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합천] 느릿느릿 흐르는 황강 따라 봄볕이 흐른다. 산은 산수유와 철쭉으로 옷을 갈아입고, 강은 푸르른 초록으로 물길을 단장한다. 봄은 산과 강, 들 사방에서 어지럽게 피어난다. 합천에서 봄나들이 오라고 부른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이운축제로의 초대.
읍내를 가로지르는 황강 줄기를 따라 합천호까지 가는 백리벚꽃길이 봄나들이의 첫걸음. 황강은 합천 사람들에게는 젖줄기와 같은 강이다. 고향을 떠나 사는 합천 사람에게 황강 이야기를 하면 금세 눈이 아슴푸레 해지는 걸 보면 안다. 이 강에서 고기 잡고 멱을 감았던 시절을 잊지 못한다.
황금빛 모래가 강변 양쪽으로 널리 펼쳐져 황강이라 부른다. 황강 백리 벚꽃 길을 따라 매년 봄 벚꽃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대회에 참가했던 아마추어 마라토너가 ‘흩날리는 벚꽃이 천상의 나라에서 선택된 사람들만이 이 길을 달릴 수 있도록 하는 듯 했다’고 후기에 남겼듯, 한번 달려본 이는 잊지 않고 다시 찾는 길이란다.
황강을 따라 백리 벚꽃 길을 가다보면 합천호를 못 미쳐 오른 쪽에 철거중인 마을 같은 곳이 보이는데 이 곳이 바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세트장이다. 영화 세트장을 직접 가서 보면 영상조작기술의 현란함에 넘어간 자신의 눈썰미에 혀를 차기 마련이다.
웅장하거나 아름다웠던 영화 속 장면은 어디로 가고 조악한 세트만 남아 ‘속았지?’라고 조롱하는 듯한 느낌. 그러나 ‘태극기 휘날리며’ 세트장은 치열했던 시가지 전투 장면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포연만 피어오르면 그야 말로 영화 속 한 장면.
‘저기가 장동건이 올라가 총을 쏘던 옥상이야. 여기서 이렇게 뛰어가서는…’ 세트장을 찾은 관람객이 영화에서 받았던 감동이 새롭게 일어나는 듯 이리저리 장면을 짜 맞춘다. 촬영 당시의 지프차나 트럭, 장갑차, 탱크들까지 영화에서처럼 사방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부분 실제로 움직이는 것들이다.
세트장에 얽힌 후일담 하나. 주인공들이 군에 끌려가던 기차역 장면은 전남 곡성에서 촬영을 했는데 합천군에서 촬영 때 사용했던 기차를 일찌감치 사놓았다. 영화가 대박이 나자 곡성에서 무르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무슨 소리냐’며 마음 변할까봐 재빨리 가져왔단다.
군에서는 이 세트장을 서바이벌 게임장으로도 활용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벌써 서바이벌 동호회의 문의가 잇따른다고. 정말 실감날 것 같긴 하지만 BB탄의 위력도 만만치 않다는데,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세트장이 견딜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합천의 ‘고을이름 합(陜’)자는 원래 ‘좁을 협’으로 쓰인다. 산골짜기를 뜻하는 말. 둘러보면 진짜 산들이 많다. 산이 높으니 강도 깊다. 웅성웅성 돋아난 산들 사이로 휘적휘적 강이 흐르고, 강변을 이어 들이 펼쳐진다. 산과 강 그리고 들. 이 모든 것을 갖춘 합천. 큰 고을이라 하여 그 예전엔 대야주(大倻州)라고 불렀단다.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 말기에 신라와 백제의 접경 지역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는데 취적산 부근에 격전지였던 대야성의 흔적과 화랑 죽죽의 비가 남아 있다. 생각해보니 드라마 ‘왕건’을 볼 때 이 성이 자주 등장했던 것 같다. 합천에 발자취를 남긴 선인들의 면면도 녹록치 않은 것이 하나같이 그 분야의 태두이다.
조선 태조의 스승 무학대사가 이 곳 출생이고, 해인사는 사명대사와 성철 큰스님이 입적한 대사찰이다. 삼가현 태생으로 조선의 거유 남명 조식선생이 있는데 장년에 외톨이(外吐里)에 ‘뇌룡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정자의 이름은 장자(莊子)의 ‘시거이용현 연묵이뢰성(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에서 따왔는데 그 뜻이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친다’란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의 제자들 가운데 70여명에 이르는 유생들이 뇌룡처럼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조직하여 왜적과 싸웠다.
