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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백두대간종주⑦] 설악산에서 만난 아마추어 산객들
[백두대간종주⑦] 설악산에서 만난 아마추어 산객들
  • 박상대 기자
  • 승인 2004.1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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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설악산 풍경.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설악산 풍경.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강원] 산객들은 “금강산은 수려하기는 하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기는 하나 수려하지 못한데 비해 설악산은 수려한데다가 웅장하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단풍잎보다 많은 대청봉과 공룡능선 산객들의 풍경입니다. 

야간 산행 중에 만난 설악의 달빛 설악산을 오른다! 며칠 전부터 가슴이 설렙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 설악산에 오른 뒤 수 차례 설악산을 찾았습니다만 언제나 마음이 설레는군요. 아마도 첫인상 탓이 아닐까요? 비포장 길을 달려 한계령을 넘을 때 비경에 취해 재잘거리던 입을 꼭 다물고, 구불구불 돌아가는 낭떠러지 길에서 오금이 저리던 일까지 기억에 생생합니다.

백두대간의 중요지점인 한계령 고개.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백두대간의 중요지점인 한계령 고개.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비선대와 울산바위, 곱게 물든 단풍과 고갯마루를 넘나들던 하얀 안개를 보며 ‘햐!’ 하고 감탄사를 연발했었지요. 버스에서 내려 고갯마루를 걷는데 찬바람이 쏴아 목덜미를 훔칩니다. 옷깃을 여미고 산을 오르는데 손이 좀 시렵더군요. 찬바람이 불지만 마침 기분이 좋을 정도! 보름달은 아니지만 둥그런 달이 길동무로 나서는군요.

백두대간을 타는 동안 수 차례 야간산행을 했지만 달밤은 처음입니다. 정말 황홀한 밤입니다. 달빛 흐르는 밤길은 대부분 고요합니다. 설악산의 밤도 잡티 한 점 없는 적막감에 휩싸여 있군요. 적막감 속에 대원들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산마루를 향해 오르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정겹습니다. 형제들의 숨소리, 친구들의 숨소리, 가족의 숨소리 같습니다.

걸레봉 너머로 산불을 연상시키는 안개가 넘나들고 있다.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걸레봉 너머로 산불을 연상시키는 안개가 넘나들고 있다.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소년 시절에 읽은 글이 떠올랐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무엇인가를 놓고 한량들이 입담을 늘어놓는데 이런 저런 입담들 끝에 “어두운 방안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첫손가락에 꼽혔답니다. 저는 이제 “달밤에 산에 오르는 동료의 거친 숨소리!” 라고 말할 겁니다.

황철봉 산마루에 앉아 물병을 꺼내 목을 축였습니다. 물맛이 참 좋더군요. 땀을 흘린 뒤에 목구멍으로 흘려보내는 찬물은 짜릿한 행복감을 느끼게 합니다.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너덜지대를 몇 개 통과했는데 멀리 동해바다 위로 붉은 띠가 생기네요.

깊은 산에서 새날을 맞이하는 기분은 엄숙합니다. 어둠 속에서 밤새도록 치열하게 살아온 것이 자랑스럽고, 살아 있음이 대견합니다. 눈을 비비고 이부자리를 걷어올리며 새날을 맞이하는 아침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해가 뜨면 달은 제 역할이 끝납니다. 슬그머니 제 몸을 숨겨 버리지요. 이제 기자는 한가롭게 달빛에 취해 있을 시간이 아닙니다.

공룡능선을 타고 있는 사람들.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공룡능선을 타고 있는 사람들.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일상으로 돌아와 산행과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노동의 시간이 된 겁니다. 열심히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희미한 빛으로 아침나절까지 동행해준 달님 안녕! 서로 양보할 줄 모르는 아마추어 산객들 마등령에서 희운각 산장까지 가는 길은 공룡능선. 설악산에서 가장 아름답고 험한 암릉이지요. 설악산을 찾는 많은 산객들이 공룡능선을 타기 위해 산에 오른답니다.

이 능선을 완주하는 것은 영광이며, 자랑스런 산행이 된답니다. 나한봉을 넘어 서는 순간부터 시선이 흔들리고,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공룡의 등줄기처럼 울퉁불퉁하다가 쭈뼛쭈뼛 오르내리는 암릉. 기암 절벽에 의젓이 살아가는 소나무와 구상나무, 바위틈에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단풍잎들. “얏다. 요염하다.”

공룡능선을 타고 있는 사람들.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공룡능선을 타고 있는 사람들.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바람 한 점 없는 가을날 오후, 파란 하늘 아래 파르르 떨고 있는 단풍잎의 자태를 보고 한 여성대원이 감탄사를 토합니다. 그 모습이 또한 사내의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작은 바위나 멀리 있는 암릉이나 기묘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하나 소홀히 흘려보낼 것이 없네요. 게다가 앞쪽에서 마주 오는 사람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늘고 있습니다.

