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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신정일의 한강1300리 걷기 ②] 삼척시 하장면 광동리에서 정선군 임계면 월탄리까지
[신정일의 한강1300리 걷기 ②] 삼척시 하장면 광동리에서 정선군 임계면 월탄리까지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 승인 2019.05.2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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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강원도 마을들
보기 힘든 까마귀가 많은 삼척 하장면부터
골지천이 잘 보이는 정선군 임계면까지
3월 2일, 강원도에서는 아직은 이른 봄날이지만, '한강 1300리 걷기'는 올 12월까지 계속 이어진다. 사진 / 조용식 기자
3월 2일, 강원도에서는 아직은 이른 봄날이지만, '한강 1300리 걷기'는 올 12월까지 계속 이어진다. 사진 / 조용식 기자

[여행스케치=삼척] 한강 천삼백리 길 걷기 이틀째, 아침은 아직 더디게 온다. 어제 하루를 마감했던 삼척시 하장면은 조용하다. 문득 한강을 처음 걸었던 당시 만났던 김석녀 할머니가 떠올랐다.

광동댐이 만들어지면서 새로 생긴 하장면 소재지의 버스 간이정류장에는 "누구야 사랑해", "누구는 누구를 좋아해" 등의 낙서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정류장 의자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계셨다. 어디 사시느냐고 묻자 넉골 사는데 태백을 다녀오는 길이시란다.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 몰랐던 시절
"할머니 고향이 여기예요?" 하고 여쭤보니, "우리 친정은 저그 삼척 미로면이야. 열아홉 살에 시집왔는데 삼 년 살다 신랑은 국방경비대로 끌려가 버리고 그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소식도, 신랑 얼굴도 몰라"라고 대답한다.

'한강 1300리 걷기'를 올해로 4번째 걷는 신정일 사)우리땅 걷기 대표가 길을 걸으며 만났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사진 / 조용식 기자
하장면 소재지의 성황당.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골지천 사이로 집으로 가는 다리가 놓여져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그랬을 것이다. 시어머니 밑에서 이른 아침에 나갔다가 어스름이 다 되어 들어왔으니, 어떻게 신랑 얼굴이나 기억했겠는가, 그러다가 남편은 일 년 뒤쯤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안타까움에 "할머니 아드님은 잘하십니까?" 하고 묻자 "우리 아들이 나한테 참 잘해. 며느리도 손자들도 어찌나 잘하는지" 하는 다행스런 대답이 들려온다.

김석녀 할머니의 남편이 끌려갔던 국방경비대는 광복 후에 미 군정하에서 창설되어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되었던 군사조직이었다. 미군정 당국은 애초 국방경비대의 조선경찰예비대로 이름을 지었으나 우리나라 측에서는 남조선경비대라고 불렀다. 그뒤 1946년 6월 15일 조선경비대로 개칭되었다.

조선경비대는 국가 중요 시설의 경비 업무와 좌익분자들의 폭동진압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1948년 4월 2일 제주 4·3사건이 일어나자 제주도에 주둔 중이던 제9연대를 투입하여 6월 14일까지 이를 진압하였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그날`/`빨갱이 마을이라 하여 80여 남녀 중학생들을 금악 벌판으로 몰고가 집단 몰살하고 수장한데 이어`/`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나무기둥에 묶어두고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나는 이산하 시인의 장시 <한라산>을 떠올리며 누가 적이고 동지인지도 모른 채 숨져간 수많은 사람을 생각해 본다. 

자연이 조화를 이룬 곳, 평화로운 광동마을
광동마을을 지나며 강물은 제법 구성진 소리를 내며 흐른다. 한강 탐사 중 마지막 다리일 듯싶은 나무다리는 여름에도 자리를 지킨다. 다리에서 만난 주민에게 "큰물이 져서 떠내려가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묻자 "떠내려가면 다시 만들어놓지요" 하며 싱긋 웃는다. 

골지천변의 빈집이 세월의 흐름을 대변해 준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골지천변의 무넘이 다리를 걷는 한강 1300리 걷기 참가자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골지천의 길.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강 건너 마을은 소나무숲 뒤편으로 평화롭게 들어앉았고 뒤편의 장변산에는 병풍 같은 바위에 굴이 있다. 장수가 쓰던 병기를 감춰둔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소나무숲 아래로 난 옛길은 마치 고향집을 찾아가는 느낌을 준다. 양지촌마을에 이르러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는 노루목마을 쪽을 바라보며 발길을 옮긴다. 

