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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국토 종단 탐험] 한국소년탐험대의 18박 19일 국토 종단기
[국토 종단 탐험] 한국소년탐험대의 18박 19일 국토 종단기
  • 김진용 기자
  • 승인 2005.03.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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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마라도에서 임진각까지 575km, 한국소년탐험대는 말없이 걸었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마라도에서 임진각까지 575km, 한국소년탐험대는 말없이 걸었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여행스케치=파주] 열흘 하고도 이틀을 꼬박 걸어온 아이들이다. 오늘이 몇 일인지 따위는 잊은 지 오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그들을 만났다. 웬걸! “1월 13일이요.” 추위와 배고픔으로 흐릿해진 의식이, 날짜만은 정확하고 또렷하게 부여잡고 있는 게 아닌가.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7일만 지나면’ 집에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힘겨움은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겨움의 깊이만큼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다.

<1월 13일~14일>
허옇게 부르튼 얼굴. 벌에 쏘인 것처럼 퉁퉁 부은 손. 동상과 물집으로 엉망이 된 발. 땅거미지는 도로 위 저 멀리 아이들 한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마라도에서 임진각까지 걸어서 국토를 종단하고 있던 한국소년탐험대 아이들 66명. 그들을 12일째에 만났다.

체감 기온은 영하 10도. 체온이 떨어질까 봐 늦은 밤까지 걸었다. 중학교 1학년 재은이의 배낭은 자기 덩치보다 더 크다. 배낭 아래 묶인 침낭이 종아리를 툭툭 친다. 땀으로 가득찬 신발은 밤이 되면 얼어버린다.

행군을 하다 보면 세끼를 다 챙겨 먹지 못할 수 있다. 건빵으로 끼니를 대신한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행군을 하다 보면 세끼를 다 챙겨 먹지 못할 수 있다. 건빵으로 끼니를 대신한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날을 세운 추위보다 더 힘든 건 배고픔이다. 밤 9시. 휴식 시간. 정읍을 지난 전라도 어디쯤. 행군 속도가 더뎌져서 오래 쉬지는 못할 것 같다. 냉기가 쉴 새 없이 올라오는 시멘트 바닥. 풀어 놓은 배낭은 그대로 베개가 돼 버린다. 여기저기서 콜록콜록 소리가 들려온다. 국토 종단 경험이 있는 중학교 2학년 현승이와 4명의 탐험대장은 아이들을 깨우고 다녔다.

‘추위를 이기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자못 비장한 이 어투. 하지만 졸음 앞에 하나둘씩 무너져내리는 아이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제방은 터져도 벌써 터져 있었다. 눈 깜짝할 새 출발 시간이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더 늦기 전에 고갯마루에 올라야 저녁식사를 할 수 있지만 좀처럼 대오가 갖춰지질 않는다.

엄마의 성화에 떠밀려, MP3 플레이어를 사준다길래 시작한 18박 19일의 한국소년탐험대 국토종단 길. 지금은 울고불고 악을 쓰고 있다. 길바닥에 주저앉기도 한다. 아예 뛰어야 할 때도 많다. 하지만 5백 75km 완주가 아니고서는 벗어날 길이 없다.

휴식 시간, 모두들 쓰러져 잠이 든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휴식 시간, 모두들 쓰러져 잠이 든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빛날이는 결국 걸음을 멈춰 서버렸다. 허리를 숙여 가쁜 숨을 몰아쉰다. 빛날이와 연지의 짐은 두 개씩이다. 친구의 배낭까지 대신 매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견디다 못해 무단 이탈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빛날이는 그래도 끝까지 주저앉지는 않았다. 허리를 굳힌 채 한참 동안 배낭을 지탱하며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일행은 저만치 어둠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성악가가 꿈이라는 6살 선우. 선우는 2년 6개월 전부터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병이 재발한다면 골수 이식이 유일한 희망이다. 한국소년탐험대의 이번 국토 종단에는 선우의 치료비를 마련한다는 소중한 뜻도 담겨 있다. 선우의 힘겨움을 알리고 이따금씩 거리 모금도 벌인다. 걷는 것 자체가 고통인 아이 선우의 심정이 어떨지 아이들은 이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고통을 나누고자 하는 값진 발걸음들.

