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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영화의 무대를 찾아서] 슬픈 영혼들이 노니는 섬, 인천 실미도
[영화의 무대를 찾아서] 슬픈 영혼들이 노니는 섬, 인천 실미도
  • 강미경 객원기자
  • 승인 2004.03.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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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실미도 풍경. 2004년 3월. 사진 / 강미경 객원기자
앙상한 가지가 실미도의 슬픔을 가른다. 썰물로 드러나 실미도로 통하는 바닷길이 보인다. 2004년 3월. 사진 / 강미경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인천] 오후 햇살이 실미도로 통하는 바다길로 내리 비치고 있었다. 실미도를 바라보고 선 실미해수욕장의 모래는 참 곱다. 썰물로 배를 드러낸 바닷길 모래와 갯벌은 굴 껍질이 흩어져 있어 어수선하다. 그래도 <실미도> 영화 셋트장도 구경하고, 돌멩이라도 만져보아야 한다는 책임감(?)에 거꾸로 섬 쪽으로 내달렸다. 갯벌에 옷 버릴 새라 바지 둘둘 말고….                      

실미도는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서 이어지는 무의도의 새끼섬으로 불린다. 인천에서 남서쪽 직선거리로 20Km. 자동차로 영종공항에서 잠진 선착장까지 30여분. 공항에서 306번(요금 3천원)을 타도된다.

아니면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에 내리면 선착장 오른쪽에 무지하게 큰 버스터미널이란 표지가 있다. 그 곳에서 203번 버스(요금 1천2백원)를 타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웅장한 인천공항을 구경하면서 가는데, 1시간 반이면 잠진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다.

겨울추위에 발 묶인 소형낚싯배. 2004년 3월. 사진 / 강미경 객원기자
겨울추위에 발 묶인 소형낚싯배. 2004년 3월. 사진 / 강미경 객원기자
68년 실미도 모습 그대로 재현해 낸 세트장. 2004년 3월. 사진 / 강미경 객원기자
68년 실미도 모습 그대로 재현해 낸 세트장. 2004년 3월. 사진 / 강미경 객원기자

썰물시간이 되면 무의도로 건너는 카페리호가 뜨지 않는다. 자칫하면 바로 코 앞의 무의도를 바라보며 족히 3~4시간은 매표소에서 기다려야 하는 수도 있다. 바로 같은 시간이 실미해수욕장에서 실미도로 들어가는 바다길이 열리는 때이다. 밀·썰물시간이 날마다 달라지기 때문에 결항시간도 매일 바뀐다. 매표소나 무의아일랜드 펜션으로 문의하고 여행을 시작하면 제때를 맞출 수 있다.

실미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섬은 해발 80m의 가로로 길쭉한 모양이다. 섬 아래로는 바위투성이고 위로는 소나무들이 뒤엉켜있는 전형적인 무인도의 모습.

실미도의 비극은 해수욕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섬 뒤편에서 시작된다. 섬 주민들의 눈을 가려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미도를 기억하고 있는 한 할머니가 유난히 굴 껍질이 많은 바닷가로부터 발바닥에 피를 흘리며 마을로 들어서던 한 군인을 보았다는 이야기.

지금은 사라지고만 막사 앞에 선 연기자들. 2004년 3월. 사진 / 강미경 객원기자
지금은 사라지고만 막사 앞에 선 연기자들. 2004년 3월. 사진 / 강미경 객원기자

그들이 북파공작원, 살인병기로 훈련됐던 이들이었다는 사실을 2004년 겨울 몇 백만의 사람들이 스크린으로 확인하고 있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요인을 암살하라는 임무로 넘어온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들. 이에 복수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실미도 684부대로 일컬어지는 북파공작원이다.

인원은 서른 한명. 연좌제에 연루된 고단한 삶, 패거리에서 칼부림하다 잡혀온 사람, 사형이나 무기형을 받은 이들이 실미도에 모였다. 그 목적은 하나. 평양 주석궁 침투, 김일성의 목을 따오는 것!

