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백두대간종주기⑩] 조령산 문경새재, 새재에는 새가 없네
[백두대간종주기⑩] 조령산 문경새재, 새재에는 새가 없네
  • 박상대 기자
  • 승인 2005.02.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희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2005년 2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이번 코스는 은치재 -> 구왕봉 -> 희양산 -> 이만봉 -> 백화산 -> 이화령 -> 조령산 -> 문경새재. 희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2005년 2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문경] 새들도 쉬어 넘는다는 조령산. 영남 사람들의 옛길에 이화령이 열리고 터널이 생겼습니다. 옛사람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한 희양산과 조령산을 다녀왔습니다.

산 아래는 동네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지요.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릅니다. 동네를 가로질러 산을 오를 때마다 산밑동네 사람들의 전설이 궁금하지만 일행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므로 그냥 스쳐지나치며 다음을 기약합니다. 경상도 문경과 충청도 괴산을 품에 안고 있는 희양산과 조령산을 오를 때도 초입에 동네가 있습니다. 희양산을 오를 때는 은치재 마을을 거쳐 구왕봉을 오르지요.

동네 초입에 거대한 남근석이 있더군요. 동네터가 음기가 너무 강해 남근석을 세워놓았답니다. 튼실한 남근석을 보며 힘차게 산을 오릅니다. 산을 오르다 뒤를 바라보니 산의 가슴팍을 파내는 채석장이 보이네요. 차라리 뒤돌아보지 말걸. 산을 오를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재미가 솔솔한데 가끔 가슴이 콱 막히는 경험을 할 때도 있지요.

조령산에는 기묘한 모습을 한 암릉들이 많다. 2005년 2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조령산에는 기묘한 모습을 한 암릉들이 많다. 2005년 2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햐, 하늘 참 맑다! 정말이지 미치게 푸른 하늘이네요.” 겨울 하늘도 이토록 파란 모습을 보일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구름 한점 없는 겨울 하늘, 그리고 희미한 바람이 불고 있는 겨울 산.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은 그 나뭇가지들이 슬픔에 겨워 울고 있다고 말하더군요.

앞뒤로 산을 오르는 동료들의 호흡이 거칠어집니다. 능선에 다다른 모양입니다. 이제는 앞선 사람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산의 높이를 대략 가늠할 수 있지요. 구왕봉(구룡봉)입니다. 신라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창건할 때 연못을 메우고 건물을 지었는데 연못에 살던 용 아홉 마리가 이 산으로 쫓겨왔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산이 깊은 걸 보니 용들이 살았을 만도 하네요. 마침내 오른쪽 골짜기 아래로 해방 후 선승들을 많이 배출했다는 저 유명한 구산선문 봉암사가 보이고, 턱 앞에 희양산이 보입니다. 희양산. 거대한 산이 하얀 치마를 두르고 있는 듯하네요. 하얀 바위가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전망 좋은 곳에 앉아 희양산과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마을 뒷산을 함께 오르던 벗들, 함께 소풍을 다녔던 친구들의 얼굴이 스쳐갑니다. 친구들과 자주 올랐던 두륜산에도 거대한 바위가 있었거든요. 왜 산에 올라 바위에 앉아 있으면 굳게 닫혀있던 기억 창고가 활짝 열리는 건지?

로프를 잡고 희양산을 오르는 산객들. 2005년 2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로프를 잡고 희양산을 오르는 산객들. 2005년 2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산은 나 혼자만의 기억 창고를 여는 게 아닙니다. 수백 수천 년 전, 아니 최근에 이 산을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이 눈앞에 펼쳐지기도 합니다. 지름티재에서 희양산을 오르는 길은 외길인데다 아주 가파르네요. 거의 수직에 가까운 바윗길에 기가 질립니다. 가슴을 졸이며,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암릉을 오르는데 로프가 매달려 있네요.

먼저 산을 오른 사람들이 남긴 고마운 흔적. 다만 성인들의 체중을 지탱하기에는 로프가 너무 가늘더군요. “괜찮겠어요?” 한 여성대원이 새끼손가락보다 가느다란 로프를 잡아당기며 묻습니다. “벌써 몇 사람이 올라갔잖아요. 끊어지진 않을 거예요.” 눈이나 비를 많이 맞고 나면 중간에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 때로는 대롱대롱 매달리고, 때로는 네발로 기어서 한참을 오르니 정상이라.

