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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성지순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 횡성 풍수원 성당
[성지순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 횡성 풍수원 성당
  • 박상대 기자
  • 승인 2004.03.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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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횡성 풍수원 성당.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횡성 풍수원 성당.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여행스케치=횡성] 한국 최초로 한국인 신부가 지은 성당, 30여 명의 사제를 배출한 성당. 강원도 횡성 풍수원에 천주교 신자들이 우러러보는 초창기 신앙촌이 있다.

눈이 내렸다. 눈이 흔한 지역이라지만 며칠째 내린 눈은 발걸음을 묶어버렸다. 이렇게 매서운 추위는 겪어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피비린내 나는 살벌한 도시를 떠나 강원도 횡성 산골짜기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살을 애는 듯한 칼바람이 불어댔다. 사람들은 낯선 땅에 둥지를 틀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벌써 2백년이 흘렀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한양을 떠나 경기도 용인에서 천주의 말씀을 공부하고, 천주를 숭배하던 천주교 신자들의 이야기다. 당시 신태보(베드로. 1839년 전주에서 순교함)를 중심으로 40여명의 신자들이 수배를 피해 8일 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가 정착한 곳이 바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인 풍수원이다.

양평을 지나 횡성 땅에 들어서면 길 좌측으로 아담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양평을 지나 횡성 땅에 들어서면 길 좌측으로 아담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취재팀이 찾아간 그 날도 매서운 추위가 강원도 산골을 휩쓸고 있었다. 산골짜기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었다. 영동고속도로 만종IC에서 춘천방면으로 차를 10분 남짓 몰아가자 횡성 나들목이 나온다. 횡성에서 다시 서울과 양평 방면 6번국도를 따라 달리기를 20여분. 오른쪽에 작고 아담한 시골 동네가 자리잡고 있다. 풍수원이다.

차를 세우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수령2, 3백년을 훨씬 넘겼을 법한 느티나무가 두 그루 보이고, 그 아래로 종탑이 우뚝 솟은 건물이 보인다. 누구에게 확인하지 않아도 성당임을 알 수 있다. 빨간 벽돌과 유리창, 지붕 위에 높이 솟아 있는 십자가가 순례자의 눈길을 당긴다. 명동성당을 본떠서 지은 건물이라더니 영락없이 명동성당을 닮았다.

1백년도 더 전에 산골 마을에 이런 건물을 지은 사람들의 노고를 가늠해본다. 화강석과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두툼한 벽은 호화스럽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마당을 서성이다가 성당 안을 기웃거리고, 뒷마당을 살피며 걸어다니는데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여기 저기 성당 부속 건물들을 구경하며 촬영하고 있는데 오전에 전화 통화를 했던 수녀님인 듯한 예쁜 얼굴이 조그만 문을 열고 인사를 건넨다. 추운데 이런 먼 데까지 찾아왔느냐면서. 드라마 ‘러브레터’의 촬영지로 소개된 후 더 많은 여행객들이 다녀갔다면서 손수 성당 내부에 불을 켜준다.

풍수원 성당의 내부. 신자들이 앉을 의자도 없지만 30여명의 한국인 사제를 배출했다.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풍수원 성당의 내부. 신자들이 앉을 의자도 없지만 30여명의 한국인 사제를 배출했다.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성당 안에는 신도들이 앉을 의자조차 없다. 드라마에는 의자가 있었는데 그건 방송사에서 가져다 사용한 것이고, 이곳에는 방석이 수십 장 쌓여 있을 뿐이다. 저 옛날 목숨을 걸고 예배하던 사람들에 비하면 의자 없는 차가운 마룻바닥은 열악한 시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수녀님은 아담한 건물에 활기를 넣어주는 대담한 색채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벽에 액자로 만들어진 ‘십자가의 길’을 설명하고, 돔형 천장을 예쁘게 촬영하라며 작은 전구에까지 불을 켜준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풍수원성당의 역사와 오늘이 기록된 조그만 안내장를 내민다.

심심찮게 벌어지는 천주교인 박해를 피해 풍수원에 들어온 신자들은 80여년 동안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지속했다. 변변한 책자도 없고, 천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해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신도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천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을 키워나갔다.