오합지졸 그들이 주석궁에 침투가능한 일당백의 살인병기로 만들어진 3개월. 영화에서처럼 훈련은 없고 항상 실전만 있었다던 실미도. 처절한 사육장. 당시 인근 무의도의 주민들은 밤낮없이 울려대는 총성에 ‘군인들이 참 열심히 훈련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그 무시무시함을 달랬다고 한다.

그. 리. 고. 지옥훈련에서 살아남은 북파공작원들이 북으로 겨누었던 칼날이 꺾이던 그 날. 함께 고락했던 기간병들을 죽이고 월미도에서 버스를 탈취, 그들의 존재를 알리러 서울로 향하던 그들. 그 처참한 새벽, 살아남은 군인들 5인이 그때의 실미도를 증언하고 있다.

자신들의 죽음을 알면서도 이름 없이 값없이 죽고 싶지 않았다는 전사들이 버스로 돌진하던 곳은 과연 어디였을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 이 조용한 섬 실미도의 모래와 흙이 피로 물들었던 1968년 그 땅. 영화 현장을 찾아온 이들이 만나는 것은 말없이 물위에 떠 있는 반경  8km섬.

그 때와 똑 같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실미도엔 사람이 살지않는다는 것 뿐이다. 아니 2003년 9월까지만 해도 실미도엔 훈련병과 기간병들의 막사 등 캠프와 유격장, 첨탑 등이 고스란히 있었다. 실미도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고심하던 제작진이 현장인 실미도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해 결국 잊혀진 섬 실미도를 32년을 거슬러 2003년으로 불러낸 것이다. 다만 영화를 위한 세트였지만….

쓸쓸함, 비장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20억 짜리세트가 안타깝기만 하다. 2004년 3월. 사진 / 강미경 객원기자
쓸쓸함, 비장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20억 짜리세트가 안타깝기만 하다. 2004년 3월. 사진 / 강미경 객원기자

그러나 이 또한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20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재현한 영화세트. 개인사유지인 실미도에 세워진 이 세트가 현행법상 불법건축물이라는 이유로 철거된 것이다. 해당 구청인 인천 중구청은 지난해 3월 세트공사를 할 때부터 고발장을 보내고 영화 촬영 중에도 두세 차례 고발장을 들이밀었다고 한다.

결국 지난해 10월, 촬영이 마무리되자마자 3억여 원의 비용을 들여 촬영 세트를 철거했다고. 그런데 영화가 개봉되고 흥행에 성공하자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한 일간지에 해당 공무원이 경질됐다는 기사가 실리는가 하면 부구청장이 대기 발령 났다는 후문도 들려왔다.

융통성을 조금만 발휘했어도 관광상품화 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나 준법정신이 강했던 탓에(?) 또 한번의 실미도 실종사건이 발생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초저녁, 조개구이집의 불빛과 바다가 풍경을 만든다. 2004년 3월. 사진 / 강미경 객원기자
초저녁, 조개구이집의 불빛과 바다가 풍경을 만든다. 2004년 3월. 사진 / 강미경 객원기자

영화 ‘실미도’는 영화사에 또 하나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들이 실화 실미도를 영화화하기로 했을 때 인터뷰 때마다 말하곤 했던 ‘이 비극의 역사에 부담을 느낀다’는 말은 지금 살아남아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알아야 하는, 결코 덮어질 수 없는 실미도의 죽음을 위로해야 한다는 것일 게다.

사람들은 슬픈 이야깃거리에 더욱 솔깃하고 눈물 흘리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속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위로한다. 아니 위로 받는다고 생각한다. 영화 실미도가 희극의 역사였다면 8백만이 넘는 (1월말 집계)관객들의 호응이 이렇게도 폭발적이었을까?  

결코 평화롭지 않았던 섬! 실미도. 인터넷에선 영화 실미도 팬카페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일촉즉발의 사그라지는 불꽃으로 그칠지도 모른다. 그렇게 또 영화로만 끝나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실미도 갯벌을 뒤덮는 바다에 띄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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