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함양] 봄빛이 무르익는 산을 보고 싶었다. 지리산을 떠올렸다. 산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결혼 전, 혼자 또는 동료들과 스무 번 남짓 그곳에 올랐다. 장맛비를 맞으면서, 함박눈 속에서 산의 긴 능선을 걸었다. 결혼을 하고 한 해 한 번씩은 지리산을 오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결심은 이루지 못했다. 지리산은 하루에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혼자만 그 정도의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서너 해마다 한 번씩 올랐을 뿐이다. 이번 여행의 숙소는 지리산 휴양림. 정상은 아니지만 끝자락에서라도 지리산을 베고 하룻밤을 묵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렌다.
현석이도 마음 설레 한다. 산 때문이 아니라 만날 또래들 때문이다. 여행의 동행이 사내아이만 둘인 소나무 가족. 그 가족과는 해마다 한 두 번 같이 여행을 했던 터라 이미 친할 만큼 친해져 있고, 할 이야기도 그만큼 많았다.
함양에서 88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지리산 휴양림을 향하며 오도재를 넘었다. 꼬불거리는 고개를 따라 올라가니 산자락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고개를 오르며 ‘차가 과연 고개 끝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파른 고개였다. 고갯길 입구에서 보았던 ‘밤 운전 금지’라는 안내판이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고갯마루 어디쯤에서 ‘옹녀와 변강쇠’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오도재는 함양 휴천면에서 마천면으로 통하는 고갯길이다. 그 고개를 넘으며 지리산의 긴 산자락을 보았다. 천왕봉에서 세석, 임걸령, 토끼봉까지… 늘 꿈꾸어 왔지만 쉽게 가지 못했던 그 지리산 자락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그동안 가지 못했던 아쉬움을 잔뜩 들춰냈다.
오도재를 내려가 들른 곳은 지리산의 서암. 벽송사에 딸려있는 작은 암자이다. 서암에서 1km 남짓 거리인 벽송사는 지리산 중에도 깊숙이 자리 잡은 곳이라 빨치산들이 많았던 곳이다. 한국 전쟁 때는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 깊은 산중의 절집이어서일까?
서암은 그리 오래된 절집은 아니지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곳이다. 자연의 바위 벽면 곳곳에 조각한 사천왕상과 보살상들도 다른 곳에서 느끼지 못한 특별함이다. 절집을 돌아보며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정다운 이야기를 나눈다. 모처럼 만났어도, 바로 전날 헤어진 동무마냥 즐겁다.
서암에서 나와 숙소인 지리산 휴양림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시.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계곡과 가까웠다. 창문을 여니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들렸다. “아빠! 우리는 밖에서 놀게요.” 아이들은 숙소에 들어가기도 전에 계곡으로 달음질이다.
숙소 앞쪽의 출렁다리를 건너, 계곡으로 내려갔다. 그 물길은 깊지 않았지만 건너기에는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은 돌을 날라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징검다리를 건너 커다란 바위에 오르기도 하고 물속에 돌을 던진 뒤 솟아오르는 물방울을 피해 달음질을 치기도 한다. 아이들의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숙소에서 한참 쉬었다가 어스름한 저녁에 쌍계사를 가기 위해 나섰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차량정체로 세 시간 가까이 걸렸다. 절집까지 가지 못하고 경상도와 전라도가 만나는 장터인 화개에서 저녁만 먹고 돌아왔다. 차량 정체는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섬진강의 모습을 실컷 본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휴양림으로 돌아오니 밤이 깊었다. 깊은 산 속의 밤은 도시의 밤과 사뭇 달랐다. 잠을 자려고 불을 끄니 창문을 통해 환한 달빛이 들어왔다. 달빛이 그리도 밝은 것을 보니 보름달인가보다. 다른 건물의 형광등이나 자동차 불빛이 전혀 없다보니 달빛이 더욱 밝고 맑았다.
다솜이는 “달빛이 정말 환하다”며 감탄한다. 낮에 즐겁게 놀았던 아이들은 포근한 달빛 이불을 덮고 금세 잠이 들었다. 둘째 날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휴양림 산책에 나섰다. 들에는 봄꽃들이 이미 활짝 피어있었다. 봄 냄새도 가득했지만 산 속에 자리 잡은 휴양림에는 이제 막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잎이 돋지 않은 나무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바위틈으로 흘러내린 물이 얼어있는 곳도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 길에는 맑은 물소리가 계속 따라왔다. 휴양림 산책길에 설치된 운동 시설은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산책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시든 나뭇잎을 제치고 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다가가보니 보라색 제비꽃과 현호색이다. 지리산도 곧 푸른 나뭇잎이 돋아날 것 같았다. 살랑거리는 바람소리도 듣기 좋았다. 봄볕을 즐기며 지저귀는 새소리와도 잘 어울렸다 숙소에서 나와 실상사에 들렀다. 실상사는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절집이다.
그 자리에서 천년 넘는 세월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을 비롯하여 실상사석등(보물 제35호), 부도(보물 제36호) 등 국보와 보물만도 12점이나 된다. 아이들과 문화재를 둘러봤다. 하지만 아이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런 문화재가 아니다. 아이들의 관심은 연못의 금붕어가 얼마나 큰지, 혹시 올챙이나 개구리는 없는지 그런 것들이다.
하긴 전문적인 답사 여행이 아니고서야 어른들도 신록의 나무나 푸른 들판이 더 좋다. 실상사 찻집에 들어갔다. 매화차와 우전. 봄의 기운을 한껏 간직한 차들을 골랐다. 차 한 잔 마시는 일이 환한 봄볕을 마시는 것 같아 행복하다. 차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고 고개를 돌려보니 아름다운 창밖 풍경이 보인다.
창에 가지를 기대고 쉬고 있는 나무도 보인다. 아름드리 살구꽃이다. 천년의 절집 자리에서 저 아름드리나무는 몇 년을 피고 지는 것일까? ‘어리석음을 지혜롭게 한다’는 지리산에서 아름드리나무로 자랐으니 얼마나 지혜로울까? 소나무 가족은 다음에는 산을 오르자고 했다.
아이들도 다 컸으니 2박3일정도의 산행도 가능할 것이다. 늦어도 내년쯤엔 가족들의 지리산 산행에 나서야겠다. 뱀사골 긴 계곡의 물소리를 노래처럼 들으며 가야겠다. 연하천, 임걸령, 벽소령을 누비며 가도 가도 끝없는 산길을 원 없이 걸어야겠다. 마침내 천황봉 정상에 서서 부드럽게 누워있는 지리산을 마음가득 담아와야겠다.
Tip. 휴양림 가는 길
·승용차 이용시 : 대구 -> 광주간 88올림픽고속도로 지리산 I.C를 빠져나와 인월사거리에서 지리산국립공원 방향인 60번 지방도로를 따라 6km쯤 간다. 산내삼거리에서 좌회전, 5km 정도 가서 마천면 소재지를 들어가기 직전(도로가 왼쪽으로 휨) 오른쪽 다리(가흥교)를 건너 조금 가면 송알 삼거리. 오른쪽 길로 4.5km 가면 휴양림에 이른다.
·대중교통 이용시 : 서울 ↔지리산(백무동) : 동서울 터미널에서 직행버스 1일 5회 운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