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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가족여행] 정녕 마음의 때를 씻고 싶은 사람, 완주 화암사에 가보라
[가족여행] 정녕 마음의 때를 씻고 싶은 사람, 완주 화암사에 가보라
  • 이종원 객원기자
  • 승인 2004.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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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완주 화암사.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완주 화암사.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완주] 여행에 관한 글을 쓰니까 자주 이런 질문을 받는다. “어느 절이 제일 맘에 들어요?” 우리나라 절집이야 거의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니 어느 한 곳을 추천하기가 곤욕스럽다. 그런데 완주 화암사를 다녀오고 생각이 바뀌었다. 다시 그런 질문을 받으면 감히 완주 화암사라 말하리라.

화암사는 큰 사찰도 아니다. 화려한 문화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뭔가가 숨겨져있다. 절집을 거니는 것만으로 순수한 예술영화 한편을 본 것 같은 감동을 받는다. ‘정녕 마음의 때를 씻고 싶은 사람은 화암사를 가보라.’ 논산에서 대둔산쪽으로 향하다보면 ‘양촌’이라는 시골마을이 나온다.

이 곳에서 작은 고개 하나 넘어야 전라도 땅 운주를 만난다. 작은 고개건만 행정구역이 이렇게 갈라놓은 것이다. 하긴 논산땅이나 완주땅 모두 백제땅이 아닌가? 그걸 말해주듯 전라도 운주장터에는 충청도 양촌에서 시장 보러오는 사람이 참 많다.

운주장터에서 봄나물을 내다 팔고 있는 할머니.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운주장터에서 봄나물을 내다 팔고 있는 할머니.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화암사 가는 길에 파밭이 펼쳐져 있다.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화암사 가는 길에 파밭이 펼쳐져 있다.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민들에게 행정구역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할머니는 산에서 캐온 풋풋한 봄나물을 장터에 가져왔다. 팔리든 안 팔리든 상관이 없다. 아는 사람 만나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 행복한 표정이다. 강아지를 가져온 아저씨, 겨우내 말린 곶감을 가져온 아줌마도 보인다. 벌써 막걸리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한 할아버지의 빠알간 얼굴에도 삶의 향기가 묻어난다.

운주에서 17번국도를 타고 전주쪽으로 달리다보면 ‘경천’이란 마을이 나온다. 초입에서 화암사까지는 좁은 길이 이어져 버스로 올라가기엔 무리다. 산 속 깊은 속내로 들어간다. 문명과 멀어질수록 산은 맑아지는가 보다. 사람의 손을 덜 타서 그런지 차창의 풍경은 생동감이 넘친다. 10여 분정도 차로 올라가면 화암사 입구에 닿는다.

화엄사 가는 길. 철계단으로 폭포를 건넌다.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화엄사 가는 길. 철계단으로 폭포를 건넌다.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이제부터 누구나 20여 분의 오솔길을 걸어야 한다. 스님이라고 예외는 없다. 그래서 절집으로 향하는 이 작은 길이야말로 신분을 따지지 않는 평등한 길이다. 땅의 촉감을 느끼며 걷다보면 나무터널이 길게 이어지고 예쁜 시냇물을 만나게 된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봄의 대지를 깨우고 있다. 거기엔 큰돌이 세워져 있어 일주문을 대신 하고 있다.

시멘트 전봇대 2개를 뉘여 다리를 건너게 만들었다. 시멘트 전봇대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문명의 인공물도 자연에 동화된 것이다. 작은 협곡이 나온다. 아기자기한 바위에서 떨어지는 맑은 물이 세파의 때를 씻어준다. 세례자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푼다면 이렇게 맑은 물을 사용했을 거야. 절집을 향하면서 종교가 왔다갔다한다. 아무렴 어떤가? 좋으면 그만이지.

