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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지구촌기행] 당신의 숨결을 느끼는 곳, 용정
[지구촌기행] 당신의 숨결을 느끼는 곳, 용정
  • 김은주 객원기자
  • 승인 2005.07.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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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는 땅으로의 여행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용정시를 알리는 표지판.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용정시를 알리는 표지판.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중국] ‘선구자’의 영혼이 서린 땅 용정.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 문화와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유성처럼 사라진 이들. 용두레 우물가 산비탈의 일송정은 그들의 숨결을 간직한 듯 여전히 푸르다.

사람들은 끝도 없이 떠들고, 버스 창 밖으로는 해란강이 소리도 없이 흘러간다. 천년을 두고 흐른다던 바로 그 한 줄기 해란강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해란강은 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좀 넓은 개울’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형편이었지만, 지금껏 나 혼자 상상했던 해란강의 모습과 다르다 해서 실망할 일은 아니겠지. 들판을 가로질러 유장하게 흐르는 그 오랜 세월만 마음에 담기로 했다.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 먹구 살구
산골 사람
감자 구워 먹구 살구
별나라 사람
무얼 먹구 사나      

 - 윤동주, ‘무얼 먹구 사나’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언니가 윤동주의 시집을 선물했다. ‘시인’이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오래도록 언어를 벼린 다음에야 겨우 쏟아져 나오는 것이 ‘시’란 것을 그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에서 별 감흥을 얻지 못하고는 그저 앵무새처럼 외우기만 하면 되는 건가보다 생각했던 나에게 윤동주가 쓴 시들은 참으로 놀라웠다.

‘무얼 먹구 사나’는 윤석중의 동시에 한창 빠져 있던 시절에 쓴 것이었는데, 널리 알려진 ‘십자가’나 ‘서시’ 같은 것들보다 나는 오히려 그이가 쓴 많지 않은 동시들에 더 애정을 가지게 된다.

윤동주 시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 간 청년 윤동주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윤동주 시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 간 청년 윤동주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서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는 구절이나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이라는 구절에서나 혹은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같은 구절 앞에서 어린 내 영혼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길고 긴 설명이 없어도 단 한 줄로 명징하게 전달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던 시절, 내 곁에는 윤동주가 있었다. 그러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랑했던 윤동주의 푸른 청년 시절이 녹아 있는 용정에 가는 내 마음은 달뜰 수밖에 없었다.

연변에서는 '꼬치'라는 말 대신 '뀀'이라는 말을 쓴다. 꼬치를 파는 음식점 간판이 재미있다.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연변에서는 '꼬치'라는 말 대신 '뀀'이라는 말을 쓴다. 꼬치를 파는 음식점 간판이 재미있다.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용정 입구에 내려 구강병원(치과), 미용병원(미장원), 기름방 같은 간판을 지난다. 심청이발옥, 머리설계실, 뚱보네뀀집(꼬치구이집) 같은 낯선 간판들을 지나 연변대 농학원에 잠깐 들러 볼 일부터 본 뒤에 점심 때쯤 용정 시내로 향했다.

용정은 윤동주의 마음밭을 풍성하게 가꾸어 준 곳이기도 하고, 문익환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길러 낸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용정중학교지만, 예전, 윤동주와 문익환이 그 학교를 다닐 때는 은진중학교라 했던 곳부터 들렀다.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때였으나 선교사들이 운영했더 터라 간섭이 그나마 적었던 곳이었고, 문익환의 증언대로 일본말로 쓰여진 교과서로 공부하면서도 선생님이 일본말이 아닌 한글로 가르치는 학교였기 때문에 특별히 혜택받은 학생들의 학교였다.

윤동주와 문익환, 송몽규 같은 식민지 청년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숨통이 되어 주었던 곳이다. 용정중학교 한켠에는 1994년에 남의 금성출판사가 돈을 들여 새로 지었다는 윤동주 기념관이 서 있다.

