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고향에 묻어둔 꿈] 빗방울도 가슴에 스며 함께 바다가 되는 고향, 묵호
[고향에 묻어둔 꿈] 빗방울도 가슴에 스며 함께 바다가 되는 고향, 묵호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11.0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묵호 앞바다. 2003년 1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묵호 앞바다. 2003년 1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여행스케치=동해] 초록보다 더 진한 그리움이 물살에 부딪쳐 바다를 이루는 곳이 있다. 비릿한 물비린내에 눈뜨고 새벽 여명이 손짓하는 수평선으로 뿌우우 하루를 시작하는 곳 내 고향 묵호가 그런 곳이다.                   

기억나지 않는 어린시절, 처음 숨쉰 하늘은 강원도 속초이지만 묵호는 잊지 못할 정신적 그리움의 장소이다. 정동진을 끼고 바다로 바다로 흐르다보면 골치 아픈 오늘을 잊어버릴 수 있는, 망상해수욕장을 지난다. 이어 대진항을 끼고 돌아 하얀 등대를 스치면 자그마한 항구에 묵호를 만날 수 있다.

크고 작은 돌들이 바다를 끼고 앉은 곳. 섬을 만나면 아이들은 바다에 돌 하나를 던져놓는다. 조약돌이 커서 꿈을 먹으면 내 키보다 커다란 섬이 된다고 몇 밤이 지난 다음 다시 돌아와 내 섬이 있는지를 확인하며 꿈을 키우던 곳.

묵호항 전경. 2003년 1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바닷바람도 쉬었다 가는 아늑한 마을. 2003년 1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어촌 아낙들을 따라온 바다가 졸고 있는 사이, 바닷가 사람들은 검푸른 호수 닮은 파도를 말려 미역으로 걷어 들이고, 어린 아이들은 오징어 뒷다리 하나씩 물고 통통 배를 기다리며 허기진 엄마의 사랑을 잊어가던 곳. 비가 내리는 날, 어둠속에서 바다는 안개를 따라 슬금슬금 육지를 밟고 등대는 한줌 빛으로 언제나 한결같은 자리를 지켜주던 곳, 산마다 옹기종기 사람도 나무처럼 모여 사는 곳.

시험공부를 하다 창문을 열면 캄캄함 세상이 앞으로 밀려와 쏴와와와 스르르르… 감긴 눈 속에 소라의 노래를 들려주던 곳. 내 고향 묵호. 아이들보다 더 많던 오징어. 추운겨울이면 고향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동태들이 원양어선을 타고 온다. 집집마다 만들어놓은 덕장에서 동태는 모진 겨울 바람맞으며 입맛 당기는 황태가 되고.

지금은 사라져 아쉬운 기억만으로 남아 있는 그 옛날의 지게장이들, 그들이 하루 품을 팔며 환하게 웃던 활기찬 항구. 명란과 창란이 서울행 박스에 하나 가득 채워지면 상급학교로 진학을 꿈꾸는 여학생의 희망이 함께 곰삭아 맛을 이루어 내고, 참 따사롭고 기운찬 기억들이 남아 있다.

묵호항 풍경. 2003년 1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묵호항 풍경. 2003년 1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중학교 2학년까지 묵호의 파도와 소금끼를 마시며 자랐다. 경찰관이셨던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묵호읍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셨다. 난 아버지 등뒤에 앉아 묵호의 쪽빛 바다를 내다보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루 하루 성장하였다.

문어가 사람을 따라와 죽으며 바위가 되었다는 등골 오싹한 전설의 어달리 까막바위. 그 까막바위를 지나 돌아올 때면 얼마나 많은 무섬증으로 달음질 쳤는지…. 어른이 된 지금 기약할 수 없는 세월을 등지고 먼 바다를 향하여 선 까막바위를 보면 자연을 따라 생성되고 소멸하는 삶을 그리고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아버지가 떠오른다.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손끝에 자녀들의 희망이 영근다. 2003년 1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손끝에 자녀들의 희망이 영근다. 2003년 1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축항을 따라 가며 부르던 노래와 수많은 책과 물결과 그 바다와 등대 그리고 노을 진 해변. 해변 길을 따라 작은 아이의 미래는 모래처럼 바위처럼 섬처럼 영글어 어른이 된 지금, 파도는 잔잔하고 강렬한 또 하나의 시가 되고 주머니마다 탱탱한 언어들이 바다가 되어 작은 아이의 고향이 되었다.

아버지가 어부였다면 바다는 내게 묵호항 어판장의 치열한 삶 같은 기억을 남겨 주었을는지도 모르겠다. 독이 올라 동그랗게 부어버린 복어, 그물을 깁는 순이 엄마의 주름살 같은, 잔잔하다가도 때로는 무섭게 성내는 바다. 하지만 바다는 언제나 내게 머나먼 수평선과 함께 아름다운 존재였다. 그 파아란 실타래를 풀어낼수록 나도 함께 바다에 녹아 내 꿈도 파아랗게 젖어들었고 지금 나는 시인이 되었다.

묵호항에 해가 뜬다. 붉은 해가. 2003년 1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묵호항에 해가 뜬다. 붉은 해가. 2003년 11월. 사진 / 여행스케치 DB

그리움이 나를 흔들면 언제나 배낭하나 메고 와 묵호를 만난다. 빗방울도 가슴에 스며 함께 바다가 되는 고향. 기나긴 방파제와의 해후가 늘 새롭다. 그대 외롭거든 주저 없이 떠나라. 묵호를 향하여.

묵호

                              강성연

까아만 조개껍데기
찰랑이는 물결을
친구삼아 노래하고
성게며 소라며
바다는 언제나 내게서
파아란 수평선을 수 놓았다
무한한 삶의 공간에 서서
실타래처럼 풀어지던
긴 이야기담은 검은 호수
작은 묵호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