마침 생수 운반 트럭을 만나 생수 한통을 얻어 물을 마실 수 있었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마침 생수 운반 트럭을 만나 생수 한통을 얻어 물을 마실 수 있었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저녁 식사 시간. 1식 1찬이 원칙이다. 예외는 없다. 오늘은 시래깃국이 유일한 반찬이다. 식판은 2명에 1개씩 지급된다. 모자란 밥이나마 나눠 먹는 법을 익혀야 한다. 너무 많이 먹어도 좋을 게 없다. 행군하는 데 지장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배고픔을 견디고 있다. 강원규 총대장은 가끔 식사 시간을 늦추거나 일정을 변경하기도 한다. 때로는 임진각에 하루 이틀 늦게 도착할 것 같다고 거짓말도 한다. 아이들은 그럴 때마다 또 다시 자신과 싸운다. 세상 일이 뜻한 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영하 10도에도 아이들은 눈만 감으면 잠이 들었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영하 10도에도 아이들은 눈만 감으면 잠이 들었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서로의 발을 주물러 주고 있는 아이들. 잠들기 직전엔 반드시 발을 주물러 체온을 올려줘야 한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서로의 발을 주물러 주고 있는 아이들. 잠들기 직전엔 반드시 발을 주물러 체온을 올려줘야 한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오늘밤은 노숙은 면하게 됐다. 마음씨 좋은 식당 여주인이 숙소로 식당을 통째로 내준 것이다. 한국소년탐험대는 지금껏 이른바 ‘비박’에 익숙해져 있었다. 학교 운동장 같은 곳에서 보온용 매트리스를 깔고 비닐로 침낭을 감싸고 자는 것이다. 다닥다닥 붙어서 오직 서로의 체온만으로 추위를 이기는 전문 산악인들의 노숙 방식이다. 식당 방이라고 해도 냉기가 올라오긴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어 배낭을 정리하고 비닐을 깔고 침낭을 펴느라 분주하다. 얼음물에 손발을 씻는다. 추울수록 깨끗이 씻어야 동상에 안 걸리기 때문이다. 동상 걸린 발을 주무르고 아프다 소리 한번 없이 물집을 짜낸다. 어느새 그런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가벼운 병은 아이들 스스로 이겨내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이 스스로의 치유 잠재력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도로에 쌓인 눈은 걸음을 더욱 힘들게 했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도로에 쌓인 눈은 걸음을 더욱 힘들게 했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병이 심해지면, 탐험대가 준비해간 비상 약품을 사용하거나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곤 했다. 치료가 끝나면 아이들은 되돌아 왔다. 정말로 그만두려면 그만둘 수도 있는 탐험길. 그 점이 아이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다치고 멍들었지만, 중간에 포기해 버린다면 입게 될 상처는 그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적은 어제까지의 자신이었다.

눈만 내놓은 아이들이 이내 잠에 빠져 들었다. 아무리 작은 발걸음이라도 한발한발 힘들게 내딛지 않는 한 목적지는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하루하루 알지 못하는 사이 내 안의 나를 비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백지 위에 임진각에서 펼쳐 볼 일기를 써내려 가고 있었다.

야간 행군. 일부러 랜턴을 켜지 ㅇ낳는다. 야간에 사물을 식별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야간 행군. 일부러 랜턴을 켜지 ㅇ낳는다. 야간에 사물을 식별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1월 20일 임진각 도착>
탐험대가 임진각에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에 환영카드를 만들던 가족들의 손놀림이 다급해진다. 믿겨지지 않는 눈치다. 내 아이가 5백 75km를 걸어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눈시울이 붉어진 엄마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대견한 우리 아이를 어떻게 맞아야 할까.

예정시간을 1시간 반 넘긴 3시 반. 탐험대는 조용히 돌아왔다. 초등학교 6학년 한별이가 제일 먼저다. 중학교 1학년 인규가 그 다음, 가장 울음이 많았던 초등학생 재영이와 원영이 형제가 그 뒤를 따른다. 뒤따라 은주, 재은이……. 가장 나이가 많은, 그래서 항상 말없이 후미를 지켜온 고등학생 재식이와 정규를 끝으로 66명 모두가 두 발로 걸어서 돌아왔다. 고통을 함께 나눈 소중한 친구들이다.

대장정의 끝. 66명의 아이들과 가족들. 대장들의 함성이 임진각을 쩌렁쩌렁 울린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대장정의 끝. 66명의 아이들과 가족들. 대장들의 함성이 임진각을 쩌렁쩌렁 울린다. 2005년 3월. 사진 / 김진용 기자

해단식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엄마와 아빠는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장하다 내 새끼” 자꾸자꾸 그렇게만 되뇌이다 그나마도 말을 잇지 못한다. 아이들의 표정은 훌쩍 자라 있었다. 혜리가 “가출도 안 겁나요” 하며 농담을 시작한다. 은주는 종단을 끝냈으니 이제는 횡단이란다.

민주는 돈가스랑 햄버거가 너무 먹고 싶은데, 대장님이 24시간 동안 기름기 많은 음식을 먹지 마라고 하셨다며 투덜대고 있다. 국토 종단에 나서는 아이의 뒷모습 앞에서 아빠와 엄마가 겪었을 수천 수만 번의 망설임과 그보다 더 많았을 후회와 미안함. 인터넷으로 전해 듣는 탐험대의 소식 한 줄에 아빠와 엄마는 뿌듯해하고 또 휘청거렸다.

4명의 탐험대장들은 때론 엄격하게, 때론 자상하게 끝까지 배움의 길을 지켜줬다. 아이들은 울음 반 웃음 반으로 그들에게 답했다. “지금 백두산까지 가라고 해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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