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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속리산이 품은 아홉 굽이 계곡, 우암의 흔적 따라 걷는 화양구곡
속리산이 품은 아홉 굽이 계곡, 우암의 흔적 따라 걷는 화양구곡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19.07.0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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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곡 경천벽부터 제9곡 파천까지…
흥선대원군 이야기 얽힌 화양서원 등
더위도 피하고 역사도 알 수 있는 일석이조 여행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충북 괴산 속리산국립공원의 화양계곡은 조선 후기 대표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은거한 곳이기도 하다. 시원한 계곡물과 수려한 기암괴석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송시열와 관련된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여행스케치=괴산] 속리산국립공원의 화양천을 따라 3km를 걷다 보면 화양계곡의 아홉 골짜기 기암괴석 ‘화양구곡’을 마주하게 된다. 물가에 가파르게 솟아오른 바위가 마치 하늘을 떠받드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경천벽이라 불리는 제1곡부터 시작해 흰 바위가 펼쳐져 있는 제9곡 파천에 이르기까지 산 따라 계곡 따라 걸으며 느긋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트레킹 코스다.

화양구곡에서는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쉬어가도 좋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커다란 나무 그늘에 숨어도 좋다. 조선 후기 대표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은거한 곳이기도 한 화양계곡에는 곳곳에 그와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 있다. 계곡물에 첨벙첨벙 뛰어노는 아이들, 졸졸 흐르는 맑은 시냇물 소리,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과 송시열의 흔적들이 한 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화양구곡을 거닐어보자.

맑은 계곡물과 기암절벽을 자랑하는 제2곡 운영담
주차장에 차를 두고 올라오면 녹음이 짙은 가로수길이 나오고, 다리를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바로 제2곡인 운영담을 볼 수 있다. 넓은 주차장이 생기면서 제1곡 경천벽에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었지만, 제2곡 운영담도 이 못지않은 풍경을 선보이기에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운영담은 맑은 날엔 구름 그림자가 비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기암절벽의 바위가 근사하게 자리하고 있고, 그 앞에 맑은 물이 하늘도 담고 나무의 신록도 담고 있다. 어찌나 물이 맑은지 당장이라도 수영하고 싶을 정도다. 다만 수심이 깊은 구간이 있어 안전사고에 조심해야 한다. 괴산군은 여름 물놀이 피서객들의 안전을 위해 수심이 깊은 구간에 부표를 설치하고 ‘수영금지’ 표지판을 설치하는 등 안전사고에 대비하고 있다.

Info 화양구곡
입장료 무료
주차료 승용차 5000원, 경차 2000원
주소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제2곡 운영담은 맑은 날 구름 그림자가 비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운영담 앞에서는 높이가 각각 185cm와 195cm에 달하는 하마비 두 개를 볼 수 있다. 하마비가 있는 곳을 하마소라고 하는데 이 하마소를 지나는 사람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화양서원 철폐령의 원인이 된 하마비
이제 운영담 앞 큰 길로 가보자. 따로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관광객들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위치에 돌기둥 두 개가 떡 하니 마주보고 있다. 이를 ‘하마비’라 부르는데 높이가 각각 185cm와 195cm에 달한다. 하마비가 있는 곳을 하마소라고 하는데 이 하마소를 지나는 사람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권오성 괴산군청 문화관광해설사는 이 하마소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고 말한다. “화양서원 유생들이 기세등등했던 시절, 하마소를 지나던 흥선대원군이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동묘를 지키는 유생들에게 발길로 봉변을 당했다”며 “이 사건 이후 흥선대원군은 서원 철폐령을 내려 서원들을 강제로 문 닫게 했는데 가장 먼저 철폐령이 내려진 곳이 바로 화양서원”이라고 한다.

폐허가 된 화양서원은 근래에 복원 공사를 일부 마친 상태다. 하지만 만동묘 출입문인 진덕문과 사당 앞에 세우는 홍산문 등 예산 문제로 복원이 되지 않은 곳도 있다.

우암 송시열의 유적지, 만동묘와 화양서원
송시열은 27세에 장원 급제를 하고 2년 뒤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조선의 정치사상계를 통일하여 지배 원리를 제공한 조선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송시열의 유적지로 알려진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그가 직접 지은 건물은 아니다.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지원한 명나라 황제 신종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그의 제자들이 1703년 화양동에 지은 사당이다. 

