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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백두대간 종주기⑫] 황장산에서 도솔봉까지, 겨울산에서 봄을 생각하다
[백두대간 종주기⑫] 황장산에서 도솔봉까지, 겨울산에서 봄을 생각하다
  • 박상대 기자
  • 승인 2005.04.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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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황상산.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황장산. 이번 코스 : 부리기재 -> 대미산 -> 차갓재 -> 황장산 -> 벌재 -> 문복대 -> 저수령 -> 묘적봉 -> 도솔봉 -> 죽령.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충북] 벌써 1년이 되었네요. 백두대간을 시작한 지 1년. 사람들은 아직도 다 타지 못했느냐고 묻습니다. 아직도 많이 남았습니다. 산에 꽃이 피었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3월 초순에도 눈이 쌓였더군요.

경상도 문경, 부리기재를 오르는 발걸음이 가볍네요. 이름처럼 예쁜 대미산을 오르며 뒤를 힐끔거리자 포암산이 보입니다. 산을 타는 계절은 아직 한겨울입니다. 설도 지나고 입춘을 넘겼기에 산아래 사람들은 봄을 기다리는 눈치더군요.

도솔봉 가는 길에 눈이 덮여 있다.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도솔봉 가는 길에 눈이 덮여 있다.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산을 오르며 혹시나 봄소식을 접할 수 있을까 촉각을 곤두 세웠지만 어림없는 일이네요. 봄은 아직 코빼기도 내밀지 않네요. 군데군데 아직 덜 녹은 눈이 쌓여 있고, 먼 산골짜기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네요. 다만 청량한 날씨 덕분에 두꺼운 점퍼를 벗어 배낭에 묶는 것으로 한겨울의 짐을 덜어냈습니다.

점퍼를 벗고 셔츠만 입고 산을 오를 수 있으니 봄이라고 해야겠지요. 산바람이 많이 부드러워졌네요.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말려주는 바람의 촉감이 간지럽군요. 하늘도 파란 기운을 내뿜고 있군요. 킁킁 소나무 잎을 잡아당겨 냄새를 맡아도 아직 봄 향기는 나지 않습니다.

봄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겨울산.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봄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겨울산.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땅에서도 아직 봄소식을 접하기는 곤란하네요. 백두대간 깊은 산중에서 봄소식을 찾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요? 그래요. 너무 성급했네요. 도시 사람들은 모든 것이 빨리 변하기를 기대하지요. 봄도 여름도 가을도 빨리 오기를 기다립니다. 자연은 때가 되면 저절로 바뀌는 것을. 산을 오르면서 성급하게 재촉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대미산(大美山)을 넘어 퉁퉁거리며 산길을 내려가는데 길가에 나무판자로 된 표지판이 하나 서 있네요. 백두대간 중간지점. 경기도 평택 여산회 사람들이 세운 중간지점 푯말이네요. 백두대간 734.65km에서 가운데 지점, 지리산 천왕봉과 강원도 진부령까지 367.325km.

그동안 중간지점이 어디쯤인지 궁금했는데…. 먼저 지나쳐간 산객들이 표지판을 세워 두었군요. 이제 겨우 절반을 탄 것은 물론 아닙니다. 강원도 구간을 거의 다 타고 넘었으니 중간 지점이 취재 일정의 절반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표지판은 산객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엔 충분했지요.

겨울산에서 이정표가 되어주는 리본.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겨울산에서 이정표가 되어주는 리본.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대미산을 넘어 차갓재로 내려가니 생달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네요. 작은 개울이 흐르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지요. 그 생달리에 고을에서 술맛 좋기로 소문난 전통주류 판매점이 있군요. 공장까지는 볼 수 없지만 대미산과 황장산 골짜기에서 나는 물맛이 좋아서 술맛도 좋답니다. 복분자, 산수유, 머루 등등 산에서 채취한 열매들로 만든 술을 한 잔씩 맛보았습니다. 술맛이 입에 착 감긴다며 홀짝홀짝 마셔댔더니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취기가 가시지 않더이다.

차갓재를 거쳐 황장산을 오릅니다. 참 오르기 힘든 산이네요. 바위 능선이 길다랗게 이어지고, 여러 군데 밧줄을 잡고 낑낑대며 올랐는데 정상 표지석이 가슴을 때립니다. 黃腸山.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슨 ‘장’자나요?” “창자가 노래지는 산? 기가 막히네요.”

