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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백두대간종주기⑨] 위험한 산길, 그리고 아름다운 산행, 한강기맥 수리봉
[백두대간종주기⑨] 위험한 산길, 그리고 아름다운 산행, 한강기맥 수리봉
  • 박상대 기자
  • 승인 2005.01.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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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한강기맥 수리봉 오르는 길에 본 풍경.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한강기맥 수리봉 오르는 길에 본 풍경.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횡성]  강원도 횡성이라. 한강기맥 산행의 골인 지점인 오대산이 지척입니다. 초겨울에 다녀온 한강기맥에서 만난 아름다운 이들 이야깁니다. 첫눈과 낙엽과 낯선 사람들까지. 아침부터 심상치가 않네요. 산에 눈이 쌓였을 거라는 전언이라. 조금은 흥분되고, 조금은 걱정이 앞서기도 하네요. 특별한 손님들을 초대해 놓았거든요.

강원도 횡성 먼드래재. 길이 넓고 길다하여 붙여진 이름. 한강기맥 골인지점이 오대산인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랍니다. 참 많이 걸었네요. 어느 분은 산행을 마칠 때마다 ‘또 하나를 헤치웠다’고 하더군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러겠어요. 산객들을 태운 버스가 경기도를 지나 강원도에 접어들자 산마루에 하얀 눈이 쌓여 있습니다. ‘아, 눈이다!’누군가 짧은 탄성을 토합니다.

눈꽃 사이를 걷고 있는 대원.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눈꽃 사이를 걷고 있는 대원.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며칠 전부터 영동지역에 첫눈이니 폭설이니 했지만 직접 산행길에 눈을 마주하기는 처음입니다.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그려집니다. 참 오랜만에 산에서 눈을 마주할 수 있겠군! 청년시절 송년 산행을 한 후 겨울산행을 거의 하지 않았거든요. 이번 한강기맥 산행은 A, B코스로 나누었습니다. A팀은 수타계곡쪽 장승재에서 출발하고, B팀은 먼드래재에서 출발. 저는 얼떨결에 B팀의 인솔 대장이 되었습니다.

처음 솔터산악회 산행에 참석한 여성들과 함께 먼드래재에서 산행을 시작했지요. 언제나 그렇듯 산행은 시작이 중요하지요. 시작을 잘 해야 하산할 때까지 몸이 힘들지 않습니다. 산행이 꼭 마라톤 같아서 들머리에서 너무 성급하게 덤비거나 늑장을 부리면 중간에 힘이 들지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산행 경력이 많은 어른들이 앞장을 섭니다.

산행 중에 지도를 보고 길을 확인하는 산객들.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산행 중에 지도를 보고 길을 확인하는 산객들.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늦가을부터 초겨울 산행 때는 낙엽이 발을 덮는다.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늦가을부터 초겨울 산행 때는 낙엽이 발을 덮는다.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저는 처음 온 여성 산객들과 뒤를 따르고. 산마루를 걷는데 귀가 즐겁습니다. 바삭바삭 사각사각. 수북하게 쌓인 낙엽들이 발에 밟히는 소리가 가슴을 때립니다. 바람이 휘리릭 불면서 낙엽들이 바람에 날려 뒹굴기도 합니다. 낙엽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내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 가슴이 터지도록 사랑하는 그들의 속삭임을 살짝 엿듣습니다.

이제는 산길을 걷는 사람들의 숨소리도 거칠어지네요. 사람과 산이,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시간입니다. 산행의 재미는 온몸을 던져 산 속에 푹 빠지는 거지요. 산행을 하는 동안 저는 크고 작은 수많은 봉우리를 오를 때마다 희열을 느낍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봉우리를 오를 때면 색다른 오르가즘을 느끼는 거지요. 봉우리에 다가서는 순간, 절정의 희열을 만끽하기 위해 무거운 다리를 끌고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하얀 눈이 낙엽 위에 곱게 앉아 있네요. 많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눈을 보니 발걸음이 더 가벼워집니다. 참 행복하고 아름다운 산행이 되리라. 그런데 이런 여유도 잠시. 30분도 못 가서 거대한 난관을 만났습니다. 앞서 가던 산객들이 암릉 위에서 머뭇거리고 있네요. “땅이 얼어서 앞으로 갈 수 없어요. 내려갈 길이 없어요.”  