성당 뒤쪽에 있는 성모마리아상.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성당 뒤쪽에 있는 성모마리아상.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그러던 1866년(고종 3년) 병인박해가 있었고, 1871년 신미양요가 있었다. 조정에서는 대대적인 천주교인 처형이 내려졌고, 신자들은 관헌들의 눈을 피해 다시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신자들은 촌락을 이루어 일부는 화전을 일구고, 일부는 토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며 20여년 더 숨죽이고 지내다가 광명의 시대를 맞이했다.

1887년 5월 30일 한불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고, 이듬해 프랑스 출신 르메르 신부가 풍수원으로 찾아왔다. 농가를 빌려 예배를 하고 있던 풍수원에 정식으로 교회가 설립된 것.

르메르(Le Merre) 신부는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등 강원과 경기도 지역 12개군을 관할하는 신부로서, 당시 약 2천명의 신자들에게 천주의 사상과 이론을 전파했다. 당시 설교나 예배는 초가에서 이뤄졌는데 모두 20여 채나 되었다. 비록 초가였지만 처형당하지 않고 천주의 말씀을 공부하고, 예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런 일이었다.

묵주동산 앞 양지바른 곳에 누워 있는 정규하 신부.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묵주동산 앞 양지바른 곳에 누워 있는 정규하 신부.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1896년 2대 주임신부로 정규하(아우구스띠노)님이 부임했다. 정신부는 신자들에게 성당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신자들의 손으로 성당을 지어보자고 독려했다. 그리고 중국인 기술자 진 베드로와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설계는 명동성당을 본뜨고, 인근에서 토기를 굽던 신자들에게 벽돌과 기와를 굽게 했다.

1905년에 착공하고 2년 만에 준공하여 1909년 낙성식을 가졌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던 신도들은 기적같은 일을 해놓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풍수원 성당은 한국인 신부가 주도해서 지은 한국 최초의 성당이며, 강원도에 세워진 최초의 성당이고,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

유물관 안에 있는 필사본 성경. 2백년 전 신자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유물관 안에 있는 필사본 성경. 2백년 전 신자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유물관 안에 있는 성복. 초창기 신부들이 입었던 의상이다.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유물관 안에 있는 성복. 초창기 신부들이 입었던 의상이다.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강원도 전체와 경기도 동부지역의 성당은 풍수원 성당에서 분당된 것이다. 지난 1982년에는 강원도 지방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다. 본당 뒤에는 유물관인 기념관이 있다.

2층 건물인 유물관 안에는 초창기 성직자와 신도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유물들이 있다. 초기에 사용하던 성경필사본들을 비롯한 귀중한 서적들과 성수그릇, 유해, 묵주, 십자가, 성복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선지자들의 땀이 배인 성복이나 필사본 성경과 책자, 생활용품에서는 먼저 간 분들의 체취가 느껴진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14처의 비석에 이철수 판화가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십자가의 길을 따라 14처의 비석에 이철수 판화가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오랜 세월 갖은 박해를 이겨내며 피워 올린 성숙한 신앙심 앞에 고개를 숙인다. 선인들이 남긴 유산을 마주하는 동안 순례객은 물질문명이 만들어준 풍요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무절제하게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본다.

여러 유물들은 삶의 의의를 비추는 거울처럼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물관을 나와 뒷산으로 고개를 돌리니 예수상이 보인다. 거기서부터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다. 14처를 알리는 조형물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판화가 이철수의 그림들로 장식해 놓았다.

성당 뒤쪽 십자가의 길을 오르면 묵주 동산이 있다.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성당 뒤쪽 십자가의 길을 오르면 묵주 동산이 있다. 2004년 3월. 사진 / 정대일 기자

그 십자가의 길이 마치 골고다 언덕처럼 산 정상으로 이어져 있다. 그 길을 따라 오르면 이 성당을 지은 정규하 신부님의 묘가 나오고, 이어 6·25때 성모님께 기도를 드렸다가 살아난 미국인 장교가 보내왔다는 성모상이 자리한 묵주동산이 나온다.

푸른 소나무 숲과 하얀 동상이 있는 묵주동산에 서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한국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 되어준 성당과, 성당을 짓기 위해 피땀 흘렸을 옛사람들의 순교자적 삶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스쳐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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