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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유교문화기행] 스승의 그림자가 아름답게 드리워진, 소수서원
[유교문화기행] 스승의 그림자가 아름답게 드리워진, 소수서원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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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소수서원의 모습. 2003년 8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소수서원의 모습. 2003년 8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단종복위운동으로 죽은 이들의 혼이 죽계천을 떠돌며 곡소리를 내자 주세붕 선생이 '경'자에 붉은 칠을 하고 제사를 지낸 후 곡소리가 그쳤다 했다. 2003년 8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단종복위운동으로 죽은 이들의 혼이 죽계천을 떠돌며 곡소리를 내자 주세붕 선생이 '경'자에 붉은 칠을 하고 제사를 지낸 후 곡소리가 그쳤다 했다. 2003년 8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여행스케치=경북] 오백살 먹은 소나무도 고개를 숙인다는 소수서원. 건물의 공간 배치조차 스승에게 예의를 지켜서 만든 소수서원. 강학당 툇마루에 앉아 그 옛날, 글 읽는 소리를 듣는다.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1542년) 때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인 회헌 안향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사원을 설립하였다가 그 다음 해에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이 서원의 시초이다. 1548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서원을 공인화하고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상소했다.

명종 (1550년)이 직접 ‘소수서원’이라 이름을 지어서 편액에 새기고 토지, 노비, 서적과 함께 하사하니,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최초의 사립대학’으로 미국의 하버드대학보다 93년이나 앞서 세워졌다고 한다.

학구재와 지락재의 모습. 2003년 8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학구재와 지락재의 모습. 2003년 8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뒷짐을 지고 그 옛날 선비가 되어보자
매표소를 지나면 적송 군락지가 있다. 붉은 소나무를 적송이라 하는데 소수서원 둘레의 적송은 삼백년에서 많게는 천년을 산 늙은 소나무들이다. 특히 이 적송은 학자수라고 불려지는데 늘 푸른 소나무처럼 절개를 지키는 참선비가 되라는 의미란다. 적송 사이로는 ‘당간지주’가 있다.

서원이 세워지기 전에 이 터에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 임금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동생인 ‘금성대군’이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다가 탄로가 났다. 많은 이들이 죽고 ‘순흥도호부’도 없어진다. 그 때 숙수사도 함께 불타 없어지고 유일하게 당간지주만 남았다.  

소수서원 입구의 정자를 경렴정이라 한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지은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중의 하나이다. 그 옆의 오백살 먹은 은행나무가 운치를 더 한다.

경렴정 맞은 편 언덕 위로 큰돌이 몇 개 있다. 이 곳은 소혼대라 하는데 유생들이 공부를 하다가 머리를 식히는 장소이다. 홍전문을 들어서니 빈 서원에 매미 혼자 글을 읽는다 소나무 사이를 지나 소수서원의 문인 홍전문 앞에 서 있다.

당시는 입학생이 1년에 2명에서 30명 내외였다고 한다. 주로 향교를 졸업한 유생들이었고 편부, 편모슬하의 자제는 입학이 되지 않았다 한다. 현재도 대학에 들어가면 큰 일을 해낸 것처럼 대견해 하는데, 그 옛날 이 문을 들어가는 유생들의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홍전문을 지나 고개를 뒤로 돌리면 소나무들이 서원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자연의 현상인지 아님 진정 서원에 대한 존경으로 나무가 그렇게 자랐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신기하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강학당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던 곳으로 지금의 교실이다.

전청후실로 된 건물로서 앞쪽은 강의실, 뒤쪽은 방으로 되어있다. 배흘림기둥 양식이며 툇마루가 사방으로 둘러 있다. 툇마루 끝에 한 뼘 정도의 턱이 올라와 있는데 학생들이 스승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으로 걸어나가다 떨어지지 못 하도록 만들었다 한다.

'工'자 형의 3칸자리 학구재. 2003년 8월. 사진 / 김연미 기자
'工'자 형의 3칸자리 학구재. 2003년 8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직방재는 원장(대학 학장)의 숙소이고 일신재는 일반교수들의 숙소이다. 직방재 왼쪽으로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는데 학생들의 기숙사이다. 학구재는 3칸으로 지어졌으며 공부 잘 하라는 의미로 건물이 工자형의 구조라고 한다.

옛 사람들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던가, 스승의 거처보다 제자의 기숙사는 두 칸 물려서 지었으며 스승의 거처보다 방 높이를 한자 낮추어서 지었다. 이 건물을 보고 있으면 스승에 대한 예우를 얼마나 정성스럽게 했는지, 건물 공간으로 위 아래가 확연히 구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서각(도서관). 2003년 8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장서각(도서관). 2003년 8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직방재 오른쪽에 있는 장서각은 대학도서관으로 3천 여권의 장서가 보관되었던 곳인데 현재는 대부분 도난당하고 몇 권만이 남아있다. 그외 제사용 그릇 등을 보관해 두던 곳인 전사청이 있고, 안향 선생과 주세붕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 서원 관리인이 거처하던 고직사, 현판, 목판 등이 보관된 유물관, 사료전시관 등이 있다.