남쪽으로 속리산, 북쪽으로 주왕산, 동쪽으로 주흘산…. 산들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입니다. 덕유산에 오르던 날, 산너머 산들을 보며 가슴 뭉클한 그리움이 켜켜이 쌓여 있다고 생각했는데, 희양산에서 다시 만난 산너머 산들은 거대한 용트림을 준비하는 듯하네요.  

봄날을 연상케 하는 감미로운 햇살이라. 이토록 보드라운 겨울 햇살도 있단 말인가. 커피향을 곁들인 달콤한 휴식, 그리고 느닷없는 하품. 지친 다리에 다시 힘이 솟고, 좀더 오래 정상에 머무르고 싶네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정상에선 오래 머물지 않아야 하는 법. 따스한 햇살도 오래 머물면 비수가 되어 산 아래로 쫓아낼지 모릅니다.  

조령산 신선봉에서 본 조령산 풍광. 2005년 2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조령산 신선봉에서 본 조령산 풍광. 2005년 2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희양산과 조령산에는 옛사람들의 흔적이 유난히 많습니다. 신라 때 쌓았다는 석성과 조선시대 임진왜란 후에 쌓았다는 석성들. 성터나 성곽 주변을 걸을 때마다 저는 옛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이 많은 돌덩이를 짊어지고 다녔을 사람들. 명령에 따른 것인지, 충성심의 표출이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을지, 성곽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락한 생을 살았을지? 허물어진 성벽 위를 걸으며 생각합니다.

작은 배낭 하나에 낑낑댈 수는 없네요. 조령산을 걷습니다. 문경 새재가 있는 산. 새들도 쉬어 넘는다는 산, 억새가 많다는 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산. 영남지방의 젊은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넘어다녔다는 조령산. 그리고 조령산에 있는 새재. 영남에서 한양까지 추풍령은 보름 길, 죽령은 열엿세 길인 반면, 새재는 열나흘 길로 가장 빠른 길이었답니다.

산행 중에 마주할 수 있는 고드름. 2005년 2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산행 중에 마주할 수 있는 고드름. 2005년 2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특히 과거시험 보러 가는 선비들은 유독 새재만 고집했는데, 추풍령은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랍니다. 조령산은 백두대간에서 손꼽히는 풍광을 지닌 산이며, 험하기로도 이름난 산이지요. 과연 새들도 한걸음에 넘어가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유감스럽게도 새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지만.

거대한 바위 봉우리 신선봉. 신선이 놀았을 법한 아름다운 화강암 봉우리. 바위틈새에 뿌리를 내린 채 수십 년 풍파를 견뎌온 예쁜 소나무들. 그리고 아스라이 펼쳐진 계곡과 능선들. 이렇게 길고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니. 매끈하고 반질반질한 너른 바위에 산객들은 신선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과일을 먹으며 그윽한 행복감에 젖는군요.

산행중에 쓰레기를 줍고 다니는 대원들. 카메라를 들이대자 황급히 자리를 피하고 있다. 2005년 2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산행중에 쓰레기를 줍고 다니는 대원들. 카메라를 들이대자 황급히 자리를 피하고 있다. 2005년 2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아, 감사합니다.” 이렇게 맑은 날, 좋은 사람들과 산에 오를 수 있으니, 그럴 수 있도록 건강과 시간을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하는 거겠지요. 임진왜란 후에 쌓았다는 석성터를 따라 제3관문 조령관이 있는 동쪽으로 발길을 재촉하자 언제나 그렇듯 다시 눈앞에는 거대한 봉우리가 버티고 섰네요.

다시 한번 '산행은 인생이다!'를 입안에 굴립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여정,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인생 역정. 영남의 선비들도 조령산을 넘나들며 그런 생각을 했겠지요. 때로는 낙방하고, 때로는 합격하고, 승진과 좌천을 반복하며,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귀양을 가기도 하고. 그 모든 통로가 조령산 문경 새재에 있었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