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한결가족의길 이야기] 해맑은 부부의 싱그런 마음 같은 차 맛, 쌍봉다원
[한결가족의길 이야기] 해맑은 부부의 싱그런 마음 같은 차 맛, 쌍봉다원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10.0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유기농으로 재배한 차밭 곳곳에 부부의 손길이 담겨 있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유기농으로 재배한 차밭 곳곳에 부부의 손길이 담겨 있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여행스케치=화순] 방안 가득한 차향기가 달빛을 유혹했을까. 보름달이 되려면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할, 반달의 은은한 빛이 창호지를 넘어 방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아 황토와 나무가 그대로 드러난 방안에서는 지금 다섯이서 찻잔을 앞에 두고 도란도란 웃음꽃을 피우는 중이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노곤한 몸을 다정한 맘에 부려놓고 다담(茶談)을 나눈다. 얼굴마다 넉넉하고 잔잔한 미소가 연신 번진다. 하이얀 찻잔에 연록의 찻물이 연한 고소함을 은근하게 발하는 가운데 산중의 밤이 짙어간다.

오늘은 깊은 산 속에 조용히 숨어 있는 차밭을 찾았다. 광주에서 화순읍을 지나고 능주, 춘양, 이양면도 지나 화순 쪽으로 향하다 보면 이양면 증리의 계당산 골짜기에 자리 잡은 ‘쌍봉다원’. 한결이에게 차가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직접 체험하면서 느끼도록 현장학습을 겸해 찾은 것이다.

차는 어린 잎을 따서 볶아, 말린 것이 좋다고 한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차는 어린 잎을 따서 볶아, 말린 것이 좋다고 한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차를 마시는 마음은 넉넉하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차를 마시는 마음은 넉넉하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아직 찬바람이 가득한 지난 2월 이곳을 찾았었는데, 얼굴이 아해같이 해맑은 주인장이 “어서 새 차 따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수줍은 듯 말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올해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차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다”며 소년처럼 설렘을 보였다.

“꼭 찾아와 그 맛을 봐 달라”는 어여쁜 약속도 건넸다. 쌍봉다원과 우리가족의 인연은 세월을 제법 거슬러 올라간다. 97년 어느 봄날, 화순 ‘쌍봉사’의 주지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산책길에 나섰다가 1km 남짓 떨어진 이곳에서 ‘그야말로 해맑은, 숨겨진 보물’ 같은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번잡한 도시를 훌훌 던져버리고 산골짜기로 접어든 ‘자유인’이었다. 96년,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진 산기슭에 그네는 비닐로 움막을 짓고 땅을 갈아 차 씨앗을 뿌렸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쑥대 무성한 묵정밭의 비탈에서 하루 종일 괭이와 삽으로 천천히 차밭을 일궈갔다. 위쪽에 하나밖에 없는 마을 사람들은 화순에는 전혀 자라지 않은 차나무를 가꾸겠다는 젊은 부부를 애잔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쌍봉 다원에 걸려있는 목어. 2003년 10월. 사진제공 / 쌍봉다원
쌍봉 다원에 걸려있는 목어. 2003년 10월. 사진제공 / 쌍봉다원

봄이면 쑥대밭 다듬어 씨앗 뿌리고 풀 뽑고 하루해가 짧았다. 가을이면 퇴비 주느라 허리가 다 빠질 지경이었다. 농사를 전혀 지어보지 않았던 터라 모든 게 서툴기만 했다. 몸만 고달프지 일은 진척이 없었다. 게다가 완전 유기농법을 도입했기에 비료 한 줌, 제초제 한 방울 뿌리지 않았다. 며칠만 손길이 닿지 않으면 잡초는 어린 차나무를 덮기 일쑤였다.

그렇게 세월이 훌쩍 흘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드디어 2000년부터 본격적인 수확에 들어갔다. 망설일 것도 없이 ‘쌍봉차’로 이름 지었다. 그네들이 살고 있는 집도 ‘쌍봉다원’으로 자연스레 옷을 입었다. 그 세월 사이로 우리가족은 숨겨둔 보물을 찾듯 아끼고 아끼면서 발길을 이었고, 발길을 둘 때마다 그네들의 무공해 삶이 우리가족에게 전이되어 끈끈한 연대감 뿐 아니라 가족사랑도 더 다져졌다.

가족 셋이 도중에서 만나 서두르며 재촉해 찾아갔는데, 벌써 한나절의 일이 끝나 있었다. 새벽 5시 30분부터 마을 어르신 네 분과 함께 따낸 찻잎이 네 소쿠리가 넘었다. 그 가운데 소쿠리 둘 분량은 이미 차로 만들어져 항아리 속에 들어가 있었다.

