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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해외여행] 중세문화를 간직한 제정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해외여행] 중세문화를 간직한 제정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 박상대 기자
  • 승인 2019.08.14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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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러시아의 전제군주가 된 표트르 대제
표트르가 건설하고 통치했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푸시킨이 살았던 아파트와 즐겨 찾던 카페 남아 있어
여름궁전의 아름다운 분수대. 사진 / 박상대 기자
여름궁전의 아름다운 분수대.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서쪽 경계, 중세 유럽 문화를 꽃피운 제정러시아의 수도, 그리고 레닌그라드란 이름으로 불린 러시아 대표도시. 러시아 최고 교육도시로 숱한 석학들을 배출한 도시를 다녀왔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당을 가진 나라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 러시아에서 가장 서쪽에, 유럽과 가까이 있는 항구도시다. 이곳은 먼 옛날부터 러시아의 도시였던 것은 아니다. 17세기까지 스웨덴 땅이었고, 갯벌이 많은 바닷가의 습지대였다. 그러던 중 러시아의 땅이 되고, 200년 가까이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다. 

공궐보다 높은 집을 지을 수 없었다는 중세 신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풀코보 공항(Pulkovo Airport)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고속도로다. 창밖으로 넓은 땅을 가진 나라답게 농토와 초원, 산이 이어졌다. 드문드문 고층 빌딩들이 있고, 뒤이어 시내로 접어들었다. 

버스가 시내로 접어드는 순간 가지런히 정돈된  빌딩들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층수는 5층이나 4층인데 높이는 거의 같다. 도시의 한 복판에 네바강과 여러 갈래 운하가 흐르고, 그 주변에 빌딩들이 서 있다. 마치 장난감 도시처럼, 도심 빌딩들의 스카이라인이 비슷하다는 것은 이 도시가 계획도시이고, 강력한 법이 발동한 때 건설된 도시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네바강을 큰 줄기로 500여 개 지류가 운하로 형성되어 있다. 북유럽의 베네치아라 부르기도 한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네바강을 큰 줄기로 500여 개 지류가 운하로 형성되어 있다. 북유럽의 베네치아라 부르기도 한다. 사진 / 박상대 기자
네바강에는 유람선이 운행하고, 선상 레스토랑을 운영하기도 한다. 선상에서 식사하며 강변을 구경할 수 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네바강에는 유람선이 운행하고, 선상 레스토랑을 운영하기도 한다. 선상에서 식사하며 강변을 구경할 수 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는 17세기에 건설됐다. 건축물을 궁궐보다 높이 지을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일정한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3, 4, 5층으로 층수를 달리할 뿐 높이는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는 17세기에 건설됐다. 건축물을 궁궐보다 높이 지을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일정한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3, 4, 5층으로 층수를 달리할 뿐 높이는 같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이 도시를 기획하고 건설하며 통치한 사람은 중세 러시아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 잡게 한 표트르 대제이다. 그의 집무실은 작은 건축물이었지만 여름과 겨울 휴가를 보낸 궁궐은 도시애서 가장 화려한 건축물이었다. 이는 왕비의 역할이나 힘이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명한 여름궁전이나 겨울궁전은 왕비나 여왕의 입김이 작동한 결과물이다. 도시에서 시민들이 사는 모든 건축물은 궁궐보다 높이 지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집이 궁궐보다 한 칸 작은 99칸짜리 집을 지은 이치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바닷가에 새로 조성된 신도시에 전국에서 돈을 많이 가진 부자들, 정권을 쥔 백작들이 표트르의 뜻에 따라 신도시에 건축물을 지어 올렸다. 유럽 여러 나라 건축가들이 달려와 설계하고 시공했다. 높이에 관한한 유일한 예외가 있었으니 성당이다. 신의 영역인 성장의 천장이나 종탑은 궁궐보다 높은 지붕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보다 6시간 늦은 시차 때문에 저녁 식사를 현지 시각으로 8시에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는데 밖은 훤하다. 저녁 11시에도 아직 땅거미가 깔리지 않은 시내를 거닐면서 러시아의 백야를 체험한다. 가이드는 어두운 밤이 3시간도 안 될 것이라고 말한다. 밤 같지 않은 밤을 보내기 위해 숙소에 들어가 캔 맥주 하나를 마시고 지친 몸을 뉘었다.

표트르 대제가 살았던 저택과 그 앞에 세워진 동상.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폭군이라기 보다 러시아의 기틀을 세운 군주로 기억하고 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표트르 대제가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던 모습을 담은 동상. 네바강변 도심에 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강대국 러시아의 초석을 다진 표트르 대제
러시아의 중세는 몽골 유목민 칭기스 칸과 그 후손들에게 오랜 세월 지배를 당했다.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의 공격을 받으면서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때 한 지도자가 나타난다. 러시아의 기초를 다진 표트르가 그 사나이다.

