이름인데 여러 줄기의 냇물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지만 중령의 물만은 다른 물과 어울리지 않고 그 찬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고사를 말하는 것이다.

한강의 발원지가 오대산 우통수에서 지금의 태백시 하장면 금대산 밑 검룡소로 바뀐 것은 1918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실측 조사한 결과에 의해서였다. 오대산 우통수와 태백시 창죽동까지 골지천 길이를 계측한 결과 골지천이 32.5km가 길었다. 

<사군지(四郡志)>를 보면 한강이 세 군데에서 비롯된다고 실려 있다.

“한간의 원류는 셋인데, 하나는 강원도 강릉의 우통수에서 나오고, 하나는 회양 금강산 만폭동에서 나오며, 또 하나는 충청도 보은 속리산의 문장대에서 나온다. 오대산에서 나오는 것은 남쪽으로 흘러 정선군과 영월부를 지나 충청도 영춘현(지금의 단양군 영춘면) 경계를 들어와서 서쪽으로 흘러 충주에 이른다.

속리산에서 나오는 것은 충청도의 괴산, 연풍(지금의 괴산군 연풍면) 사이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충주에서 우통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남한강과 합쳐져서 서북쪽으로 흘러, 여주 경계를 거쳐 양근군(지금의 양평군)에 이른다.

한편 금강산에서 나오는 물줄기는 양구 현과 춘천부를 지나 경기도 가평군 경계를 거쳐 남한강과 합쳐지는데, 여기서부터는 서남쪽으로 흘러 광주 경계의 서북쪽을 지난다. 이어 경성의 남쪽을 빙 돌아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통진부 북쪽의 교화군 남쪽 사이를 지난다. 북쪽으로부터 흘러드는 임진강과 합류하여 풍덕부(지금의 개풍군)를 거쳐서 서해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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