차를 만들때는 음식도 가리며 정성을 쏟는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차를 만들때는 음식도 가리며 정성을 쏟는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차를 만들 땐 육식도 피한다
맑은 날, 새벽이슬 머금고 있는 잎이 가장 좋기에 찻잎 따기는 항상 아침 일찍 이루어진다. 늦었지만 공부삼아 우리가족도 찻잎을 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차를 덖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지난겨울, 눈 속에서 끌고 와 일일이 도끼질해 패 놓은 소나무 장작으로 무쇠 솥을 달궜다. 물기가 닿기만 하면 톡톡 튀어 오르는 400도에 이르자 찻잎을 넣고 덖기 시작했다. 양손은 두꺼운 면장갑을 끼고 입은 마스크로 무장한 채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 뜨거운 가마솥 안에서 손만 부지런히 놀렸다. 처음 덖어지는 찻잎은 풋풋한 풀냄새가 강하게 났다.

이윽고 덖어진 찻잎을 짚덕석에 쏟고 비비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선 손을 씻고 머리카락을 가리고 양말도 갈아 신어야 한다. 네 명이서 한 귀퉁이를 차지한 채 뜨거운 김이 훅훅 나는 찻잎을 빨래 빨 듯 연신 비벼댔다. 여리디 여린 찻잎들이 그렇게 주물러대도 으깨어지거나 부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정성스런 마음으로 여린 찻잎을 주무른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정성스런 마음으로 여린 찻잎을 주무른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양이 절반 정도로 눈에 띄게 줄었다. 한결이는 연신 “너무 아깝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낸다. 찻잎에서 빠진 진으로 손이 끈적끈적하다. 다시 가마솥에 붓고 덖는다. 그 사이 양은 또 눈에 띠게 줄었다. 가마솥에서 분출되는 열기에 불덩이처럼 달아 오른 몸뚱이, 쉴 새 없이 빠르게 묵묵히 손을 놀리는 주인장의 모습은 도를 닦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덖는 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 우리는 찻잎을 다시 덕석에 쏟고 또 비볐다. 아직도 풋내는 가시지 않았다. 손에 착착 붙는 진기는 더 강해졌다. “찻잎은 잘게 썰어서 말리는 줄 알았다”며 한결이는 너무 신기해하고 직접 참여해 배울 수 있음에 참으로 고마워한다. 어렸을 때부터 차 마시기를 좋아한 녀석에게 얼마나 좋은 공부인지….

그렇게 반복하길 두어 시간. 네 번째 덖을 때부턴 향이 여려지면서 제법 고소한 향내가 작업장에 고이기 시작했다. 생기를 머금고 푸른빛이던 찻잎도 점차 그 빛을 잃으면서 진하게 변해갔다. 양은 처음처럼 줄어들지는 않는다.

수분이 점차 빠지고 고슬고슬한 녹차가 되어가면서 끈기도 줄어들고, 다섯 번째부터는 심하게 비비지 않았는데 부스러지기도 한다. 가마솥에 넣고 덖기 시작한 지 세 시간, 꼭 아홉 번을 거듭하자 더 이상 덖을 필요가 없을 만큼 바짝 말랐다. 드디어 차가 완성된 것이다.

처음 솥에 넣을 때 두 소쿠리가 가득했던 찻잎은 반 소쿠리도 채 못 되게 줄어들었다. 그나마 오늘은 우리가족의 참여로 한 시간이 덜 걸린 것이라 한다. 편하게 먹었던 녹차가 새삼 소중한 보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볕이 한가롭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활짝 열린 창문으로 볕이 한가롭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그 사이 해님은 서쪽 산에 걸렸다. 새벽 5시 30분부터 시작했다는 하루 일이 마무리되고 있다. 인연의 배려로 참여시켜준 것만도 고마운데, 일을 했다고 저녁까지 준비해 정을 주신다. 밥상은 완전 풀밭이다. 일이 고될 때는 부부가 먹기라도 잘 해야 한다며 고기를 사 가지고 갔는데….

“차를 수확하고 만드는 기간에는 절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밥상을 민망해 한다. “다른 냄새가 차에 배지 않도록 마늘이나 파 등의 향료도 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누가 이 마음을 알아줄까?’ 하긴, 누구에게 자랑하거나 알아주길 바라는 부부도 아니다. 당신들이 지닌 사람의 예의와 정성이리라.

다원의 진돗개와도 금새 친구가 된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다원의 진돗개와도 금새 친구가 된다. 2003년 10월. 사진제공 / 한결가족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쯤, 두 가족 다섯 명이 다기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은은하고 고소한 차 맛보다 부부의 해맑은 모습을 마주 할 수 있음이 우리 가족에겐 더 행복한 시간이다. 가벼운 세상사를 놓고 이어지는 대화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지간하면 짜증을 낼 시간이 됐는데 되레 이곳에서 자고 가면 어떻겠냐며 한결이가 조른다. 흔치 않은 일이다. 밖으로 나오니 언제 이처럼 시간이 흘렀느냐 싶게 9시를 넘긴 어둠이 깊었다. 방안을 엿보던 반달은 더욱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고 그 주위엔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뿌려져 있다.

언덕길에서 바라본 ‘쌍봉다원’의 녹차 밭은 달빛 별빛을 머금어 신비로운 느낌이다. “우리 둘이 살자고 집을 짓겠어요?”라고 말하던 마음 넉넉하고 고운 부부, 자연을 닮은 해맑은 얼굴 그대로인 무공해 부부를 독차지한 오늘, 우리가족도 때가 좀 벗겨졌을라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