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우리문화기행] 21세기에도 살아있는 조선의 숨결, 경주 양동 민속마을
[우리문화기행] 21세기에도 살아있는 조선의 숨결, 경주 양동 민속마을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12.1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조선시대 가옥이 그대로 쉼쉬는 경주 양동 민속마을의 풍경.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조선시대 가옥이 그대로 쉼쉬는 경주 양동 민속마을의 풍경.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여행스케치=경주] 도대체 처갓집과 화장실은 멀어야 한다는 말은 언제 왜 나왔을까? 양동민속마을을 돌아보다가 그 동안 알고 있었던 ‘우리의 옛 속설’이 왜곡된 것이고, 남녀 차별도 없는 멋진 사회였음을 알았다.

마을이 형성된 과정만 해도 그렇다. 조선시대 양반가로 이름난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집성촌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손씨와 이씨가 이 곳에 뿌리내리게 된 경위가 처가를 따라 들어온 것이란 내용은 몰랐다.

경북지방고문서집성에 따르면 여강 이씨인 이광호가 이 마을에 거주했는데 그의 손녀 사위로 풍덕 류씨 문중의 류복하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다. 류복하의 무남독녀는 월성 손씨 문중의 양민공 손소와 혼인하였는데, 손 공도 처가 마을로 이주하여 살았다.

한편 이광호의 재종증손인 찬성공 이번이 손 소의 장녀와 결혼하였는데, 역시 영일에서 양동으로 이사와 살았다. 이번의 맏아들이 바로 동방 5현으로 불리는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이다.

조선 양반들은 출가외인이라하여 딸을 시집보내면 그걸로 끝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남자가 처가를 따라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남존여비 사상이 대체 언제 끼어들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아담한 마을 길들이 정겹다.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아담한 마을 길들이 정겹다.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유형문화재 제 14호로 지정된 손소 선생 분재기(分財記)를 봐도 5남2녀의 아들딸들이 사후에 모여 전답과 노비 등 재산을 서로 합의해서 나누는데 남녀 구분 없이 똑같이 나눈 사실을 알 수 있다. 장남이라 더 주고 딸이라 덜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동민속마을은 1984년 마을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전국 6개 민속마을 중에서 규모나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을길을 다니다보면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조선시대로 건너온 듯한, 또는 TV사극의 배우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유심히 살펴보면 전봇대와 전선줄, 빨갛고 파란 요즘 살림살이들이 뜨이긴 하지만 산등성이를 덮고 있는 기와지붕들과 고루 거각, 돌담에 밀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입구에 있는 초등학교 지붕도 기와로 엮었는데, 멀리서 볼 땐 박물관인줄 알았다.

마을에는 답사행렬이 끊이지 않는데 대개 견학을 온 학생들이 많다. 그밖에 사진을 촬영하러 온 사람, 문화재나 고건축을 연구하는 사람 등등 동네 어귀가 닳도록 드나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에 변변한 식당이 없다는 게 놀랍다.

두세 집 식사를 파는 곳이 있기는 한데 살고 있는 집을 약간 개조해서 식당으로 이용하는 정도이다. 관광객이 좀 몰린다 싶으면 음식점과 숙박업소들이 벌떼처럼 몰려드는 게 요즘 세상인데 이 곳 사람들은 확실히 살고 있는 시대가 다른 모양이다.

양동마을의 경제력은 드넓은 안강평야에서 나온다.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양동마을의 경제력은 드넓은 안강평야에서 나온다.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찾아오면 대개 지세를 먼저 본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설창산 문장봉에서 뻗어내린 산등성이가 안강평야로 치닫다가 네 줄기로 능선이 갈라지며 말 물(勿)자 형태를 이루기에 물봉산(勿峰山)이라 한다. 이 산곡이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을 역수로 안는 형태를 하고 있어 마을에 부를 가져다준다고 한다.

물봉산 골짜기 또는 능선 곳곳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마을을 좀더 들여다보면 내곡(內谷), 물봉골, 거림(居林), 하촌(下村) 등 네 골짜기와 두개의 산등성이, 물봉골 넘어 갈구덕(渴求德)으로 나뉜다. 또 해마다 정월 보름을 앞뒤로 해서 ‘줄다리기’를 할 때는 손씨 종가를 축으로하는 웃말, 관가정을 중심으로 하는 아랫말로 편을 가른다.

양동마을의 전통 줄다리기는 인근 지방에까지도 널리 알려진 유명한 마을 행사이다. 우선 줄의 굵기만 해도 10살짜리 아이의 키를 넘었다는데 집집마다 몇날 며칠을 꼬아서 만든 줄을 다시 또 엮어서 큰 줄을 만들었다고 한다. 줄다리기는 온종일 치러지는데 힘이 달리면 인근 마을에 지원군까지 불러들여 한바탕 결전을 벌이는 마을축제였다.

