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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옛길] 문경 새재, 굽이야 굽이굽이 고갯길, 발품보다는 입심으로 넘었다지요
[옛길] 문경 새재, 굽이야 굽이굽이 고갯길, 발품보다는 입심으로 넘었다지요
  • 김진용 기자
  • 승인 2005.02.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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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문경 조령 제1관문의 모습.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문경 조령 제1관문의 모습.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여행스케치=문경] 새로 났다는 중부내륙고속도로 미개통 구간은 온통 터널 천지였습니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고개를 지나는 가장 명쾌한 길 터널. 쉭쉭, 그 편한 터널 수십 개를 달려와, 굽이굽이 걸어넘어야 할 새재 고갯길을 찾았습니다. 경북 영주 부석의 장(市場) 분위기가 얼추 시끌벅적해질 무렵. 장터 앞마당에서는 남사당놀이가 한판 벌어질 태세다.

으레 그렇고 그런 난장판에 취한 척 김 선달도 동동주 한 사발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예 패랭이를 고쳐 쓰고 일어서고야 만다. 죽령을 넘으려면야 해가 중천일 쯤 출발해도 넉넉하련만, 이번 장돌이 길은 문경을 거쳐 새재를 넘을 요량이라 별 수 없이 부지런을 떨며 길을 재촉한다.

부석장터에서 어렵게 구한 토실한 풍기 인삼 8근만 제 값을 받아도 한양까지의 발품값으로는 충분하련만, 새재 너머 괴산의 겨울 고추가 한창 매운 맛이 올랐다는 말에 김 선달은 은근히 욕심이 난 게다. 지난해 늦게 본 아들놈 입에 풀칠이라도 시켜야 할 터이니. 저기, 벗은 아낙이 누운 형상을 한 산. 도리도표(道里圖標)를 꺼내 맞춰 보니 어느새 주흘산이렸다.

새재 초입 전경. 지금은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이 뚫렸다.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새재 초입 전경. 지금은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이 뚫렸다.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그 왼쪽이 조령산일 터이니, 이 사이 길이 ‘나는 새도 쉬어 간다’는 새재 초입이 틀림없으렸다. 십수 년 장돌뱅이 이력이지만 겨울 고갯길만은 녹녹치 않은 법. 게다가 새재 길은 초행이 아닌가. 김 선달은 잠시 봇짐을 내려놓고 길섶으로 비켜 앉았다. 험한 산마루를 올라타고 넘어야 하는 황톳길 이십 여 리.

새재를 넘어서야 괴산이고 충주 땅인 것이여. 거기서부터야 뱃길로 한양이 지척이지, 암. 새재에서 불어 내려오는 정월 여드레 칼바람이 귓바퀴를 베 간다……. 그렇게들 올랐겠지요.

산후 조리는 꿈도 꾸지 못하는 처를 삭풍 속에 남겨 놓고, 오랫동안 애비 얼굴을 못 보는 이유도 모른 채 눈만 말똥말똥한 자식을 뒤로 하고, 팔아 달라고 맡긴 곶감을 중간에서 다 해먹어버린 악덕 객주 놈과 벌인 주먹다짐 통에 한층 더 쑤시는 어깨를 주무르며…. 그네는 그렇게 두건 질끈 동여매고 새재에 올랐을 겁니다.

호환이나 화적떼보다 더 무서운 게 관리와 양반님네 행차였을 지도 모르지요. 나랏님의 행차가 잦았던 길에서 서민들은 한쪽 편으로 비켜 걸어야 했던 법이었잖습니까. 부임하는 동래 부사 행렬과 마주쳤다 길을 막는다며 역졸이 밀치는 바람에 용추 계곡으로 미끄러졌던 이들도 있었겠지요.

새재길의 단골 길손 보부상.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새재길의 단골 길손 보부상.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고갯길을 차마 다 넘지 못하고 더러는 화적떼가 되어, 관리들을 붙잡아 옷을 벗기고 나무에 매달아 두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낙동강에서 한강으로 가는 길이 영남대로였습니다.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문경 새재는 영남대로에서 가장 높은 고개였습니다.

누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 해서 새재(鳥嶺). 또 누구는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의 고개라고 새(사이)재, 새(新)로 난 길이라 해서 새재, 억새풀이 우거졌다고 새재…. 그 유래도 고개를 넘나들던 사람만큼이나 많습니다.

