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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백두대간종주 ⑤] 민족의 영산, 천왕봉에서 만난 전설
[백두대간종주 ⑤] 민족의 영산, 천왕봉에서 만난 전설
  • 박상대 기자
  • 승인 2004.09.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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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전설을 담고 있는 지리산 트레킹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을 오르다.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민족의 영산, 지리산을 오르다.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경남] 유구한 세월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산. 어머니의 품속 같은 산, 민족의 한이 서린 산, 그리움이 사무친 산이라고 말하는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왔습니다.

지리산에는 전설이 많습니다. 사람들 탓이지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정치적 충돌이 있었고, 이념적 갈등과 투쟁이 있었고, 그때마다 입에 담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산 속에 묻혔습니다.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신선이 살았다는 민족의 영산 지리산.

이 반도를 지탱하는 중추 골격인 지리산은 경남의 함양 하동 산청,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까지 3개 도 5개 군 남도 8백 리에 뻗쳐 있답니다. 산자락마다 사람들이 터전을 이루고 있고, 계곡 능선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고개마다 전설이 있고, 역사가 숨어 있지요.

지리산은 ‘지혜로운 이인(異人)이 많은’ 산이라고 하지만,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도 많은’ 산입니다. 지리산 쪽으로 오줌도 안 눈다는 사람이 있고, 지리산 이야기만 하면 가슴이 콩닥거린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리산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영혼을 찾아 틈만 나면 산에 오르는 사람이 있고, 지리산이 마음의 안식처라며 산에 올랐다가 영원히 잠든 사람도 있지요.

술을 마시다가 지리산이 그립다며 눈물을 훔친 사람도 있습니다. 지리산은 큰 덩치만큼이나 봉우리가 많습니다. 천왕봉, 벽소령,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등등. 그들을 모두 오르지 않고도 사람들은 지리산을 올랐다하고, 지리산 이야기가 나오면 아는 체하며 끼어 듭니다. 이 글을 쓰는 기자도 지리산을 겨우 몇 봉우리 다녀왔을 뿐이라 낯이 뜨겁답니다.

천왕봉 가는 길. 통천문을 향해 오르는 사람들.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천왕봉 가는 길. 통천문을 향해 오르는 사람들.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천왕봉 오르는 숲길에서 마주한 전설
전설은 오래된 것도 있지만 최근에 생성된 것도 있습니다. 신라 때 천왕봉에 경주산 옥돌로 성모상을 만들어 지리산의 수호신으로 삼았답니다. 키가 1m 좀 넘고, 어깨 넓이가 50cm가 좀 더 되는 석상이지요. 조선시대 이성계가 전주군영에 근무할 때 남원의 여원재에서 왜군을 물리쳐서 천왕봉 너머로 쫓아버렸지요.

그때 도망치던 왜군들이 천왕봉에 있던 수호신인 여신상을 두 동강 내버렸답니다. 그 여신상은 그 후 몇 차례 천왕봉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때 또 수난을 당했고, 해방 후에는 기독교인에게 수난을 당해 몸을 많이 다친 뒤 한 스님에 의해 지금 천왕봉 아래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네요.

다른 전설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국 명산을 돌며 기도를 올리는데 지리산에서만 응답을 얻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반역산, 불복산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답니다. 지리산을 무대로 삼은 최초 문학작품은 제목만 전하는 ‘지리산가’ 랍니다.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이 노래는 백제 여인의 정절과 관련한 전설입니다.

백제 때 미모가 출중했던 여인을 왕이 불렀는데 ‘지리산가’를 지어 부르고는 산 속에 들어가 죽음으로 항거하며 부녀자의 도리를 지켰다는 슬픈 이야깁니다. 백제시대 노래 ‘정읍사’를 통해 백제여인들의 정조관념과 지아비를 생각하는 마음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동행한 백제의 후예 여인들에게 곁들여 이야기해 주었지요.

다음 전설은 근래에 만들어진 겁니다. 저 유명한 한국 전쟁 후 산사람이라 불리던 빨치산 청년과 산아래 동네 처녀의 러브스토리입니다. 밤마다 한 청년이 처녀 집에 드나들었는데 어느 날 처녀가 산으로 따라 들어갔고, 몇 달 뒤 산에서 내려온 여인이 아들을 낳아 놓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답니다. 지리산 자락 여인들의 목숨을 건 사랑과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지요.

장터목 산장에서 제석봉 오르는 길.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장터목 산장에서 제석봉 오르는 길.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장터목과 제석봉을 거쳐 천왕봉까지
백무동 계곡을 거쳐 장터목을 오르는 길에 참샘이 있습니다. 참샘에서 맛있는 샘물을 마시고, 숲길을 계속 오르자 망바위가 버티고 서 있습니다. 망바위 너머로 짙은 안개가 깊은 강을 이루고 있네요. 소설가 정도상은 장편소설 <길 없는 산>에서 “지리산은 바다였다”고 했습니다.

