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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역사기행] 나의 서정시대를 찾아서~ 서동왕자와 백제, 미륵사지가 있는 익산
[역사기행] 나의 서정시대를 찾아서~ 서동왕자와 백제, 미륵사지가 있는 익산
  • 김상미 객원기자
  • 승인 2004.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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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동고도리 석불입상의 모습.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동고도리 석불입상(보물 제 46호)의 모습.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익산]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한 미륵사지는 백제의 최대 사찰로 30대 무왕에 의해 창건되었고 17세기경에 자연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찰과 목탁소리는 사라지고 미륵산을 타고 내려온 바람만 복원된 동탑 풍경 위에서 잠시 쉬어 간다.  

헤세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시인의 나라’라고 표현하며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든 돌아갈 길이라고 말하는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내 고향은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넓은 들판에서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으로 기억되는 익산이다.

누군가가 기다려 줄 것 같아 마음이 설레었다. 익산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이신효 선생님을 만나 안내를 받았다. 휴일임에도 취재에 동행해 주는 넉넉한 마음이 얼굴에서 배어 나오는 듯 했다. 하루 해로는 짧을 것 같아 서둘러 722번 지방도로를 따라 금마쪽으로 5분쯤 갔을까, 미륵사지터와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 차를 세웠다.

익산토성(사적 제92호). 떨어져 뒹구는 나무의 생각들을 밟고 오르는 토성길은 금마면 서고도리 오금산에 있다. 오금산은 서동이 금을 발견했던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성벽은 직선에 가깝다.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익산토성(사적 제92호). 떨어져 뒹구는 나무의 생각들을 밟고 오르는 토성길은 금마면 서고도리 오금산에 있다. 오금산은 서동이 금을 발견했던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성벽은 직선에 가깝다.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신라 선화공주를 얻고 왕이 되다
익산에는 백제 무왕(武王)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있다. 미륵사지, 왕궁평성, 궁터, 절터, 고분등 금마면에 흩어져 있는 유적으로 보아 왕위에 오른 무왕이 익산을 중심으로 정책을 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또 삼국유사에 무왕조에 대한 설화가 그것을 뒷받침 해준다.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용(임금을 말한다)과 관계를 하여 무왕 장(璋)을 낳았다고 한다. 장은 어릴 때부터 재주와 도량이 컸고 마를 캐 생업으로 삼아 서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서동은 효자이며 용기 또한 남달랐나 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가서 마을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어 친해진 다음 아이들을 꾀어 동요를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서동 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 대궐까지 들리니 임금은 용서할 수 없는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낸다.

공주는 귀향길에서 만난 서동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지만 믿고 따랐다. 서동과 관계를 맺은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요가 인연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공주가 서울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준 금으로 생계를 도모하려 하자 서동은 크게 웃으며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평생에 부를 이룰 금이라고 대답하자 서동은 마를 파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쌓아두었다고 말한다. 공주는 진귀한 보배이니 신라의 부모님에게 보내자고 했다. 금을 쌓아놓고 용화사 사자암 지명법사에게 찾아가 신라에 보낼 계책을 물으니 신통한 도술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로 보내준다.

많은 금을 보고 진평왕은 신비하게 여겨 서동을 기억하게 되었고 그 일로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미륵사지(사적 150호)는 백제인의 정신적 단합을 꾀하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다. 삼국유사 무왕조의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선화비가 지명법사를 찾아가다 연못에 미륵삼존불이 출현하여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1개의 금당과 탑이 있었다.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미륵사지(사적 150호)는 백제인의 정신적 단합을 꾀하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다. 삼국유사 무왕조의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선화비가 지명법사를 찾아가다 연못에 미륵삼존불이 출현하여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1개의 금당과 탑이 있었다.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미륵사지 창건설화
무왕이 부인과 함께 용화산 밑의 사자사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데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에서 나타나자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절을 세워주십시오”라고 청하여 지명법사가 도술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리고 못을 메웠다. 그리고 미륵삼존의 상을 모방해 짓고 회전(會殿)과 탑(塔)과 낭무(廊)를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지라 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가람배치에 있어서 세 개의 사찰을 한곳에 배치한 삼원병립식의 배치라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이나 중국에도 유래가 없는 형태로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감탄을 한다. 미륵사지의 창건은 무왕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미륵사지 창건은 왕권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이었으며 자신의 격상을 통해 백제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이상을 심어 줘 정신적인 단결을 꾀하고자 했다.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은 높이 27m의 9층 석탑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은 높이 27m의 9층 석탑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국보 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은 복원중이라 볼 수가 없었지만 1993년 복원된 동탑 9층 끝에 낮 달이 걸려 있었다. 미륵사지는 정유재란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자연 폐사라는 주장이 있다.