괴나리 봇짐을 맨 보부상과 천리 시집길을 나섰던 새색시, 급제를 꿈꾸던 선비, 관헌의 세곡과 궁중 진상품을 나르던 관리, 부임지로 향하는 신임 사또. 고갯길은 발품보다는 입심으로 넘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지친 길손들이 고갯길 굽이굽이에 걸어 놓았을 애환이며, 잔돌 하나하나에 새겼을 사연들. 새재 옛길은 그 흔적을 그대로 보듬고 있었습니다.

새재도립공원 관리사무소와 새재 박물관을 조금 지나면 황톳길입니다. 새재 초입이지요. 날씨가 따뜻하면 맨발로 올라도 좋겠네요. 주흘과 조령 능선이 하늘을 다 덮은 듯하다 느닷없이 시원하게 열리는 곳이 새재의 첫 관문, 주흘관입니다.

새재에 드는 길손이 소원을 빌던 성황당. 그 옆으로 주흘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나 있다.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새재에 드는 길손이 소원을 빌던 성황당. 그 옆으로 주흘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나 있다.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관문 너머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낸 월악산과 주흘산, 조령산과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태백 준령의 웅장한 줄기. 주흘관은 길손을 부르는 관문이라기보단 그 왕국을 지키고 선 천혜의 요새 같습니다. 이러니 성황당이 왜 없었겠습니까. 주흘관 성벽의 새재 성황당에 얽힌 전설 하나. 영의정을 지낸 최명길에 관한 전설입니다.

옛날 새재를 지나던 안동부사가 성황당에 있던 비단 저고리를 가져가 자기 딸에게 줘버렸습니다. 화가 난 처녀신은 부사의 딸을 죽이려고 새재를 내려오다 최명길을 만났습니다. 사연을 들은 최명길은 안동부사를 설득해 저고리를 돌려주고 제사를 지내 화를 면하게 했다 합니다.

옛 조령원터를 알리는 돌담. 옛날 영남대로에는 관리들의 숙소인 원이 1백 65곳이나 있었다.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옛 조령원터를 알리는 돌담. 옛날 영남대로에는 관리들의 숙소인 원이 1백 65곳이나 있었다.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또 최명길이 꿈에서 성황신을 만난 후 나라의 운명을 예견하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해를 주장했다는 전설도 내려옵니다. 아직도 향불이 끊이질 않을 정도로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합니다. 주흘관을 지난 길은 조령원터 돌담으로 이어집니다. 원(院)은 출장길의 관리가 숙박을 해결하고 갖가지 대궐 진상품과 세곡을 잠시 보관하던 곳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국립호텔쯤 될테니, 서민들은 언감생심 발길을 돌려 근처의 주막으로나 찾아들었겠지요. 해 저문 산골짜기의 주막 초가지붕 여기저기에는 지친 길손이 한 잔 술로 달랬을 애환이 하나둘 불을 밝혔을 겁니다. 어쩌다 주머니가 달랑달랑 가벼운 길손이 들러도, 주인장은 따끈한 국밥 한 그릇 말아 내밀고는 “추운데 얼어 죽지나 말고 춘삼월에 또 오기나 하시오” 하며 배웅했겠지요.

팔왕폭포를 품은 용추계곡의 물소리가 청명하게 들리는 새재 주막.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팔왕폭포를 품은 용추계곡의 물소리가 청명하게 들리는 새재 주막.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팔왕폭포니 조곡폭포니 하며 새재길의 정취를 돋우던 계곡이 갑자기 좁아지며 제2 관문 조곡관이 나타납니다. 예서부터가 옳게 험준한 고갯길이라더니, 과연 경사가 급해지는 게 가쁜 숨이 차오르는군요.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지 않고 이곳에서 왜구를 막았다면 필승했을 것이라는 말이 헛말이 아닌 듯합니다. 길이 험하면 원망(願望)도 깊어지나 봅니다. 그 길에 문경새재 아리랑비가 외롭습니다. 촌로의 민요가락은 들을 수 없고 노랫말만 홀로 서 있습니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애기 손질에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갈 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영남 제3관 조령관에서 바라본 부봉. 새재 정상은 6백 32m.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영남 제3관 조령관에서 바라본 부봉. 새재 정상은 6백 32m.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사통팔달 풍요로운 밀양 아리랑 가락은 더없이 흥겹고, 세찬 물살 건너 진도 아리랑은 애잔하기 그지없습니다. 첩첩산중 고단한 문경새재의 아리랑 가락은 분명 구슬프겠지요.   제3 관문 조령관을 못 미쳐 장원급제길도 있군요. 조선조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빌며 넘나들던 옛 길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옛날 한양으로 향하는 추풍령 길은 낙엽처럼 낙방하고, 죽령 길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워 떨어진다고들 했었다 합니다. 문경새재는 문경(聞慶)의 옛 지명 문희(聞喜)가 말해 주듯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며 멀리 호남의 선비까지 이 길을 택해 원을 빌었습니다.

