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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나주에서의 초대②]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러나오는, 천년 목사골의 자취
[나주에서의 초대②]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러나오는, 천년 목사골의 자취
  • 이민학 기자
  • 승인 2004.07.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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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목사내아 풍경.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목사내아 풍경.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여행스케치=나주] 나주 시내는 과거에 읍성이 있던 곳이었다. 흔히 나주읍성권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 그 흔한 돌담조차 찾아보기가 힘들다. 나주시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읍성을 복원할 계획이지만 당장은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 나주의회 뒤뜰에는 청와대의 영빈관 같은 역활을 했던 금성관이 있다. 건물 안에 가려져 있으므로 자세히 찾아봐야 한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이라는 목사내아는 오래된 나무의 숨결과 파란 풀밭이 인상적이다.나주를 관장하던 나주목사의 관저였다. ㄷ자 형태이며 당시 상류층의 생활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시내 중간에 있는 남고문은 읍성의 남쪽 대문이었다.

나주 석당간.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나주 석당간.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남고문의 형태나 회차로가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서울의 남대문을 좀 작게 만들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광주에서 나주로 들어가는 국도 1호선 길가에는 석당간이 세워져 있다. 석당간은 보물 49호.「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나주의 지형이 배를 닮아 안정을 빌기 위하여 성 안에는 나무 돛대를 성 밖에는 돌 돛대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나주 완사천.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나주 완사천. 2004년 7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완사천, 고려건국의 인연이 맺어진 샘물?
나주를 고려 개국의 한 기둥으로 꼽는데 그 시작이 바로 완사천에서 이뤄진다. 호족 왕건이 궁예의 수하로 있으며 후백제 및 신라와 분투할 당시 나주는 후백제를 아래로부터 압박할 수 있는 중요 근거지라 자주 왕래를 하였다. 어느 날 완사천 앞을 지나는데 목이 몹시 말랐다.

마침 한 처녀가 있어 물을 한 바가지 달라 하니 처녀는 버드나무 잎을 띄어 주는 게 아닌가. 마시는 물에 굳이 잎을 띄운 이유를 물어보니 너무 급하게 마시다 체할까 그랬다고 한다. 왕건은 처녀의 지혜에 감탄하고 부부의 연을 맺는다. 오씨 성의 이 처녀가 바로 고려 2대왕 혜종의 어머니인 장화왕후가 된다.

당시는 후삼국시대의 혼란기라 각 지방의 호족들이 각기 무장을 하고 세력을 이루고 있었기에 혼인을 통해 결맹을 다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왕건은 오씨 처녀와 결혼함으로써 나주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이후 고려를 세우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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