용정중학교에 있는 윤동주 기념관. 윤동주의 시비 앞에는 누가 바쳤는지 모르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용정중학교에 있는 윤동주 기념관. 윤동주의 시비 앞에는 누가 바쳤는지 모르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용정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과 김은식, 이일평, 이정구, 강인복 같은 이들의 사진 자료가 죽 늘어서 있다. 기념관 한 쪽에 보일 듯 말 듯 자리잡고 있는 ‘윤동주문학사상연구회 별’이라는 간판이 이색적이었다.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본다던 윤동주는, 패, 경, 옥 따위 이름을 가진 중국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던 시절과 어머니를 못 견디게 그리워하던 그 윤동주는, 누가 그렸는지 모를 초상화로 남아 자신을 보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윤동주 평전>과 <문익환 평전>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면서 그이들의 푸른 시절을 상상해 보았다. 젊은 날 죽어 버린 까닭에 윤동주는 모두의 가슴에 여전히 청년으로 남아 있고, 윤동주와 동년배인데도 문익환은 분단 현실을 뛰어넘었던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은진중학교에서 함께 생활하던 시절의 천진한 기록들을 읽노라면 먼저 가 버린 윤동주에 대한 아쉬움이 커져서 절로 한숨이 나온다.

'서시'의 한 구절이 적혀 있는 윤동주 초상화.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서시'의 한 구절이 적혀 있는 윤동주 초상화.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무렵, 윤동주는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내느라 등사 글씨를 쓰기도 했으며, 기성복을 맵시 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거나 손수 재봉틀질을 해서 나팔바지를 만들어 입기도 했다.

학교 축구부원들 유니폼에 번호를 달 때도 윤동주가 집으로 들고 가 재봉틀로 박아 오기도 했다고 한다. 문익환이 쓰던 모자를 탐내 결국은 문익환이 모자를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외모에도 관심이 많은 소년이었던가 보다.

윤동주가 교지를 만들던 시절, 문익환에게 시를 한 편 써 오라고 했다는데 윤동주가 그 시를 읽어 보고는 이것도 시냐고 핀잔을 준 덕분에 일찌감치 문학도의 꿈을 접고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노라 웃으며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교회당 옆의 윤동주의 집에서 새벽송 준비를 하고 밤새워 꽃송이를 만들었노라고, 옷을 두툼하게 껴입고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개가죽 버선을 신고 새벽 눈길을 걸으면 하느님 나라가 따로 없었노라고 회상하기도 하셨지.

연길 시내에서 만난 당나귀 수레. 딸기를 팔고 있던 아저씨는 내가 사진을 찍자 사지 않으면 사진도 찍지 못한다고 했다. 할 수 없이 10원어치 샀다.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연길 시내에서 만난 당나귀 수레. 딸기를 팔고 있던 아저씨는 내가 사진을 찍자 사지 않으면 사진도 찍지 못한다고 했다. 할 수 없이 10원어치 샀다.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당신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에서 윤동주가 자필로 쓴 ‘서시’며, ‘자화상’,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따위를 쓰다듬어 보는 데 괜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기념관이 아무리 초라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기념관을 떠돌고 있는 시인의 향기는 진하고도 그윽했다.

학교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축구공을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마른 모래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모자를 삐뚜루 쓴 윤동주도 거기 어디메쯤에서 손수 박음질한 번호표를 달고 뛰었으려니 생각하니 비죽 웃음도 나온다.

용두레 우물. 1879년부터 1880년 사이에 조선에서 건너온 장인석, 박인언이 발견한 우물이다. '용정'이란 이름도 이 우물 덕분에 생겼다.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용두레 우물. 1879년부터 1880년 사이에 조선에서 건너온 장인석, 박인언이 발견한 우물이다. '용정'이란 이름도 이 우물 덕분에 생겼다. 2005년 7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용정중학교를 나와 용두레 우물까지 걸었다. 지금은 용두레 우물 자체보다 용정과 거제시가 결연을 맺었다는 비석이 우물터에서 훨씬 압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긴 과거에 그 우물가에 깃들어 살던 사람들보다는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가 더 중요하달 수도 있겠다.

우물가에서 산비탈 저만치에 서 있는 일송정을 보노라니 ‘선구자’ 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문익환은 나이 들어 용정을 다시 찾은 뒤에도 노래 가사가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는 ‘선구자’보다는 ‘마른잎 다시 살아나’를 부르겠노라 고집 세웠다 하시지만, 뭐 어떠랴, 멀리 일송정의 소나무 한 그루 홀로 푸르다면 그것으로 족한 일 아니겠는가.

연변 시내까지 가는 15인승 좁은 버스에서 석유 냄새는 역하게 나를 흔들고, 버스비를 받던 어린 소년의 맑은 얼굴에 청년 윤동주의 얼굴이 겹친다. 취한 듯 흔들리며 연길 시내로 돌아가는 길, 저만치 낮달이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한사코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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