이 작은 길에서 누군가 만나면 와락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쉽게도 절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산은 고독을 만끽하라고 홀로 가게 했나보다. 그런데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쭉쭉 내뻗은 나무가 있었고, 개울의 수다 소리도 있었다. 기암괴석의 넋두리도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이 나의 도반인 셈이다. 산사로 향하는 이 길이야말로 발로 걷는 1백8배일지 모른다.

좁은 협곡에서 갑자기 너른 협곡이 나온다. 시원스런 폭포가 나타났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나태함도 폭포 속에 던져버렸다. 지금이야 편안한 철계단이 있었지만 예전엔 벼랑에 몸을 붙이고 절벽길로 오르내렸을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뒤를 바라보는 여유도 챙겨본다. 산이 겹겹이 쌓여 있다. ‘참 깊은 곳이구먼….’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이 약수다. 물을 가두고 찔끔찔금 내보내는 것이 아니다. 폭포처럼 시원스레 떨어진다. 발품을 팔며 땀을 쏟았으니 물맛이 좋지 않을 수 없다.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고서야 산세가 눈에 들어왔다. 불명산(佛明山) 자락이 너울너울 춤추고 있다. ‘부처님이 밝게 빛나고 있는 산’에 내가 오른 것이다.

화암사에서 바라본 산세.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화암사에서 바라본 산세.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화암사에는 일주문도 없다. 오로지 우화루 옆의 대문이 절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다. 대체로 누각아래를 통해 주 건물로 들어가는데 이곳을 성벽처럼 돌로 단단히 막아놓았다. 위층도 널벽으로 막혀 있어 일체의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나무로 만든 창문이 달려 있지만 그마저 작아 보인다. 문을 꼭 잠근 성채라고 할까? ‘절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지, 숨기려고 하는 것인지.’

막돌로 쌓여진 계단을 오르면 문간채가 나온다. 대갓집의 대문과 다를바 없다. 문턱은 아래쪽으로 휘어져 있고 문미는 위쪽으로 휘어져 있다. 마치 요술거울 안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하긴 문화유산을 찾는 자체가 과거로의 여행이 아닌가? 큼직한 진돗개만이 목을 빼꼼히 내밀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탐승객을 맞이한다.

대문에는 시주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인두로 지져 쓴 한글 이름이 삐뚤삐뚤 적혀있다. 하긴 동종에 새겨진 금빛 찬란한 이름보다 훨씬 정감있다. 가난한 신도들이 푼돈을 모아 만든 정성이 갸륵하다. 이 대문이 세워졌을 때 얼마나 뿌듯했을까? 문턱을 넘으면 공간이 있는 오른쪽으로 동선이 형성된다.

우화루의 마루가 낮아 마당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다.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우화루의 마루가 낮아 마당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다.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화암사의 마당만 보면 매우 좁다. 그러나 우화루의 마루면이 안마당의 지면과 같은 높이에 있어 마당은 좁아 보이지 않는다. 즉 우화루의 마루는 마당의 연장선상이다. 그런 시각적 효과는 적묵당이나 불명당에도 적용된다.

화암사의 전각들간에 수직적 위계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공간이 수평적으로 만나고 있다. 백제의 평지가람의 모습이 주로 이렇다. 바깥에서 본 폐쇄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건물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화루(보물 662호)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1611년에 중창을 했으니 거의 4백여 년이 넘은 건물이다. 붕괴의 위험 때문에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줄이 쳐 있다. 화암사는 임란의 참화를 뼈저리게 겪었을 것이다. 자기방어의 모습이 폐쇄적인 건물형태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화암사 약수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화암사 약수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우화루 들보의 목어.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우화루 들보의 목어.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 있는 목어가 우화루 들보에 걸려있다. 화려한 장식도 없고 색깔마저 바랬지만 이웃집 아저씨처럼 정겹게 보인다. 마치 퇴역장군이 지난날을 회상하며 서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극락전 안에는 동종이 모셔져 있다. 높이는 1백7cm이고 용모양의 고리가 있다. 연꽃문양과 꽃잎 띠가 새겨져 있다.