소수서원은 1888년에 마지막 학생을 길러내고 문을 닫는다. 신식학문이 들어오면서 유학에 대한 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강학당 툇마루에 앉아서 파란 하늘을 본다. 까마득히 새털구름이 떠다니는데 유생의 글 읽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백년 생 은행나무에 기대서 우는 매미 소리만 시끄럽다.

알아두세요
영주시청 문화관광과는 영주의 문화유산을 소개해 주는 자원봉사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소수서원, 부석사 등 영주의 다양한 문화재를 재미있게 들을 수 있다.

가는 길
자가운전 -> 경부(중부)고속도로 -> 신갈(호법)IC -> 영동고속도로 -> 만종분기점 -> 중앙고속도로 -> 풍기IC -> 순흥 -> 소수서원( 풍기에서 15분 소요됨.)  
버스 이용 -> 동서울고속버스터미널 -> 영주 (2시간 30분 소요. 요금 12700원) -> 시내버스( 영주시외버스터미널 길 건너편) -> 풍기, 순흥행 버스 이용 (40분 정도 소요됨.)
기차 이용 -> 서울 청량리역 -> 풍기역 (1일 10회) -> 풍기버스정류장 (역 앞에 위치) -> 순흥 (25분 정도 소요.) / 입장료 소인 550원 대인 1100원

밥 먹고 쉬었다 가세요
풍기인삼갈비는 인삼과 몸에 좋다는 한약재 11가지 (유근피, 상백피, 황기, 음양곽, 둥굴레 등)를 14시간 동안 달인 물에 재워둔 영양식 갈비다. 고기비린내가 나지않고 육질이 부드럽다. 

소수서원의 현판 모습. 2003년 8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소수서원의 현판 모습. 2003년 8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퇴계 이황 선생과 평민 제자 배순
퇴계 이황이 소수서원에서 유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다. 당시 무쇠장이 배순은 소수서원에 놋그릇이나 여러 집기들을 납품하는 자였다. 신분은 낮았지만 배움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배순은 강학당에서 글을 읽는 유생들이 부러워서 자주 강학당 근처를 기웃거렸다.

어느 날 퇴계 선생이 글을 가르치는 데 밖에서 기웃거리는 배순을 보고 불러서“왜 자꾸 기웃거리느냐 배우고 싶냐?”하고 물었더니 배순이 “예”하고 대답했다. 퇴계 선생은 흔쾌히 “그럼 내일부터 와서 배워라”하고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

배순이 너무 기뻐서 집으로 돌아가서 놋물을 부어 퇴계의 흉상을 만들어서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드리고 퇴계의 가르침을 받았다.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을 마치고 고향에서 도산서당을 경영하며 학문에만 정지하다가 돌아가신다.

후에 뒤늦게 스승이 돌아가심을 안 배순이 스승의 하직을 지켜보지 못한 불충을 한탄하며 자기 집 옆에 초막을 짓고 삼년상을 지낸다. 선조가 승하하자 높은 산에 올라가 보름 동안 한양을 바라보며 제를 올렸다.

배순은 죽고 그의 손자대에 가서 선조의 아들 광해군이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자기 아버지인 선조에게는 충신이요, 퇴계에게는 훌륭한 제자이니 ‘충신백성 배순지례’라는 정려비를 내렸다. 정려비는 현재 국망봉산 밑 배점이라는 동네에 비각으로 있으며 그의 묘표석은 현재 소수서원 사료전시관에 있다.

가는 길에 들러보세요
청구리 입석바위 입석바위란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곳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워놓은 자연석 돌을 말한다. 보통의 입석은 당산나무 밑에 한 개만 서 있는데 청구리 입석은 두개가 서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것은 가까이 있는 두 동네의 음기를 잡기 위한 것이라 한다. 서쪽에 자라 잡은 여근곡 (여성의 성기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마을의 음기를 잠재우기 위해서 그 앞에 한 개가 세워져 있고 다른 한 개는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풍수지리상으로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안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마을의 좋은 기운이 나가는 것을 막고 외부의 나쁜 기운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이 입석은 남성의 성기를 닮아서 기자석 (아들 낳기를 바란다는 뜻)이라 부르기도 하고 선돌이라고도 한다.

가는 길 쮝 소수서원에서 부석사 방향으로 5분 정도 가면 청구리 버스정류장이 있고 좌측으로 200m쯤 들어가면 논 가운데 소나무 몇 그루가 섬처럼 서 있다. 그 속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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