고생대를 거쳐 중생대에 이르기까지 변성작용을 일으킨 생태적 이야기만은 아니었겠지요. 지리산을 덮고 있는 짙은 안개가 거대한 바다처럼 보였습니다. 안개가 바람에 날리면 저 멀리 산봉우리들은 섬이 되는군요.  

장터목 산장. 옛날에 주변 마을 사람들의 장터였다.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장터목 산장. 옛날에 주변 마을 사람들의 장터였다.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고개를 30분 쯤 더 오르자 장터목산장이 시야에 들어오네요. 산 위에서나 산 아래서나 쉼터는 반갑고, 몸에 생기를 채워 줍니다. 목조건물로 지어진 장터목산장. 옛날 함양군 마천과 산청군 시천 사람들이 물물교역을 했던 곳인데 이제는 등산객들의 쉼터가 되었지요. 산장에 배낭을 부려 두고, 중산리쪽으로 50m를 내려가 식수를 한 병 담아 들고 제석봉을 올랐습니다.    

제석봉 오르는 길에는 암봉이 여럿 있고, 고사목들이 앙상한 가지를 떨고 있네요. 제석봉의 고사목과 목초지대를 보며 걷는데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습니다. 고사목들이 천수를 다하고 등산객에게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눈 먼 사람들이 억지로 고사시킨 것이니까요.

원래 제석봉에는 아름드리 전나무와 잣나무, 구상나무 등 침엽수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대요. 그런데 자유당 정권의 한 장관 친척이 지리산에 제재소를 만들어 놓고 불법 벌목을 했답니다.

온갖 나무에 구멍을 내거나 톱질을 해서 나무들을 죽게 만들고, 시들어가는 나무들을 자연사한 것처럼 도벌하자 산악인들과 기자들이 고발을 했지요. 그러자 도벌업자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산에다 불을 질렀고, 수목들이 불에 타서 더러는 앙상한 가지만 남고, 더러는 이미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제석봉 오르는 길과 불에 탄 수풀, 그리고 비명횡사한 고사목들.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제석봉 오르는 길과 불에 탄 수풀, 그리고 비명횡사한 고사목들.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그래서 채 키도 다 키우지 못한 어린 나무들이 비명횡사하였고, 벌거숭이가 되어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저간의 사정을 알지 못한 등산객들은 가련한 고사목 앞에서 폼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더이다. 제석봉에 오르자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제모습을 드러냅니다.

다시 몇 개의 암봉을 넘어서자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이 나타났습니다. 허리를 구부리지 않으면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게 되는 좁다란 바위통로. 철재 사다리를 타고 통천문으로 올라갑니다. 하늘로 통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겠지요.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며 통천문을 통과하자 다시 경사가 심한 암봉이 앞을 가로 막습니다.

정상은 아직도 모든 것을 보여 주지 않네요. 지리산은 자연의 위대함을 통해 인간에게 겸손과 인내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이치를 깨닫게 한 뒤 비로소 천왕봉에 발을 올리게 하는군요.

천왕봉에서 돌아본 서부능선. 멀리 촛대봉이 보인다.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천왕봉에서 돌아본 서부능선. 멀리 촛대봉이 보인다.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천왕봉은 사방 팔방으로 얼굴을 내밀고
천왕봉의 얼굴은 어디인가? 제석봉이건 중산리 법계사 능선이건, 더 멀리 연하봉 앞에서나 웅석봉 능선에서나 천왕봉은 얼굴을 보여 줍니다. 그 얼굴이 참 잘 생겼습니다. 이땅에 있는 산치고 아름답지 않은 산이 없다는데, 천왕봉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참 잘 생겼다는 느낌을 줍니다.

백두대간의 끝이며 되돌아 시작이 되는 봉우리 천왕봉.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 천왕봉 정상에 ‘한국인의 기상이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씌어진 정상석이 서 있군요.

정상에서 두 눈을 휘두르는데 사방 팔방이 시야에 가득 들어옵니다. 하늘은 맑고 부드러워 보입니다. 그 북쪽 하늘 아래 백두산이 있겠지요. 남쪽으로 중산리 계곡이 보이고, 동쪽으로 웅석봉이 기다랗게 앉아 있고, 서쪽으로 촛대봉이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천왕봉 정상의 취재 기자(우).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천왕봉 정상의 취재 기자(우). 2004년 9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왕시루봉은 바다 속의 섬처럼 우뚝 솟아 있고, 그 앞쪽으로 수많은 능선들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산들은 태초에 하나였다는 사실을 믿고 있지만 산들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처음입니다.

서로 자웅을 겨루는 것인지,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는 것인지, 능선과 골짜기가 서로 몸을 섞으며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수히 많은 산봉우리와 능선들이 겹겹이 천왕봉을 에워싸고 있네요.

천왕봉 정상에서 발길을 돌립니다. 정상은 잠시 맛보고 느끼는 곳이지 오래 머무르는 곳이 아니지요. 언제 폭풍우가 몰아칠지 모르는 곳이 정상이잖아요. 정상에서 내려가면 다시 연하봉과 촛대봉과 벽소령과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를 이어 오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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