소나무숲과 굽이치는 강물, 그리고 봄물이 오르는 버들강아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이곳 장전리.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에서부터 이곳에 이르는 동안 단 한 군데에서도 보지 못한 논배미를 만난다. 이 골짜기에서 논 몇 마지기나마 짓는 사람은 얼마나 마음들이 부자였을까? 안진밭 북쪽에 있는 새골마을을 지나 고한 사북으로 길은 갈라진다.

긴 밭이 있으므로 장전(長田)이라 불리는 장전 삼거리에서 강원랜드까지는 37km. 정선, 태백, 삼척에서 모든 길은 로마나 서울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 강원랜드로 통하고 있다. 바위가 지붕처럼 되어 있어서 문둥이가 살았다는 문둥베리도, 도가니처럼 생겼다 하는 도가니바위도 강이 흘러가듯 내려가다가 보니 멀어져가고 산이 깊어선지 해는 벌써 사위어간다. 

갈전리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가다
청룡안마을에서 갈전리로 가는 강 길은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흐른다. 검룡소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불어날 대로 불어난 강물은 이제 도저히 신발을 벗고 걷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문득 위응물의 시 「강물 소리 듣고서」가 떠오른다. "물의 본성은 고요하고 돌에는 본디 소리가 없는데 어찌하여 둘이 맞부딪치면 온 산에 우레같이 놀라운 소리를 낼까요?"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에서 동강을 향해 흐르는 골지천변의 풍경. 사진 / 조용식 기자
골지천을 따라 걷다보면 만날 수 있는 작은 교회.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깊이를 알 수 없게 푸르게 흘러가는 강물은 푸르른 소나무들과 봄풀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정선으로, 영월로, 단양, 여주를 거쳐 서울로, 서해로 흘러갈 것이다. 

자꾸 느려지는 우리들의 발걸음과는 달리 자동차들은 더 빠르게 경적을 울리며 우리들 곁을 스쳐 지나간다. 갈전마을 이정표를 지나며 제법 규모가 있는 집 뒤편에 조성된 느티나무숲을 바라다본다. 이천시 설성면 수산리의 해월 최시형 선생이 숨어지냈던 앵산보다도 더 작은 숲임에도 나무들은 무성하다. 칡이 많으므로 ‘치랏’ 또는 ‘갈전’이라 부르는 갈전리의 휴게소에 들어갔다. 

"광동댐 만들어지기 전만 해도 고기들이 참 많았어요. 뚜구리(동사리), 쉬리, 메기, 민물조개들이 물가를 걸어가면 다리를 쿡쿡 치고 그랬어요. 그때만 해도 대부분 가난하니까 메밀밥, 감자, 조밥, 콩밥이 주식이었죠. 이불이 없어가지고 돗자리 덮고 자고, 너무 추우면 집에서 기르던 개를 품고 잤어요. 그래서 나는 먹고사는 것을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요. 약이 뭐 있어요. 배가 아플 땐 석유를 약이라고 마시고 그랬잖아요. 나 클 때는 150여 호가 살았었는데 지금은 80호쯤 남았는가. 그래서 이 마을 학교에 올해는 학생이 한 사람만 입학했다든가. 아마 내년에는 폐교가 될 거라고 그래요……." 

석탄공사에 다니다 명예퇴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휴게소 차리고 땅도 얼마간 사서 농사도 짓는다는 이정모 씨의 이야기 속에는 모두 다 가난했던 이야기 그러나 정이 듬뿍 들어 있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장작가리 가득한 강원도
우리가 계속 걸어가면서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어떤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설레며 걸어가서 그런지 강은 순간순간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강물 청아하고 강물에서 노닐고 있던 물오리 떼들은 날아오른다. 

밭 매는 아낙네들의 모습.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한강 1300리 걷기 참가자 중의 한 명인 우동욱 씨가 민요를 부르고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 땅 걷기 대표

“강의 잔물결 소리를 듣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완전히 절망하지 않는다.”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말했다는데, ‘이렇게 이른 아침에 아름답고 청아한 강물 소리를 듣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각하며 바라본 강 건너로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검룡소에서부터 이곳에 오는 동안 제일 큰 들판이다.

삼척시 하장면 토산리마을에 다다랐다. 푸른 보리밭 가운데에 서 있는 빈집이 애처로운데 갑자기 까마귀 몇 마리가 까악까악 날아오른다. 어느 때부턴가 까마귀 고기가 정력에 좋다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한 마리 당 40~50만원은 줘야 살 수 있다는 까마귀는 자취를 감추어버렸었다. 어쩌다 깊은 산에서 먼발치로만 보였던 까마귀가 여기선 많이 보인다. 

