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순창] 태조 이성계가 스승 무학대사를 찾아 가는 길에 순창 한 농가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뛰어난 장맛에 반한 태조는 한양에 올라와서도 장맛을 잊지 못하여 순창에서 장을 진상하도록 했다는 게 순창 고추장의 전설.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가 16세기 임진왜란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태조가 먹은 장은 아마 된장이 아닐까 싶다. 어찌됐든 순창 고추장이 그 뛰어난 맛 때문에 수라상에 진상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순창 고추장의 반은 자연이 담근다. 순창 사람이 같은 재료를 가지고 다른 지방에 가서 만들면 제 맛이 나지 않는단다. 그 이유가 순창의 기후조건이 장이 발효하기에 딱 좋다는 것. 강한 햇볕이 태양초를 만들고 적절한 습도는 효모가 번성하기에 적합하다. 섬진강 상류인 순창의 맑은 물과 공기도 한몫 거든다.
이런 천혜의 자연조건에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왕가에 진상하느라 갈고 닦은(?) 할머니들의 솜씨가 곁들어지니 자연 장맛이 뛰어날 수밖에. 순창은 고추장 담그는 시기가 다른 지방보다 좀 빠르다. 음력 10월에 메주를 쑤고 이듬해 봄에 고추장을 담그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순창은 음력 7월에 메주를 쑤어 동지섣달쯤에 장을 담근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 담그면 당화 속도가 느리고 유산균 번식이 낮아 신맛이 생기지 않는단다. 순창에서는 아미산 아래쪽에 전통고추장마을을 조성하고는 고장 특산물로 대대적인 홍보와 지원을 하고 있다.
고추장마을을 들어서면 집집마다 ‘000 할머니’ 고추장이라고 크게 쓰인 현수막이나 간판을 볼 수 있다. 할머니 이름이 고추장 브랜드네임인 셈. 순창고추장이라고 다 같은 맛이 아니다. ‘명인고추장’ 조경자 할머니 말이 “집집마다 재료도 다르고 손맛도 다르다”고. 자기 입맛에 딱 맞는 집을 찾으려면 좀 돌아다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축구장만한 마을 앞 주차장을 보니 전국 곳곳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여행객들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훤하다. 해질 무렵 고추장 마을을 바쁘게 오가는 차들이 있어 유심히 보니 택배회사 차량이다. 인터넷이나 홈쇼핑 등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들어온 고추장을 배달하기 위해 집집마다 고추장을 수거하느라 돌아다니는 것.
예전에 왕실에 진상하려면 몇날 며칠을 걸려 수레로 옮겼을 것이다. 이제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마우스를 클릭만 하면 진상품을 맛볼 수 있는 세상. 그래도 순창 고추장의 맛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