“우리는 50분을 기다렸어요. 먼저 올라갑시다.” “내려가는 사람이 먼저 내려가야 올라오기 쉽잖아요.” “자, 10명씩 교대로 올라가고 내려갑시다.” 오르고 내려야 하는 산길에서 자주 마주하는 모양새입니다. 밑에서 오르려는 사람들과 위에서 내려가려는 사람들이 서로 로프를 붙잡고 양보를 못한다고 옥신각신합니다.

끝청에서 바라본 중청과 대청봉.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끝청에서 바라본 중청과 대청봉.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아이쿠. 저길 어떻게 내려가? 나는 몰라!” 한 여성대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실제로 그 분 차례가 되자 로프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벌벌 떨고 있을 뿐 발을 아래로 옮기지 못합니다. 쯧쯧쯧. 단 한번도 로프를 타보지 못했다네요. 그런데 공룡능선에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1,275봉을 넘으며 천화대를 바라보고 있는데 헬기 소리가 들립니다.

등산을 하던 남자가 발목을 다쳤답니다. 이 좋은 절경 앞에서 부상이라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지난해 설악산에서 부상을 입고 119구조대의 도움을 받아 하산한 사람이 3백14건이나 된답니다. 헬기가 구조한 게 16건이고요. 지난 10월 3일에만 15명을 업거나 들것에 실어 내려왔고, 헬기가 3회 떴답니다.)

부처님도 가르쳐주지 않은 양보 희운각 산장의 밤은 깊고 쌀쌀했습니다. 땅에는 서릿발이 돋았고, 손이 시렸습니다. 산장 옆으로 조그만 개울이 흐르는데 그 개울에서 산객들은 물병에 마실 물을 담습니다. 코펠에 물을 떠다 밥을 짓기도 하고. 희운각에서 중청까지 오르는 길은 경사가 심하네요.

초반부 철계단은 오르내리는 산객들의 배낭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좁았는데 내려오는 사람들이 조심하지 않으면 올라가는 사람이 뒤로 넘어질 수도 있겠네요. “다리가 욕하겠다. 어제 그만큼 혹사시켜 놓고 초반부터 또 급경사라니….” 그러나 숨을 고르며 한 걸음씩 잘도 올라갑니다. 철계단을 다 올라가자 위쪽에서 쿵쿵 소리를 내며 사람들이 내려옵니다.

대청봉에 오른 사람들. 표지석을 찾을 수 없다.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대청봉에 오른 사람들. 표지석을 찾을 수 없다.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대청봉에서 일출을 구경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지요. 좁은 산길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마치 계곡에서 봇물이 쏟아지듯 합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올라가는 사람들의 힘겨워하는 모습이나 사정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먼저 내려가야겠다는 생각들뿐이네요. “어디서 자고 오시는 길입니까?” “봉정암에서요.” “엊저녁에 봉정암 미어터졌겠네요?” “2천 명 정도 잤답니다.”

저는 5년 전 쯤 이맘때 봉정암에서 하룻밤을 신세진 일이 있습니다. 불교신자들과 단풍놀이차 들른 여행객들이 방마다 가득 차 있더군요. 방이나 법당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대웅전 처마 밑에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하늘을 수놓고 있는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이했었지요. “아휴. 봉정암에서 무슨 기도들을 했을까? 스님들은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설법을 하셨나? 가슴에 연꽃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왜 양보할 줄 모를까?”

오르던 걸음을 멈추고 길을 양보해도 고맙다는 인사를 할 줄 모르네요. 잿빛 바지를 입은 보살님, 올라가는 사람의 발을 밟고 내려가면 어떡합니까? 아수라로 가는 사람들 같더이다. 소청에 오르니 북쪽과 서쪽으로 운해가 흐르고 있습니다. 잔잔하다가 꿈틀꿈틀 파도를 일으키는 운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산이 커졌다 작아졌다 합니다. 운해 가운데 작은 섬들이 둥둥 떠다니고요. 중청 산장 부근과 대청으로 이어진 등산로에 사람들이 꽉꽉 늘어서 있습니다.

대청봉에서 본 설악산 운해.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대청봉에서 본 설악산 운해. 2004년 1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들이야?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휴일에는 설악산에 안 와야겠어.” “단풍잎보다 사람이 더 많다야!” 대청봉 정상에는 발 딛을 틈이 없네요. 정상 표지석 앞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이 표지석을 에워싸고 있군요. 어떤 사람들은 단체로 그 표지석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이러다가 대청봉 무너지겠다!” 대청에서 귤을 하나 까먹고 하산하는데 오른쪽으로 화채봉이 반짝 빛납니다. 햇빛이 드는 양지쪽으로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잎이 빛나고, 능선 너머로 어두운 그림자가 덮여 있습니다. 큰산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음지와 양지의 색깔을 보는 것도 재미있군요. 산을 오르다가 뒤를 돌아볼 줄 알아야 산을 제대로 타는 것이라고 하는데 능선을 넘나드는 음양의 변화를 보는 것도 재미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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