강원도 지역 한강을 따라 걸으며 눈에 띄는 것은 집집마다 장작가리들을 쌓아둔 풍경이다. 기름보일러나 심야전기보일러가 판을 치지만 강원도라는 특수성 때문에 폭설이 내릴 때를 대비해서인지 모르겠다. 이곳 토산리에서는 정선군 임계면 덕암리에 있는 조란봉(鳥卵峰) 꼭대기가 보이는데 그 산으로 말미암아 토산리마을에 화재가 자주 일어난다고 해서, 방지책으로 간수를 넣은 항아리를 조란봉에다 묻었다고 한다. 

강을 걸으며 배우는 사랑법
드디어 정선군 임계면에 접어든다. 은치다리를 지나자 「어서 오십시오. 아리랑의 고향 정선입니다」라는 표지석이 우리를 반긴다. 옛 시절 장이 섰었다는 장터거리를 지나자 길 우측으로 토산리로 넘어가는 은고개가 보인다. 강 건너 음지말마을에 햇살은 내려앉고 석둔골을 지나자 골지리(骨只里)의 중심마을인 양지말에 이른다. 

얼음이 얼은 골지천에서 손빨래를 하는 마을 주민의 모습. 사진 / 조용식 기자
골지천은 여전히 겨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진 / 신정일 사)우리땅 걷기 대표
강물은 저 산을 끼고 흘러흘러 한강으로 이어진다. 사진 / 조용식 기자

천주교 골지공소에 도착하자 나이 든 천주교인 몇 분이 서 계신다. "골지천이라는 이름이 붙어서인지 골지리마을이 제법 크네요" 하고 말을 건네자 이세진(70세) 옹이 "골지리가 아니고 높을 고(高)에 터 기(基)자를 쓰는 ‘고기리’인디, 그때 이장이 잘 몰라서 골지리라고 한 거예요. 이름 좀 바꿔주었으면 좋겠어요" 한다. 

그런 경우가 어디 한두 군데인가.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인 말목장터와 전봉준의 옛집 그리고 만석보가 있는 정읍시 이평면도 배밭이 많아서 이평이 아니고 배가 그곳까지 드나들었다고 해서 그냥 배들이라고 불렀다는데, 일제 때 지적도를 만들던 면서기가 그 뜻을 모른 채 이평梨坪으로 적었기 때문에 배나무가 많은 들이 되고 만 것이다. 

지명을 바꾸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도둑들이 많아 이름 붙은 ‘도둑골’, 백정이 살았다 해서 지어진 ‘백정골’만 하더라도 주민들이 시·군청에 청원하면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마을 이름만 바꾼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한강의 상류천인 골지천도 고기천으로 바꾸어야 하고 지도 표기도 바꾸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지금이라도 정부에서는 잘못 지어진 이름들을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바람은 등을 밀듯이 가볍게 불어오고 흘러간 노래 <방랑시인 김삿갓>을 불러본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 리 흰구름 뜬 고개 위에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대 둔 문간방에 걸식을 하면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노래를 부르자 처량한 기분이다. 하지만 우리들이야 어디 걸식까지는 하지 않지 않았는가. 

산비탈에서는 중장비를 이용하여 수로를 만들고 있다. 이때쯤이면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보를 막거나 수로를 정비한다. 괭이며 삽이며 바작에 짊어진 채 하나 둘씩 모여들어 떼를 뜨고 나무를 베어오고 해서 보를 만들며 나누던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들은 바라만 보아도 듣기만 해도 얼마나 정겨웠던가.

물막이보 아래로 물은 우렁차게 흐르고 강을 따라서 길은 돈들로 돌아간다. 지형이 돈과 같이 둥글다고 해서 이름조차 돈들인 돈들마을에서 원갯벌마을 쪽으로 돌아가면 골지리 하동마을로 넘어가는 덕재가 보인다. 옛날 저 고개에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그 덕을 입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임계면 서유동마을에서 다리를 건넌다. 강은 바리골마을과 햇골마을에서 흘러오는 내를 합쳐서 흐른다. 어느 것 하나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이 강의 무한한 사랑법이여, 높은 곳이 있으면 휘돌아가고 차면 넘치는 그 여유로운 사랑법이여. 강을 따라 걸으며 그 사랑법을 터득해야 하는데 아직도 사랑보다 미움이 더 많고 그렇지 않으면 방관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한강 이틀째 날이 저물고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한 달 뒤 다시 이곳에 올 때 한강의 풍경이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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