눈이 내린 산길을 따라 더운 숨을 내쉬며 묵묵히 걷는 대원들.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눈이 내린 산길을 따라 더운 숨을 내쉬며 묵묵히 걷는 대원들.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수리봉을 오른 솔터산악회원들.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산행을 마치고 내려온 동부화재 고운회 회원들.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모두들 맥이 풀린 모습입니다. 급경사에 낙엽이 쌓여 있고, 낙엽 위에는 눈이 앉아 있네요. 아무런 장비도 없이 내려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겠지요. 이럴 때 왜 로프를 가지고 오지 않았는지…. 그러나 대간길에 포기란 없답니다. 게다가 여태껏 숨을 헐떡거리며 제 뒤를 좇아온 여성 산객들이 일곱이나 있는데. (사실 이들은 장거리 산행이 처음인데 순전히 제 말만 믿고, 아름다운 산의 낭만적인 산행을 따라나선 중년 여성들이었거든요.)

이들은 실망을 넘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못 가면 어떡해! 그럼 돌아가는 거야?” 누군가 뒤통수에 대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벌써 데려가겠어?’ 앞장서서 스틱으로 낙엽을 걷어내고, 쿡쿡 땅을 찍어가며 길을 뚫었지요. 좀 위험한 일이었지만 산객들을 위해 기꺼이 길을 만들었습니다.

수리봉을 오른 솔터산악회원들.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수리봉을 오른 솔터산악회원들.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조심 조심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발바닥에 땀이 납니다. 낙엽은 초겨울 산행의 무서운 복병! 더군다나 눈이 덮여 있다면 낙엽길은 낭만 대신에 지독한 난코스가 되겠지요.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땅이 녹으면서 산길은 더 미끄럽네요. 오르는 길은 몸을 낮추면 그래도 걸을 만한데 내리막길은 오금이 저릴 정도네요.

까악까악 까마귀들이 웁니다. 엔간하면 새들은 울지 않고 노래한다고 말하는 사람인데 까마귀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어렸을 적에 까마귀가 울면 마을 사람이 죽거나 나쁜 소식이 들린다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랍니다.

아얏! 까마귀 울음소리에 신경을 쓰고 있는데 나뭇가지가 콧구멍을 후비고 들어오네요. 나뭇잎이 떨어져버린 나뭇가지는 아주 위험합니다. 지난 주에는 나뭇가지가 눈동자를 때려서 기겁을 했지요. 잔가지에 맞은 순간 앞이 캄캄하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대요. 어찌나 아프던지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5분 정도 울었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고 나자 눈을 뜰 수 있더라구요.

“엄마야!” 앞서 가던 한 산객이 기어코 미끄러지네요. 다행히 부상을 당하진 않았지만 제 가슴은 더 졸아듭니다. 정상적인 산행이라면 지금쯤 목적지에 도착할 시간인데 아직도 들머리에서 헤매고 있네요. 산길 사정이 좋지 않은데다 걸음걸이가 서툰 분들이라 시간이 두 배로 허비된 탓입니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는 산악회원들.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함께 점심 식사를 하는 산악회원들.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여우재를 지나 자리를 폈습니다. 걸어온 거리는 짧지만 허기진 배는 채워야겠지요. 양지 바른 쪽에 자리를 펴고 점심 보따리를 푸는데 영락없이 소풍 나온 사람들 도시락이네요. 각기 다른 반찬에, 서너 가지 술과 푸짐한 과일, 누룽지에 시래기국까지. 아, 어차피 건강하자고 하는 산행! 잘 먹고 다녀야지요.

목적지인 수리봉 팔부능선을 오르는데 헉헉 숨이 차네요.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산을 오르는데 입에서 저절로 욕이 나옵니다. 염병할, 왜 이렇게 미끄러운 거야! 햇볕이 들자 얼었던 땅이 미끄러운 건데 괜히 산에다 화풀이를 합니다.

오르기도 이렇게 힘든데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내려갈꼬? 한참 동안 백마고지 전투와 1.4후퇴와 빨치산까지 떠올리며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는데 반대쪽에서 출발한 선두팀이 내려옵니다. 대학산 아래 쌓인 눈, 멋진 눈꽃 사진, 수리봉에서 몇 시간…. 제 말에 선두팀은 손사래를 칩니다. 눈이 쌓인 곳까지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이쪽의 걸음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라네요.

강원도 횡성에서 볼 수 있는 옥수수대 풍경.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강원도 횡성에서 볼 수 있는 옥수수대가 놓인 풍경. 2005년 1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수리봉에 발을 디밀어본 것으로 만족하고 하산. 아쉽지만 산에서 고집을 부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요. 그래도 걸어온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지요. 새로운 능선길을 타고 하산을 시작했지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니까 이것도 재밌다야. 괜찮은 추억이네.” 정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뚫고 하산하니 봉명리라네요.

수리봉과 교학산이 병풍을 이루고 있는 아늑한 산골, 하루에 두 번 다니는 시외버스 종점이 있는 마을이지요. 동네 사람들이 길을 내면서 생긴 돌탑들을 구경하며 한 시간을 더 걸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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