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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백제, 어둠에서 빛으로②] '우리얼' 동호회의 부여, 익산 백제 석탑 답사기
[백제, 어둠에서 빛으로②] '우리얼' 동호회의 부여, 익산 백제 석탑 답사기
  • 김진용 기자
  • 승인 2005.06.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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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정림사터 풍경. 2005년 6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정림사터 풍경. 2005년 6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여행스케치=부여] 백제탑의 아름다움과 역사를 찾는 문화유산답사회를 따라 나섰다. 사비 백제의 마지막을 품고 있다는 부여로 향하는 길. 부담스럽다. ‘탑 양식의 역사’ 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거기다 ‘백제의 마지막’이라니! 그저 정성껏 목도질해 쌓았을 돌탑에 자그만 소원 하나 더 얹고 싶었을 뿐인데.

홀로 버텨온 꿈, 정림사탑
39 걸음. 정림사터 5층 석탑을 한바퀴 꼭꼭 눌러 돌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탑 지붕돌 아래에 낀 이끼가 짙다. 1천 5백년 동안 이 탑을 돈 이들은 얼마나 될까. 살짝 올라간 지붕돌 처마 끝에 햇살이 눈부시다. 화강암 돌탑을 만져 보니 참 따뜻하다.

떠난 님이 보고 싶을 때도, 누이가 아파 누었을 때도, 나라가 망해갈 때도 백제 사람들은 여기서 39 걸음을 돌고 또 돌았을 게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 백제가 오늘날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천도하면서 창건돼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했다.

지금은 오직 정림사터 탑만이 부여 시대의 찬란한 문화의 상징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림사터 5층 석탑은 149매의 돌조각으로 ‘쌓았다’. 따로 접착제를 사용한게 아니다. 그저 돌과 돌을 연결하고 끼워 맞춰 8m 남짓을 올린 것이다. 그렇게 1천 5백년의 비바람을 버텨왔다.

현대에 와서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탑을 해체했다가 다시 쌓았지만, 조금씩 잘못 쌓인 탑이 많고 심지어 붕괴 위험이 있는 것도 있다 한다. ‘어떤 기술’로가 아니라 ‘어떤 정성’으로 쌓았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은 백제 양식’이라는 류의 표현은 말장난이라 믿었다. 하지만 정림사탑 앞에서 생각을 고쳐 먹었다. 보면 볼수록 상반된 느낌이 뒤섞인 탑이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금방 날아갈 듯 경쾌한데, 또 한발 떨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지상에 착 붙들려 있는 굳건함과 안정감이 묘하다. 이 탑이 백제 예술의 백미라 불린다면, 이 묘한 느낌을 백제의 감성이라 여겨도 무방할까.

살짝 멋부린 갓 차림의 시골 선비 같다. 돌조각을 모아 쌓았고, 기단을 좁고 얕은 단층으로 했고, 모서리 기둥의 가운데를 약간 불룩하게 했고, 지붕돌을 얇고 넓게 만들었다는 점 등은 목탑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 때문에 정림사터 석탑은 익산 미륵사터 석탑과 함께 우리 석탑의 시원으로 인정받는 탑이다. 양식으로 보면 아직 목탑인데, 재료로 보면 석탑이다.

정림사탑과 미륵사탑이 품은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살피는 것, 그리고 그 특징이 이후의 석탑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는 게 문화유산 답사회 ‘우리얼’의 이번 답사 목적이다.

정림사탑의 예술미는 신라와 고려의 석탑에도 살아남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만 그 규모에서, 목탑의 거대한 규모를 모방한 초기의 석탑은 이후 차츰 작아진 것으로 보인다. 이유야 많겠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수요’가 많아졌기 때문 아닐까.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것도 아니니 거대한 탑을 계속해서 만들어 낼 수도 없었다. 사찰이 늘어나고 사찰과 탑을 찾는 사람도 늘어나니 이곳저곳 소규모 석탑을 많이 세웠으리라. 탑 건축 양식 역시 국가적 차원의 고정된 양식에서 자발적이고 다양한 양식으로 변해 갔을 것이다.

탑이 좀더 친근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탑도 결국 무덤이다.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무덤이다. 그 때문에 불상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가장 중요한 예배 대상이기도 했다. 귀하고 소중한 것을 놓고 돌을 쌓아 소원을 비는 버릇은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다.

국가가 탑을 쌓다가, 차츰 석공이 탑을 쌓다가, 아예 일반인이 탑을 쌓기 시작했다. 참배객이 사찰 숲길에 오롯이 쌓아 놓은 그 무수한 돌탑과 국보 제9호 정림사탑이 다를 게 뭐가 있을까. 백제는 사라져도, 탑과 양식은 살아 남았고, 백제의 꿈은 민초의 꿈이니 애초부터 변할 게 없다.