평범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 동종은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니고 있다. 원래의 종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광해군 때 다시 종을 만들었다. 전쟁의 아픔을 직접 겪어서인지 수많은 이적을 보여주고 있다. 밤이면 종이 저절로 울려 스님과 신도를 깨웠고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헌병이 무기로 쓸 쇠붙이를 얻기 위해 화암사로 몰려오자 종 스스로 울려 스님들에게 미리 알렸단다.

다급한 스님은 종을 땅에 묻어버렸다는데, 해방이 된 후에야 다시 꺼내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극락전(보물663호)의 기단은 퍽 자연스럽다. 잡석을 3개 층으로 쌓아놓았다. 그 위에 덤범주초를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다포양식의 맞배지붕형식이다. 소박한 외형만큼이나 내부도 단아하다.

1714년에 단청을 했다고 하니 지금 보고 있는 색깔은 3백년 전에 우리 선조가 그렸던 색감인 것이다. 극락전은 큰 건물은 아니지만 산세와 잘 어우러진 건물이다. 따사로운 봄볕을 받으며 강아지가 낮잠을 자고 있다. 세상 모르고 잠자는 강아지가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봄날은 온다.’

건물 뒷면의 하앙은 펜촉처럼 뾰족하다.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건물 뒷면의 하앙은 펜촉처럼 뾰족하다.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극락전 마당에 낮잠을 자고 있는 진돗개.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극락전 마당에 낮잠을 자고 있는 진돗개.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또한 극락전은 1976년 우리 건축사에 길이 남을 발견을 하나 했다. 국내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하앙’을 가진 건물이 화암사에서 발견된 것이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직수입되었다고 주장한 일본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된 것이다. 공포 위에는 덧서까래와 같은 이른바 하앙(下昻)이 내부에서 부터 길게 뻗어 나와 있다.

이러한 하앙구조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로서는 단 하나뿐이다. 이 구조는 하앙부재를 지렛대와 같이 이용하여 외부 처마를 일반 구조보다 훨씬 길게 내밀 수 있어 삼국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알려졌고,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와 비슷한 구조의 실례가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하앙구조는 주로 백제에서 유행된 양식이다. 강수량이 많은 평야지대에 깊은 처마구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선진기법은 백제장인을 통해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전해진다. 호류우지 금당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다. 정면에 보이는 하앙은 용머리 모양으로 투각하여 장식하였고 뒷면의 하앙은 펜촉처럼 뾰족하게 다듬어 놓았다.

적묵당 뒷켠 마당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큼직한 바위가 솟아 있으며 그 위에 장독대를 만들어 놓았다. 오밀조밀한 항아리가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바로 옆에는 산신각이 놓여 있다. 숫기와를 일렬로 놓아서 경계를 지었다. 기둥 4개를 세워놓고 지붕만 얹힌 산신각은 마치 참외밭 원두막처럼 생겼다.

보물 663호인 극락전.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보물 663호인 극락전. 2004년 5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화암사는 소박한 절집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잘 순응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백제는 비록 멸망했어도 핏줄로 이어진 예술혼은 어쩔 수 없나보다. 산지 가람임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평지가람의 건축 방식을 곳곳에서 보게 된다.

그들은 수 천년동안 이 땅을 터전으로 살아왔고, 수많은 전쟁의 참화를 견디어 왔다. 극락보전의 빛 바랜 기둥을 어루만져 본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나무 결이 세월에 짓눌린 주름만큼이나 깊이 패어 있다. 그곳에서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온다.

Tip. 화암사 가는 길
자가용  ㆍ호남고속도로 -> 익산IC -> 전주 -> 17번 국도(옥천/대전방면) -> 경천면 가천리 화암사 입구    
          ㆍ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추부IC -> 운주 -> 경천면 가천리 화암사 입구
대중교통  : 전주역 앞에서 화암사행 시내버스 이용 (3-4회 운행). 40분 정도 소요. 온천입구에서 하차 화암사행 군내버스 이용 (20분 간격 운행) 25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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