권오성 해설사는 “만동묘를 ‘명나라를 떠받들었던 사대주의적 장소’라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 만동묘가 지어진 연도는 1703년으로 명나라가 망한 지 60년이 지난 후였다”고 말한다. 즉, 이곳은 나라가 어려울 때 원군을 보내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공간이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지원한 명나라 황제 신종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그의 제자들이 1703년 화양동에 지은 사당이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화양서원은 충청도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만동묘와 맞닿는 곳에 자리한 화양서원은 충청도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노론의 학문적 기반이었던 이 서원은 조선 성리학을 완성시킨, 학문과 사상의 전당이었다고 한다. 본래는 만경대에 건립했으나 만동묘가 세워진 이후 만동묘와 왕래가 불편해지자 서원 수호의 이유로 1709년 겨울 만동묘 옆으로 이전한 것이다.

만동묘를 오르는 계단은 유난히도 가파르고 폭이 좁아 넘어지지 않으려면 허리를 굽혀 오를 수밖에 없는데,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연스레 허리를 굽혀 오르도록 설계된 것이라고 한다. 만동묘에 오르면 볼 수 있는 비석은 사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와 모시는 인물을 기록해둔 묘정비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고의로 자획을 정으로 쪼아 훼손하고 땅에 묻었으나 1983년 홍수 때 땅에 묻힌 것이 드러나면서 현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Info 화양서원
주소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자연에 폭 안긴 바위 위의 초가집, 암서재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지나 조금만 걸으면 제4곡인 금사당이 나온다. 금사당은 반짝이는 금빛 모래가 맑은 물속에 깔려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이곳에 초가 한 채가 자리한다. 바위 위에 지어진 초가라고 해서 ‘암서재’라 불리는 이곳은 송시열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했던 서재이다. 건물이 경치에 폭 안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변에는 우거진 소나무들이 자리하고, 나무 밑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그 사이에는 맑은 물이 감돌며 시원함을 더한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암서재는 바위 위에 지어진 초가라고 해서 이름 붙었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암서재에서는 선비들이 바위에 새겨놓았던 암각자도 볼 수 있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송시열은 암서재에서 금사당을 바라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돌계단을 따라 암서재로 올라가면 협문과 철책이 둘러져 있다. 본래는 낮은 담이었으나 보수를 진행하면서 담장 대신 철책을 둘렀다고 한다. 후대에 와서 기와를 얹고 작은 일각문도 세웠다. 본래 건물과는 조금의 변화는 있지만, 여전히 우아함을 자랑한다. 현재 암서재 안은 들어갈 수 없도록 폐쇄되어 있다.

암서재를 나오면 금사당 주변에는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 선비들이 바위에 새겨놓았던 암각자이다. 화양구곡의 암각자는 총 121건으로 전국 단일 구곡 중 가장 많다고 알려져 있다. 군데군데 숨어 있는 돌 위에 새겨진 글자들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자연이 만든 기암괴석, 첨성대와 능운대
암서재를 지나 산책로를 따라 가다 보면 화양3교가 나온다. 거기서 오른편 산꼭대기에는 제5곡인 첨성대가 자리하고 있다. 첨성대라고 하면 경주 첨성대를 먼저 떠올리기 쉽다. 제5곡 첨성대는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큰 바위가 첩첩이 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서 천체를 관찰할 수 있다고 하여 첨성대라 불린다.

그리고 왼편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제6곡인 능운대가 자리하고 있다. 능운대는 우뚝 솟은 바위가 구름을 찌를 듯해서 불러진 붙은 이름이다. 주변으로 상점이 붙어 있고 바위 중간에는 전선이 지나가는 등 구곡 중 가장 훼손이 많이 된 곳이지만, 여전히 기암괴석의 기묘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능운대를 지나쳐 앞으로 쭉 가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상점들이 있고, 능운대에서 위로 나 있는 길을 따라 150m 정도 올라가면 채운사에 도달한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제5곡 첨성대는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큰 바위가 첩첩이 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서 천체를 관찰할 수 있다고 하여 첨성대라 불린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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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곡 능운대는 우뚝 솟은 바위가 구름을 찌를 듯해서 붙은 이름이다.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채운사와 채운암. 사진 / 김혜민 여행칼럼니스트

고요한 사찰, 채운사
채운사는 구름을 찌를 듯한 바위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니 구름 위에 있는 사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찰은 1277년 도일선사가 창건하였으며, 본래 이름은 환장사라 불렸다. 중국의 유명한 유림의 결성 장소였던 ‘환장’에서 따온 이름으로, 송시열의 뜻에 따라 사찰 이름을 지은 것이다.

본래 도명산 골짜기에는 고려 때 창건한 채운암이 있었다. 그런데 큰 홍수와 산사태로 채운암이 무너지자 채운암의 건물 일부를 환장사로 옮겨 절을 확장하고, 절 이름을 ‘채운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현재 채운사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에 지정됐다.

고요한 사찰에서 들려오는 건 적막을 깨는 새소리와 계곡의 물소리뿐이다. 송시열이 암서재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듯 도명산의 절경이 펼쳐지는 고요한 사찰에서 휴식을 취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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