익산 미륵사지 풍경. 2005년 6월. 사진 / 구동관 객원기자
익산 미륵사지 풍경. 2005년 6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다시 빛나라, 미륵사탑
익산의 미륵사터로 향한다. 정림사터 5층 석탑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미륵사터 석탑을 찾는 길이다. 미륵사터는 절터 맞나 싶을 정도로 넓다. 신라 황룡사터와 더불어 가장 큰 절터라 한다. 강력한 왕권을 지녔던 찬란한 고대 문명을 보여주는 듯하다.

국력을 확장하던 사비 백제 시대 이곳에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과 공예를 비롯한 문화적 역량이 총동원됐다. 또 신라 진평왕이 많은 기술자를 보내 도와주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해체 보수 공사 중인 미륵사탑. 무시무시한 수술대에 올려진 깁스 환자 같다. 2005년 6월. 사진 / 김진용 기자
해체 보수 공사 중인 미륵사탑. 무시무시한 수술대에 올려진 깁스 환자 같다. 2005년 6월. 사진 / 김진용 기자

그런 절터가 지금은 횡하니 쓸쓸하기만 하다. 국보 제11호. 높이 14m.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석탑. 그나마 남아있는 미륵사터 석탑을 찾아왔건만 이 탑 역시 같은 운명에 놓여 있다. 지난 99년 해체보수 공사를 시작해 그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다.

탑의 동쪽 면을 제외하고는 시멘트로 보수돼 있어 문화적 가치를 훼손하고 있고, 붕괴 위험이 있다는 게 문화재 당국의 설명이다. 오는 2007년까지 석탑을 보수·복원하기 위해 세운 가건물 안에 미륵사탑은 기단만 남은 채 놓여 있다.  

탑 답사가 끝난 ‘우리얼’ 회원 가운데 일부가 달밤에 부여의 부소산성을 찾았다. 사라져 버린 백제 꿈이 서려 있는 곳이다. 부여는 백제가 공주에서 천도한 5백 38년부터 나당 연합군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전까지 6대 1백 23년 동안 백제의 왕도였다. 부소산성은 당시 왕성의 방위시설로 쓰인 외성이자 후원의 역할을 한 곳이다.  

지금도 가끔씩 땅을 파면 발견된다는 유적을 차치하고서도, 소나무와 갈참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산책하는 기쁨이 각별한 곳이다.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長 塔塔雁行)’. 사찰들이 별무리처럼 반짝이고, 탑들이 기러기 행렬처럼 줄지어 서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구절이다.

백마강에 드리운 낙화암 진달래. 2005년 6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백마강에 드리운 낙화암 진달래. 2005년 6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신라 시대 경주 남산 옛 사찰의 영화를 빗댄 말로 사용되지만, 금강에서 백마강을 거슬러 이곳 왕궁의 구드래 나루에 이르는 풍경이 그에 못지않았다 한다. 백제가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던 성왕에서부터 무왕과 의자왕 시절 백마강 가는 줄지어 선 사찰에서 피어오르는 불빛과 밥 짓는 연기로 뒤덮혔다고 한다.

일본에서 불경과 불상을 구하러 백제를 찾곤 했을 일본의 사신이 그 풍경을 보고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부소산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역시 낙화암이다. 부소산 북쪽 백마강 가에 우뚝 솟은 바위절벽이다.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함락되면서 백제 여인들이 치욕스런 삶 대신 자결을 택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 전설로 낙화라는 꽃같은 이름을 얻었다. 의자왕이 거느린 궁녀가 과연 3천 명이나 됐는지, 정말 그들이 자결을 택했는지, 또 의자왕이 과연 3천의 궁녀를 거느릴 정도로 방탕했고 또 방탕하기만 했는지, 그리고 국왕 개인의 방탕함이 나라를 망하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을 지 말들이 많다.

분분한 해석에도 대답이 없는 낙화암은 진달래로 붉게 물들어 있다. <삼국유사>는 사비성이 불타면서 백마강 주변에 열흘 동안 연기가 사라질 줄 몰랐다고 전한다. 나라가 망하면서 이 아름다운 낙화암에서 스러져간 꽃다운 목숨이 어찌 3천뿐이며 또 어찌 궁녀뿐이었으랴.

그들의 소망이, 수없이 돌탑을 쌓고 거대한 석탑을 지어올린 그 수많은 소망과 다를 것이 무엇이랴. 달이 환하게 밝은 밤 부소산성을 거닐던 우리얼 대구경북 지역 회원들. 김환대 씨에게서 가수 허민의 ‘백마강’이 꿈처럼 흘러나온다.

“백마강 고요한 달밤아/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꿈이 그립구나/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불러보자 삼천궁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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