미륵사지유물전시관. 1997년 개관이래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 보존하고 있다. 소장유물은 1만9천여 점에 이르는데 기능, 종류별로 전시하고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미륵사지유물전시관. 1997년 개관이래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 보존하고 있다. 소장유물은 1만9천여 점에 이르는데 기능, 종류별로 전시하고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동원 중앙으로 절터를 바라보고 서 있는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허기가 느껴졌지만 서쪽에 있는 유물전시관을 빠뜨릴 수가 없었다. 1997년에 개관하여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노기완 학예연구 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백제의 역사를 다시 배웠다.

백제의 처마와 녹유연목, 석등을 보며 백제 문화는 돌과 둥근 선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륵사지를 나와 722번 지방도를 타고 금마 시내를 지나 1번 국도 전주 방면으로 직진하다가 뻥 뚫린 평야에서 유난히 붉은 황톳빛과 참새떼가 소란스럽게 내려앉는 대숲 마을 앞에서 석장승을 만났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 236호)는 절에서 불문을 나타내는 문표이다. 서탑과 동탑 두 기가 조영되어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제 236호)는 절에서 불문을 나타내는 문표이다. 서탑과 동탑 두 기가 조영되어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동고도리 석불입상(보물 제 46호)을 인석(人石)이라 부르는데 근처에 있는 금마산이 말 모양과 같아 말에게 마부가 있어야 한다고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문득 물활론은 동양의 정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서쪽과 동쪽에서 애틋하게 바라보는 장승은 섣달 그믐날 밤에 옥룡천이 꽁꽁 얼어붙으면 서로 건너와 껴안고 있다가 새벽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설화가 있다.

자리를 옮겨가기 전 들판을 넘어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구릉지 같은 곳에 말통대왕릉이 보였다. 소왕릉 대왕릉이 있는데 백제 무왕과 부인인 선화비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다. 다시 전주 쪽으로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 무왕이 천도하려 했던 왕궁평성 발굴현장에는 백제역사를 다시 쓰느라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왕궁리 5층 석탑(국보 제 289호). 지붕 돌은 평평하고 네 귀는 가볍게 들리어 있어 전형적인 백제의 석탑 모습ㅇ르 갖추고 있다. 옥개석이 판석형이고 받침석이 별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어 목조가구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왕궁리 5층 석탑(국보 제 289호). 지붕 돌은 평평하고 네 귀는 가볍게 들리어 있어 전형적인 백제의 석탑 모습을 갖추고 있다. 옥개석이 판석형이고 받침석이 별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어 목조가구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2004년 4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왕궁평성 중앙에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99호)이 햇살을 받고 명상에 잠긴 듯 서 있다. 탑의 생김새나 여러 가지 고증자료에 의하면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에 축조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발굴결과 탑의 하부에서 다져 쌓기로 조성된 건물지의 흔적이 발견되어 조성연대를 백제시대보다 다소 늦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석탑은 지방적인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데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는 백제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지붕 돌은 평평한 모습을 보이고 네 귀에서 가볍게 들리어 있다. 백제의 자취를 찾아보기에 하루해는 너무 짧았다.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해를 보며 미륵산에 올랐다. 그리 높지 않아 30분 정도면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사자암에서 차를 마시며 내려다보는 김제평야, 서해바다와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사통팔달 빠져나가는 길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처럼 역사도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멀리 서해바다가 햇살을 받아 금빛을 뱉어내고 미륵산 자락 남쪽에 안겨 있는 금마는 평화로운 왕궁의 자리로 손색이 없는 지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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