합천호를 바라보는 악견산에 있는 ‘임란창의 기념관’의 기념비에 새겨진 상당수가 선생의 제자들이다. 남명선생과 함께 영남 유림의 쌍벽으로 퇴계 선생을 꼽는데 그의 무수한 제자들 가운데 불과 서너 명이 종군한 것과 비교하여 실천을 중시한 남명 선생의 가르침을 높이 사는 이도 있다. 합천의 산으로 황매산과 가야산을 꼽는다.
산청으로 넘어가는 황매산 모산재는 봄이면 온통 철쭉꽃으로 뒤덥힌다. 해발 1,108m인 황매산은 정상 바로 밑까지 올라가도 마치 초원에 온 듯 숲이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 젖소를 기르던 목장이 몇 군데 있었는데 이제는 문을 닫았다. 해발 1,430m 가야산은 조선 8경의 하나이자 합천 제 1경에 올라있는 산이다.
해발 1천m가 넘는 봉우리들이 연이어져 있어 우두산이라고도 부른다. 해동 십승지의 하나로 신선들의 세계인 만수동이 있는 산이라고 하니 새삼 중언부언 설명을 할 필요가 없는 명산.
가야산에 팔만대장경을 안치한 법보사찰 해인사가 있다. 해인사에서는 매년 팔만대장경 이운축제를 여는데 백리 벚꽃 마라톤대회와 황매산 철쭉제와 더불어 합천의 3대 봄 행사로 꼽힌다. 여기에 올 봄부터 ‘태극기 휘날리며’세트장이 추가되어 합천 봄나들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Interview “불법만리, 호국의 의지를 재현합니다” 순민스님 (해인사 총무)
“고령 개포에 도착한 팔만대장경이 해인사까지 오는 길을 재현합니다. 첫날 개포에서 합천읍까지, 다음날 해인사까지 운반하는데 옛날 그대로 이고 지고 오는 겁니다. 팔만대장경 책자를 머리에 이고 법성도를 도는 정대불사를 마지막으로 축제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불법의 의미와 호국의 의지를 새기는 축제로 올해로 5회째를 맞고 있지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 전란 속에서도 국난 극복이라는 의지로 땀땀이 새겨간 대장경은 바닷길로 고령까지 운반된다. 고령 개포에서부터는 너나 할 것 없이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수레에 싣고 해인사까지 온다. 그 옛날에는 외적을 물리친다는 절박함에 비장한 길이었지만 지금은 축제의 길이다.
팔만대장경을 새겨보는 체험, 템플스테이, 유등제, 바라춤과 나비춤 공연을 비롯한 각종 공연 등이 어우러진 합천 최대의 축제로 떠오르고 있다. 올해는 4월 25일부터 28일까지 나흘간 펼쳐지는데 인류평화와 민족통일을 기원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장의 초대 - 심의조 (합천 군수)
“관광 합천,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산골짜기(?) 합천이 부산하다. 곳곳이 새롭게 단장을 하고 있다. “2007년이 되면 합천은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가 됩니다. 그에 따라 합천의 귀중한 문화유산과 명승이 더욱 각광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관광상품과 기반 시설을 마련 전국 제일의 관광 벨트를 조성할 계획입니다.”
대전 진주간 고속도로까지 4차선 도로로 연결된다. 광주와 대구를 잇는 88고속도로도 4차선으로 확대되고 대구 진주간 도로도 넓어진다. 그야말로 경남 교통의 요지로 떠오르게 되는 셈. 국립공원 가야산과 합천호, 황매산, 황강 등 수려한 자연경관과 해인사, 옥전고분군 등 귀중한 문화유산 등 다양한 관광 상품을 간직한 합천.
그럼에도 불구하고 88고속도로가 생기기전까지는 가까운 대도시 대구에서도 1시간이 걸리는 산골짜기(?)라 사람들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가야산과 해인사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었을 뿐. 그런 합천이 야심 차게 변하고 있다.
“이미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세트장을 관광 상품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트장에서는 ‘바람의 파이터’ 등 새로운 영화를 계속 촬영하고 있어 문화상품이라는 관광 테마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태극기~’의 경우 영화사와 협의하여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지자체와 영화사 간의 성공적인 추진사례로 선례를 남기고 있다는 것. 단순히 세트장을 보전하는 차원이 아니라 서바이벌 게임장과 영화 소품 전시관 운영 등을 통해 지속적인 활용방안을 마련 중이다. 새로운 영화와 드라마 촬영도 지속적으로 유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의 헐리우드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벚꽃 마라톤 대회, 황매산 모산재철쭉제, 팔만대장경 이운축제, 황강모래축제 등 다양한 축제와 행사들도 해가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프로그램이 추가되고 있다. “농업 소득만으로는 군 경제 수준을 올리는데 한계가 있지요. 관광 사업은 합천의 지리적 위치와 문화유산 등으로 볼 때 가장 적합한 사업입니다. 관광 합천,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