도솔봉 오르는 산길에서 여성 대원들.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도솔봉 오르는 산길에서 대원들 한 컷.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모든 산에는 저마다 이름이 있고, 선지자들이 그런 저런 합당한 이유를 들어 이름을 지었을 텐데. 정상에 오른 길이 너무나 험해서 멋대로 해석하며 깔깔 웃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문헌을 확인해보니 황장목이라는, 속이 노랑색을 띠는 단단한 나무가 많이 서식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조선시대에는 고관들의 관을 만드는 목재로 쓰였다는데 지금은 그런 나무들이 보이지 않는군요.

벌재에서 문복대(門福臺)를 오르는 길도 가파랐습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문복대에 오르니 문경 땅이 발아래 펼쳐져 있네요. 오른쪽으로 펼쳐진 고을이 문경과 예천, 막걸리가 맛있다고 소문난 고장입니다. 막걸리 생각을 하며 내려선 곳이 소백산 아래 관광목장이 있는 저수령(低首嶺).

문복대 표지석.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문복대 표지석.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하늘빛이 흐리군요. 초목도, 하늘도 아직 제 색깔을 내지 못하는군요. 그러나 바람은 그다지 거칠지 않군요. 저수령은 이제 해토머리에 이르렀습니다. 얼었던 땅이 녹고, 낙엽들이 땅에 납작 엎드려 있네요. 아닙니다. 낙엽들은 이제 낭만 가득한 이름 대신 퇴적물이 되어버렸네요.

새로운 기운을 위해 몸을 삭히는 거겠지요. 땅에서 흙 냄새가 납니다. 곧 봄이 열리겠지요. 봄은 새생명을 데리고 사람들 곁으로 다가올 겁니다. (참, 저수령 휴게소 앞마당에서 솔터산악회 두 공비님들이 김치찌개를 끓여 주어서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죽령으로 가는 도로에 눈이 쌓여 있네요. 자동차가 고갯길을 오를 때 옆사람이 말합니다. “아따 발바닥이 간질간질하네요.”

죽령에서 저수령으로 역주행하기로 했는데 눈이 내렸네요. 일주일 전에 봄기운을 느꼈는데 폭설이 내린 겁니다. 지난주, 어쩌면 이번 주에는 양지바른 바위 밑에 양지꽃이 피어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연은 아직 몸을 풀지도 않았는데 성급한 산객은 봄꽃을 기대하다니, 피식 웃음이 나네요.

백두대간 중간지점에 선 대원들.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백두대간 중간지점에 선 대원들.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산객뿐인가요. 성미 급한 도시 사람들은 진달래 꽃망울이 여물었느니, 동백꽃과 개나리가 피었네 하며 봄이 다가왔음을 알렸습니다. 아, 꽃망울 몇 개 여물었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겠지요. 봄은 아직 우리가 오르는 산 너머 남쪽에나 머물고 있는 모양입니다.

모처럼 월동장비(아이젠, 스팻치 등)를 착용하고 눈 내리는 산을 오릅니다. 춥지만 콧노래가 절로 납니다. 얼마나 기다리던 눈 덮인 산행인가. 눈이 바람에 날립니다. 제법이네요. 눈보라가 몰아치는 쪽 귓불이 시리더니 얼굴에도 한기가 느껴집니다. 신문에 ‘한국 경제에 봄기운이 돈다’는 기사들이 눈에 띄더군요. 그렇겠지요.

봄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전히 체감온도가 영하를 기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겨울산을 오르는 산객들처럼요.    

나뭇가지에 하얀 눈이 수북히 쌓여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두 시간 이상 산을 오르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군요. 수북히 쌓인 눈만 봐도 뿌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런 거겠죠. 사과 한 개를 먹었을 뿐인데 허기가 느껴지지 않고 기분이 좋습니다.

도솔봉에서 내려다본 겨울산.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도솔봉에서 내려다본 겨울산. 2005년 4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도솔산에 이어 묘적봉을 오를 때는 겨울산의 진수를 만끽했습니다. 세상이 모두 하얗게 엎드려 있네요. 융단을 덮어놓은 듯한 눈 숲 속으로 뛰어들고 싶네요. 모처럼 감격의 눈물이 났습니다. 하얀 눈! 모든 색깔과 기운을 잠재워버린 하얀 기운이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색깔이 흰색이라는 생각을 하며 하얀 산에 흠뻑 취합니다. 하얀 나뭇가지 사이로 눈부시게 파란 하늘만 아니라면 세상은 온통 하나입니다. 어린애처럼 눈 덮인 산에서 몇 날 며칠을 살고 싶었습니다. 파릇파릇한 봄이 며칠 늦게 오면 어떻습니까. 겨울에도 산객은 살아서 산을 즐기면 되는 거지요. 그것이 자연이 시킨 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참된 삶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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