여강 이씨 문중의 서당인 강학당. 조선시대 양동마을에서 배출한 과거급제자만 1백 16명에 이른다고.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여강 이씨 문중의 서당인 강학당. 조선시대 양동마을에서 배출한 과거급제자만 1백 16명에 이른다고.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한밤중 가서야 결판이 나는데 윗말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아랫말이 이기면 마을에 안정이 찾아온다고 여겼다니 어느 편이 이겨도 좋은 윈-윈 게임이었다. 마을의 경제력은 바로 앞 안강 평야에서 나왔다. 30년대까지만 해도 천석꾼이 다섯 집이나 됐단다.

안락천과 형산강이 이 평야를 흐르는 데 마을 위쪽에 안계댐이 생기기 전인 옛날에는 고깃배들이 마을 어귀까지 들어와 해산물도 풍성했다고 한다. 평야가 있고 강이 흐르고, 해산물까지 부족함이 없었으니 살기에 더 바랄게 없는 마을이었다.

그래서인지 인물도 많이 나와 조선시대에는 과거급제자만 1백16명이나 배출됐다. 그 중에서도 회재 선생은 성리학의 이기철학의 체계를 세운 대유학자로 퇴계 선생이 유일하게 ‘스승’이라고 부른 인물이다. 해동부자(海東夫子)로 불렸던 그의 위패는 역대 임금과 공자와 함께 모셔지고, 전국의 향교와 20여개소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유치원생들이 걸어가는 뒷편 가옥이 향단이다.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유치원생들이 걸어가는 뒷편 가옥이 향단이다.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양동민속마을 가옥들은 대부분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가옥만 해도 무첨당, 향단, 관가정 등이 있다. 서백당, 낙선당, 사호당, 상춘헌, 근암고택, 두곡고택, 수졸당 등등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도 12채에 이른다.

이렇게 가옥들 하나하나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해놓고 또 마을 전체를 중요민속자료로 다시 한번 지정해 두었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좀 불편해 한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니 함부로 개조를 할 수가 없어 아직도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있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양반의 대저택 아래는 가립집이라 불리는 외거 하인의 초가집들이 서너채씩 있었다.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양반의 대저택 아래는 가립집이라 불리는 외거 하인의 초가집들이 서너채씩 있었다.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가옥들은 대개 ㅁ자형 구조로 지어져 있는데 앞쪽에 사랑채나 행랑채가 있고 뒤쪽에 안채와 부엌을 두었다. 종가와 종가에서 갈려나온 파종가의 가옥 뒤에는 사당들이 있고 정자 형태로 지은 사랑채 앞마당은 넉넉하다. 양반의 대저택 아래는 외거 하인이 살던 가립집이라 부르는 초가집이 서너 채씩 있다.

월선 손씨의 종가 서백당(書百堂)과 중종이 회재 이언적 선생의 모친 병간호를 배려해 지어 준 향단, 성종과 중종 양대에 걸친 명신 우재 손중돈 선생의 관가정 등은 조선시대 대저택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상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맏손자 이의윤 공의 호를 딴 무청당의 모습.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조상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맏손자 이의윤 공의 호를 딴 무청당의 모습.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집집마다 걸려있는 정자와 루의 편액을 읽고 그 뜻을 새겨 보는 재미도 쏠쏠한데 ‘서백당’이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다. 회재의 부친 이번 공이 살던 ‘무첨당(無?堂)’은 여강 이씨의 종가로 회재의 맏손자 이의윤 공의 호이다. 훌륭한 조상에 욕됨이 없이 산다는 뜻.

관가정은 그 이름처럼 안강평야와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 맞은편 성주산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이다.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관가정은 그 이름처럼 안강평야와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 맞은편 성주산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이다. 2003년 12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무첨당에는 또 ‘좌해금서(左海琴書)’란 편액이 걸려있는 데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에 방문을 해서 쓴 것이다. 그 의미는 ‘영남(左海)의 풍류(琴)과 학문(書)’. 앞산인 성주산을 마주본다해서 대성헌(對聖軒), 글자 그대로 하면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지만 마음으로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속뜻이 더 깊은 관가정(觀稼亭) 등등. 옛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새기면 새길수록 깊고 운치가 있다.

마을길을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야트막한 담장이나 대나무 숲, 갖가지 화초로 가꾸어진 길들이 집 앞으로 뒤로 오르락내리락 돌고 도는데 걷다보면 어디선가 머리 땋은 개구쟁이들이 뛰어나올 것만 같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