표트르는 1672년 알렉세이 차르와 두 번째 황후인 나탈리야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이복형제들 사이에서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 정교회의 지지를 얻어 차르에 올랐다. 이복누이 소피야 공주가 주동한 쿠데타로 실권하고, 소년기와 청년기를 궁궐 밖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외인촌에서 생존을 위해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 등 서유럽 선진 국가에서 온 기술자들과 접촉하면서 최첨단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석공술과 목수일을 배우고, 말의 편자를 박는 일, 대포를 주조하는 일 등 10가지 남짓한 특수한 기술을 배웠다. 그의 지적호기심은 나날이 늘어갔다. 청년 표트르는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선원, 조선공, 포병, 법학자, 건축가, 예술가 등 러시아인과 외국인을 가리지 않았다. 

표트르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유럽 여러 나라에 사절단으로 참여하여 새로운 문물과 지식정보를 얻어오기도 했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새로운 지식정보로 무장한 표트르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최대한 활용했다. 친구들은 러시아 최초 해군을 창설하고 육군을 근대화 할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새로운 수도를 세울 때, 그리고 국가를 급진적으로 개혁할 때 동지가 되어 주었다. 

네바강변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은 수도를 지킨 요새였고, 훗날 아파트와 감옥으로 이용되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네바강변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은 수도를 지킨 요새였고, 훗날 아파트와 감옥으로 이용되었다. 사진 / 박상대 기자
국립예술대학 앞 네바강변에 있는 스핑크스. 그리스에서 돈을 주고 사온 것이라고 한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여럿 있다. 선사시대 유물과 중세 미술품,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귀하게 여긴다. 사진 / 박상대 기자

그는 1689년 모스크바 귀족의 딸인 예브도키야와 결혼했다. 이후에도 국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데 집중했다. 그 해 소피야 여왕이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서 패배하고, 귀족층의 불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 틈에 표트르는 친구들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1696년 봄, 표트르는 수천 명의 젊은이를 모아 해군을 편성해서 오스만 제국을 공격했고, 훗날 해군과 육군을 양성하여 스웨덴과 핀란드를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마침내 스웨덴 무적함대를 무너뜨린 러시아가 유럽의 강국이 되게 하였고, 스스로 러시아의 전제군주가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유럽의 명품 도시로 창설한 표트르는 수도를 옮기고, 강한 러시아를 목표로 모든 수단을 정당화 했다. 

표트르는 노년에 알코올에 중독되고, 아들을 죽일 만큼 심신이 미약해졌다. 미치광이 폭군 취급을 받다 급사했지만 현대를 사는 러시아 사람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표트르를 강대국 러시아의 초석을 다진 절대군주였다고 기억한다. 또한 부정축재를 하지 않아서 가족에게 물려줄 재산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청렴한 지도자였다고 말한다. 

예술공원에 서 있는 러시아 대표시인 푸시킨 동상. 사진 / 박상대 기자

러시아가 사랑한 열정적인 사랑시인 푸시킨
70년대까지 한국의 시골 이발소에는 작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아름다운 서양 어느 풍경과 한 송이 꽃, 그리고 예쁜 붓글씨가 쓰여 있는 액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푸시킨(어떤 이발소에는 “폭풍이 지난 간 언덕에도 꽃은 핀다”는 한 줄을 더 써넣기도 했다.)

마침 숙소에서 나와 왼쪽에 있는 예술공원에 커다란 사나이의 동상이 있다. 멀리서 봐도 범상치 않은 예술가의 동상이란 느낌이 왔는데, 가서 보니 러시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푸시킨이다.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란 평가를 받고 있는 푸시킨은 현재 여름궁전이 있는 마을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살았다. 지금도 그가 살았던 아파트와 자주 다녔던 카페가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라 칭송받는 푸시킨. 중세 최고 정원이라 불리는 여름궁전이 자리하고 있는 마을은 그의 이름을 따 푸시킨으로 불린다. 사진 / 박상대 기자

푸시킨은 영감 속에 경쾌한 리듬감이 흐르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콘스탄티노플에 노예로 팔려왔다가 영특한 면모 때문에 표트르 대제의 양자가 되고, 측근으로 활동한 외증조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다. 경쾌한 시를 썼고, 삶도 여유롭고 로맨틱했다. 

사랑시인 푸시킨은 미녀 부인을 얻었다. 그런데 그 부인을 넘보고 집적대는 사내들이 있었다. 푸시킨은 청소년기부터 지식인에겐 어울리지 않는 권투(격투기)를 스스로 훈련했고, 맨주먹 싸움에서 진 적이 없을 정도로 싸움의 고수였다고 한다. 주먹을 휘두르던 힘과 스피드로 권총을 다루는 솜씨도 뛰어났는데, 상대방보다 먼저 권총을 뽑아 상대의 손목을 박살낼 실력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결투를 하던 날 상대가 반칙(시작 신호보다 먼저)을 써서 총을 당겼고, 그 총알(결투에서 사용하지 않은 산탄)을 맞고 사흘 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시인은 비명횡사했지만 뭇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던 시와 동상이 남아 전하고 있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그가 태어난 마을을 푸시킨 시라고 부르며 추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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