급제길 끝의 책바위에 얽힌 전설 한 토막 더. 한 젊은이가 몸이 허약해져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자 문경의 도사를 찾아갔습니다. 젊은이는 도사에게서 집터를 누르고 있는 돌담을 아침마다 책바위에 옮겨 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라 답을 받았습니다. 돌담을 헐고 3년에 걸쳐 나르다 보니 몸이 튼튼해졌고 공부도 열심히 해 장원급제까지 이루게 됐다는 얘기. 그 때부터 유생들은 이곳에 들러 급제를 빌었다 합니다.

새재길을 걷는 사람들.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새재길을 걷는 사람들.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마지막 남은 고갯길을 돕니다. 수림 사이로 살짝 내민 제3 관문 조령관의 추녀 끝이 초승달처럼 창공에 매달린 듯 모습을 드러냅니다. 조령관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보세요. 고갯길 정상에서 큰 한숨 한번 내쉬어보세요. 또 한 고개 넘었네요. 깊은 산속이 그런 것처럼 옛 새재길에도 물박달나무가 울창했었나 봅니다.

늦은 봄 갈색의 꽃이 지천으로 피었다지요. 그 많던 물박달나무가 이제 단풍나무와 송림으로 바뀌었다니, 세월이 흘러도 한참을 흘러왔나 봅니다. 옛길은 지금 등산로로, 산책로로 남았습니다. 역사를 더듬어 떠나는 여행도 좋습니다. 낭만을 담은 나들이길도 좋습니다. 한 굽이 고갯길 넘으며 소원 한 구절 또 빌어볼 수 있다면요.  

Tip.
문경새재 가는 길이 편해졌다. 얼마 전 문경을 거쳐 가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됐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중부고속도로가 제일 편하다. 중부고속도로 호법 IC -> 영동고속도로 여주 IC ->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 IC -> 3번 국도 따라 북쪽으로 3km -> 문경새재 입구 (서울에서 2시간 30분 소요)

청포묵조밥 한상 차림.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청포묵조밥 한상 차림. 2005년 2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맛 집
‘새재묵조밥’ 소문 들어 보셨나요. <소문난 식당>
문경새재를 오르는 선조들이 입소문을 냈다는 대표 토속음식 새재묵조밥. 문경새재의 도토리와 녹두로 만든 묵을 채썰어, 다양한 발효 야채와 함께 비빔 그릇에 담아낸다. 통깨와 참기름, 그리고 고추장 양념 소스와 젓갈 얹어, 좁쌀 밥 한 공기 쓱 비벼 먹으면, 험한 고갯길 넘을 채비 끝. <소문난 식당>은 명맥이 끊겼던 새재골 묵조밥의 참맛을 되살린 곳으로 소문났다. 이 식당 주인 박남복 씨가 발굴, 40년 가까이 지켜와 특허를 받았을 정도. 묵이 으깨지지 않도록 젓가락으로 비비는 것도 잊지 말자.

순수 우리콩에 따뜻한 인정 담은 두부요리 <목련가든 민박>
두부요리맛과 그 인정에 반해, 드라마 ‘태조 왕건’ 촬영차 문경새재에 들른 최수종 씨가 호텔을 마다하고 묵었던 식당 겸 민박. 최수종 씨 뿐 아니라 당시 배우와 스텝 모두 이집 주인 부부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 차려내는 음식은 근처 밭에서 재배한 콩으로 식당에서 직접 만든 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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