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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교과서 밖에서 만나는 백제②] 백마강 강바람에 울리는 서정 노래
[교과서 밖에서 만나는 백제②] 백마강 강바람에 울리는 서정 노래
  • 김연미 기자
  • 승인 2004.11.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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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부여 궁남지.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부여 궁남지.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여행스케치=부여] 다시 부여를 찾았다. 공주 금강을 따라 사비 백제에 도착하니, 그 사이 옥광밤은 후두둑 소낙비처럼 떨어지고 금강은 더욱 깊어졌다. 강은 하늘을 담고 미루나무를 담고 산을 담고 사람을 안는다. 나는 역사의 한사람, 강가에 나왔다. 부여 시내 백마강 안에는 정림사지, 궁남지, 국립부여박물관이 있고, 백마강 외곽에 성흥산성 등이 있다. 한 조각씩 퍼즐을 맞추듯 천오백년 전 사비 백제의 수수께끼를 찾아 떠난다.

백제 천오백년, 별로 오랜 세월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몇 번 안가서 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
- 신동엽 시 <금강> 중에서  

궁남지
연꽃은 없다. 까맣게 꽃이 진 자리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궁남지 연못을 둘러싼 버드나무가 바람에 너울거린다. 연못 입구 큰 그네가 사람들로 흔들거린다. 궁남지는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최초의 인공 조원이다.

삼국사기에 “무왕 35년(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나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못 주위에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방장선산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 “무왕이 3월에 비빈과 함께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라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이 연못은 1965년에 복원해 놓았다.

지금은 연못 주위를 30여분이면 돌아볼 수 있지만 원래는 세배 정도 크다고 한다. 물은 탁하다. 그러나 청명한 하늘과 흰 구름을 담았다.

해질 무렵의 정림사지 오층석탑.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해질 무렵의 정림사지 오층석탑.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정림사지
부여 시내 중앙로에 자리한 정림사지는 담에 쌓여있다. 지리적으로도 부여의 중심이며 부여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다. 담 중앙에 뾰족이 솟아있는 탑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마치 연인을 대하 듯 눈길이 부드럽다.

백제 건물의 유구가 거의 없는 부여에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정림사지 탑밖에 없다. 1942년 발굴 당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臧當草’라 새겨진 기와편이 나와서 비로소 정림사란 이름을 얻었다. 태평8년이면 고려 현종 때이므로 백제 시대에는 어떻게 불렸는지 여전히 알수 없다. 높이 8.33m. 멀리서 보면 크지 않고 아담하게 보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장중하다.

얇은 지붕돌은 모서리 처마 부분을 살짝 올라가게 만들어서 경쾌하면서 세련된 느낌을 준다. 백제 목탑은 다 스러지고 익산 미륵사지 탑과 정림사지 오층석탑만 남아있다. 두 기의 탑중 백제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완성미를 보여주는 것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다.

석불좌상. 얼굴 뒤에 맷돌로 사용한 흔적이 있다. 2004년 11월. 김연미 기자
석불좌상. 얼굴 뒤에 맷돌로 사용한 흔적이 있다. 2004년 11월. 김연미 기자

오층석탑 뒤 건물 안에는 고려 때 불상인 석불좌상이 있다. 5m가 넘는데 형태가 거의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다. 정림사지는 새벽녘에 사진을 찍어야 분위기가 제대로 난다고 한다. 부소산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저녁 무렵이 좋고. 부여사람들은 가무를 좋아했던 백제 후손이 확실하다. 소박하면서 멋을 아는 사람들이다.

백제문화를 한눈에 볼수 있는 국립 부여 박물관.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백제문화를 한눈에 볼수 있는 국립 부여 박물관.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국립부여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은 오래된 박물관이다. 1929년 부소산 남쪽에 자리한 조선시대 관아 객사에 백제 문화재, 유물을 모아 전시하게 된 것이 박물관의 시작. 1939년부터 ‘조선총독부 박물관 부여분관’이란 박물관의 이름을 갖게 된다.

백제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가 아스카문화의 원류가 되니 일본이 백제에 관심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선사실, 역사실, 불교미술실, 박만식교수 기념실 등 백제 유물 중심으로 1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93년에 부소산에서 금성산 기슭으로 자리를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금동관음보살상 등 백제 불교 문화를 통틀어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기의 무덤이 있는 능산리 고분.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7기의 무덤이 있는 능산리 고분.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박물관 내 뜰에는 거대한 석조가 있으며, 야외에도 다양한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돌아보는 데 1시간 정도. 부여에 가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 백제 왕릉원 능산리 고분군 경주 신라왕들의 무덤 규모와 비교해 볼 때 조금 실망스럽다.

왕들의 무덤 맞을까 의문이 들 정도다. 점수를 주자면 소박하다. 7개 고분이 있는데 대개 도굴이 되어서 주인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사비시대 왕이 여섯 분이였으니 역대 왕들이 여기에 묻혔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전북 익산에 무왕과 왕비의 능이 있으니 무왕은 여기에 묻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2기의 릉은 누구의 것인가? 그 중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있는 1호기가 가장 유명하다. 고분 안에 벽화를 그리는 것은 고구려 사람들의 문화라고 한다. 사신도가 나왔다는 것은 백제가 고구려와 문화교류를 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고구려 사신도 백호는 당장 덮칠 듯 용맹스럽다. 그러나 백제의 백호는 하늘에 사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 사는 물고기처럼 잔잔하고 부드럽다. 다른 문화를 수용하되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는 백제인의 미를 볼 수 있다.

복원된 성흥산성.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복원된 성흥산성.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성흥산성과 대조사
금강 외곽 임천에는 성흥산성이 있다. 성흥산성은 백제시대 쌓은 성곽 중에서 쌓은 연대와 당시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산성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제24대 동성왕 23년 “8월에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동성왕은 웅진시대 백제의 부흥 기틀을 다진 왕으로 신라와 고구려 관계에 매우 적극적으로 대처했다고 한다. 성흥산은 2백68m로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백마강이 휘돌아가며 강경으로 빠져나가는 평야지대에 솟아있기 때문에 산 위에 오르면 강경, 논산, 익산의 미륵사, 멀리 장항제련소까지 금강 하류일대가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성왕은 이 성 때문에 시해된다.

성흥산성내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성흥산성내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당시 이 성은 가림성으로 불렸다. 동성왕은 위사좌평 백가에게 가림성을 축성케 하고 지키게 했다. 지리적으로 이 성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지만 백가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왕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11월 겨울에, 사냥을 좋아하던 동성왕은 사냥을 하다가 사비서원(부여)에서 큰 눈을 만났다.

길이 막혀서 오도가도 못 하게 되자 마포촌이라는 곳에서 머물게 된다. 백가는 자객을 보내 왕을 시해한다. 백가는 25대 무령왕이 즉위하자 바로 진압되어 참형된다. 중요한 요충지라 성은 쌓았으나 사람을 잘못 사용해 죽임을 당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대조사 미륵보살입상.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대조사 미륵보살입상. 2004년 11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성흥산성은 뒤에 백제부흥운동 때에도 중요한 근거지였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으나 자연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보다. 안개가 끼어서 적이 오는지 볼 수가 없어서 백제부흥운동도 무너지고 만다. 성흥산성을 내려오면 성흥산 중턱에 두 갈래 길이 나뉜다. 대조사 가는 길이다. 대조사에는 거대한 미륵보살입상이 있다. 절집 뒤편에 있는데, 마치 부처가 땅에서 솟아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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